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8화 (98/117)

98화.

황궁, 루비궁.

궁 안은 진한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팔이나 머리가 잘려 쓰러져 있는 사람들 혹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루비라는 이름처럼 붉은 궁은 피인지 장식인지 모를 정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끔찍한 살인 현장의 주범으로 보이는 사내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서 있었다.

“저를 버리시려 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이, 이 황후가 어찌 황자를 버리겠습니까.”

“많이 당혹스러우신가 봅니다. 이리도 몸을 떨 정도면.”

사내는 황후의 몸에 올라타 단도를 목에 들이댔다.

그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풍성한 드레스를 붉게 적셨다.

“당신을 지금 죽이지 않아. 내게도 당신이 필요하거든.”

“…….”

“하지만 내가 이 손으로 당신을 곧 죽일 거야. 그러니 내 말, 잘 들어.”

황후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혹시라도 칼끝이 목에 닿을까 조마조마하면서 말이다.

“지금 투입된 병력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풀어. 내가 직접 대공저로 가 황제를 죽일 거야. 당신의 이 머저리 같은 군대는 이제 도저히 믿질 못하겠거든.”

“…….”

“황제와 데카루스의 머리를 잘라 성벽에 걸어놓으면 그것 또한 보기 좋겠군. 원한다면 당신 머리도 걸어줄 수 있어.”

사내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황후의 눈 밑을 그었다.

새하얀 피부엔 붉은 물감이 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피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으면 명심해.”

“…….”

“그럼 기대할게, 베로니카.”

* *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 황자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

“원래 예정대로라면 항상 정오에 간수가 간단히 보고를 하러 와야 하는데, 영 소식이 없어 직접 가 보니 간수와 위병 전부 죽어 있었습니다.”

“저희도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올해 교정시설에 예산을 들여 보안에 철저히 신경을 썼는데도 이런 일이….”

데카루스는 이마를 짚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정관들은 또 그가 어떤 처분을 내릴지 두려움에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8황자를 찾아. 그가 또 어디서 뭘 하고 다닐지 모르니 그를 찾는 게 급선무다.”

“예, 전하.”

“예? 치안국에 아무런 처분도….”

“됐어.”

그들은 변해버린 주군의 모습에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칼이라도 날아들어야 정상인데 이 정도로 끝내다니.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변한다는데.

그렇게 행정관들이 수군대며 자리를 뜰 때였다.

끼익-

“저, 전하!!”

드디어 엘레나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또 대체 이번엔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것일까.

데카루스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서슬 퍼런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또 뭐야.”

“황후파의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서신입니다! 지금으로선 저희 쪽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전하.”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황후파와 비등한 게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

“전하, 부디 명령을….”

데카루스는 눈을 감고 의자에 고개를 기댔다.

“자원한 공국민이 몇 명이나 되지.”

“현재 7000명 정도로 예상됩니다, 전하.”

“당장 출병시켜. 데제르 병사들의 예상 도착일은.”

“내일 정오쯤입니다, 전하.”

“오는 대로 황궁으로 보내. 또 현재 대공저의 보안을 비상으로 끌어올린다. 황태녀 전하와 황제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

“예, 전하!”

* * *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엘레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누가 보면 눈이 잔뜩 쌓인 호숫가에서 누워있는 줄 알 테다.

“헤헤….”

사실 지금 기분이 매우 좋다.

누가 머리통에 돌멩이를 던져도 좋을 것 같다.

“나도 아빠가 있다!”

엘레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실실 웃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이야.

꼭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가 생긴 기분이랄까.

해장국이라도 먹은 듯 속이 아주 든든하다.

“아주 행복해, 아주!”

끼익-

“어? 카루스!”

그렇게 침대를 누비고 있을 무렵 조금 지쳐 보이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레나는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도도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왜 이제 왔어.”

“바빴어.”

데카루스는 톡 튀어나온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토끼처럼 보드라운 생명체가 너른 품 안에 폭삭 안겼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이마에 닿은 입술이 눈꺼풀을 간질였다.

엘레나는 간지러운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러자 그는 코와 입술에 한 번씩 입을 맞춘 뒤 다시 한번 와락 껴안았다.

“갈비뼈 안 아파?”

“이 정돈 괜찮아.”

엘레나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팔을 잡고 옷장 앞으로 이끌었다.

“자, 이리 와. 내가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

꽉 맞잡은 손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옷장 옆 거울에는 두 뼘 정도 차이 나는 그와 그녀가 보였다.

“당신 키 진짜 크다.”

“응, 근데 당신은….”

그의 시선이 엘레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주욱 훑어 내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괘씸했다.

