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7화 (97/117)

97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민망함에 이불을 크게 뒤집어쓰자 그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왜, 뭘 원하길….”

똑똑-

그때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노크가 들려왔다.

데카루스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들어와.”

끼익-

“저, 전하. 긴급회의 일정이….”

“간다고 전해.”

“예, 예!”

쾅-

“하….”

그는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쉬더니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민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갔다 올게.”

“가면 언제 와?”

“최대한 빨리 올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 와 봐.”

그러곤 의심쩍은 표정을 지은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선물.”

“…….”

데카루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나 싶어 입을 떼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멋대로 달라붙었다.

긴 팔이 능숙하게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는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더 끈적하게 다가왔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파고드는 살덩이는 맞닿은 혀를 살며시 핥았다.

귓가에 퍼지는 그의 숨소리가 한층 더 외설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가 등을 주욱 훑으며 몸을 눕히려 하자 엘레나는 깜짝 놀라 그를 멈춰 세웠다.

“자, 잠깐.”

“…왜.”

이미 맛이 두 번은 간 듯한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엘레나는 팔을 쭉 뻗어 너른 어깨를 천천히 밀어냈다.

“당신, 갈비뼈!”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은 그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엘레나의 이마에 진하게 키스한 뒤 겉옷을 주워 들었다.

“갔다 올게.”

“응.”

쾅-

그가 떠난 방 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 하릴없이 누워있으려니 마음이 헛헛했다.

“뭐 하지.”

엘레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창문을 열어놓은 탓인지 따듯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눈꺼풀이 감기긴 했지만 이미 많이 잔 탓에 잠들고 싶진 않았다.

“아!”

엘레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황제 폐하가 대공저에 계신데 한 번도 뵈러 간 적이 없다.

“제정신이야!”

이런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원통할까.

같은 집에 있으면서 한 번도 찾아뵙질 않는다니.

“미쳤어, 미쳤어.”

그렇게 서둘러 거울 앞에 서니 웬 사자 한 마리가 있었다.

엘레나는 비장한 얼굴로 고무줄을 쥐더니 질끈 묶어 넘겼다.

아무래도 이 곱슬머리를 단정히 빗겨줄 사람은 제인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제인을 부를 수가 없다!

“옷, 옷.”

옷장을 여니 시녀들이 준비한 여름옷들이 주욱 펼쳐졌다.

역시 공식적인 자리엔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지!

엘레나는 허둥지둥 옷가지를 집어 몸에 욱여넣었다.

길고 풍성하게 늘어진 치마에 소매에는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그리고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까지.

“완벽해!”

엘레나는 흐뭇하게 미소 짓더니 얼른 방을 뛰쳐나갔다.

폐하께선 분명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최고 인사들만 머무는 방에 계실 테다.

“으아아아.”

3층으로 올라가자 역시 그 앞을 지키는 위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 앞으로 가자 병사들은 무릎을 굽히며 합창했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래. 아무튼 여기 황제 폐하께서 계신 거 맞지?”

“예, 맞습니다.”

위병들 중 한 명은 고개를 빳빳이 들더니 우렁차게 그녀의 출입을 알렸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방이 펼쳐졌다.

“엘레나?”

“폐하!”

엘레나는 부리나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엘레나, 네가 어쩐 일로.”

“폐하 생각이 나서요.”

사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방금 생각난 거지만 이 정도 거짓말은 해줘야 사회생활이 가능하지.

“우리 엘레나.”

그는 기분 좋게 껄껄 웃어대며 조심스레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왠지 저번보다 더 마르신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럼, 우리 딸을 보니 더더욱 좋은 것 같구나.”

하지만 그는 잔기침을 참으며 억지로 웃고 있었다.

순간 울컥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프지 마세요….”

“아프지 않단다. 너를 보는데 어찌 아플 수가 있겠어. 우리 사랑스러운 엘레나.”

“아빠….”

찡한 마음에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껴안았다.

이 폭신폭신하고 몽글몽글한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저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평생요.”

“그럼, 우리 딸이 결혼도 하고 손주도 낳는 것까지 봐야지.”

“네??? 손주요???”

엘레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기함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손주라니.

아니, 결혼도 안 할 건데 무슨 결혼이야!

“그래, 스큘러스 공과 결혼하면 당연히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것 아니냐. 그렇다면….”

“아니요! 전 그 사람이랑 결혼은커녕 아이까지 가질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렇게 막 혼자서…!”

그는 얼굴이 벌게져 손짓, 발짓하는 그녀를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네가 황제가 되면 당연히 국서를 맞이해야 할 텐데 이미 네겐 마음에 둔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네??? 황제요???”

손자에 이어 황제라니.

2연타로 맞아버린 어퍼컷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네가 황태녀니 당연히 차기 황제는 엘레나, 네가 아니겠니.”

“아, 아니. 제1계승권자가 데카루스라면서요. 게다가 저는 황제가 될 재목도 아니고….”

그는 당연한 걸 뭘 묻냐는 얼굴로 산