엘레나는 입술을 빼죽 내밀고 그를 째려보았다.

“뭐!”

그는 가자미눈을 한 그녀의 모습이 새삼 귀여웠는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내 키에 불만 있어?”

“그럴 리가.”

163cm 정도면 분명 작은 키는 아닌데 왜 다들 자꾸 작다고 하는 거야.

하긴 여기 여자들이 한국보다 조금 키가 크긴 하지.

하지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릴 정돈 아니라고!

“무슨 생각 해.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준다며.”

“아, 아니. 도와줄게.”

정신이 번쩍 든 엘레나는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뭐야?”

“뭐가.”

“왜 아무것도 안 해. 단추라도 풀어.”

“당신이 도와준다며.”

그는 태연자약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이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의 빅데이터를 분석하자면, 그러니까 지금 단추를 풀어달라는 말인가?

“당신 손 멀쩡하잖아.”

그러자 그는 뒷짐을 쥐며 손을 숨겼다.

“지금 손이 아파서.”

일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왈칵 구겼다.

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린다 이거지.

“나도 손이 아파서 못 하겠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생떼에는 생떼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쫙 펴고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거야.

“…….”

그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던 데카루스는 이내 천천히 다가와 손바닥에 입술을 짓눌렀다.

“뭐, 뭐 하는 거야!”

놀라서 달아나자 데카루스는 얇은 손목을 붙들었다.

입술이 맞닿은 손바닥에선 물컹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당신, 무슨…!”

말랑거리고 촉촉한 무언가가 손가락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비단뱀처럼 꿈틀거리는 살덩이는 따듯한 흔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대번 놀라 주먹을 쥐자 그는 아쉬운 듯 보였다.

“아프다고 해서.”

“나, 나는. 아니 이건….”

너무 당황해서 말조차 쉬이 나오지 않았다.

손이 저리듯이 짜릿한 감각에 얼굴은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아, 안 아파!”

“안 아파?”

“어, 하나도!”

그러자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얼굴을 뗐다.

이 악마 같은 인간의 장난에 놀아나고 만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럼 이제 할 수 있겠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셔츠를 살짝 가리켰다.

짓궂게 움직이는 저 까만 눈썹을 콩 때려주고만 싶었다.

“날 태우면 분명 사리가 나올 거야.”

“무슨 소리야.”

“됐어.”

엘레나는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심통 맞은 얼굴로 셔츠에 손을 올리자 이마엔 다시 입술이 닿았다.

“가만히 있어.”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엘레나는 서툰 손짓으로 천천히, 하나씩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갑자기 왜 긴장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먹었던 저녁이 얹힐 것만 같았다.

“표정이 이상한데.”

“가만히 있으라니까.”

손끝에 맞닿아 사각거리는 셔츠 소리.

구멍 밖으로 단추가 튕겨 나오는 소리.

들이마셨다 내쉬는 조용한 숨소리.

평소에는 귀 기울여 듣지 않던 소리들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당신 귀가 빨개.”

“착각이야.”

사실 지금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은 것도 간신히 식히고 있다.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믿지도 않는 부처님 얼굴을 생각하고 있다.

왜 단추 하나 푸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엘레나는 입술을 꾹 물고 끝까지 묵언수행했다.

“후, 다 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제 다음 단계가 남아있었다.

바로 셔츠 벗기기.

이건 더더욱 극한의 지옥 난이도다.

이미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근육들 덕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때문이다.

“벗겨 줘.”

그런 눈빛, 그런 말투,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엘레나는 눈으로 온갖 쌍욕을 하며 소매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살그머니 드러나는 다부진 근육들이 저를 봐달라며 아우성쳤다.

“당신 이상한데. 어디가 아픈 거야?”

이 인간 분명 다 알면서도 이러는 거다.

이래 봬도 벌써 데카루스 경력 N달차라고!

척하면 척이다.

“아니, 하나도?”

엘레나는 죽어라 입술을 물며 한쪽 팔을 벗겼다.

울퉁불퉁한 엠보싱이 잔뜩 붙어있는 몸에 시선이 절로 갔다.

“자, 옆으로 돌아.”

마치 세신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의 몸엔 손끝 하나 대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당신 상태가….”

“아니!”

엘레나는 다가오는 손을 꽉 붙잡았다.

덕분에 그의 몸과 엄청나게 가까워지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그리고 마치 식탁보 빼기 게임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살짝 셔츠를 집어 홀라당 벗겼다.

“후하, 후하.”

“뭐 하는 거야.”

“심호흡.”

벗겨진 셔츠를 꼭 붙잡고 라마즈 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이 망할 놈의 심장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됐지.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해.”

“아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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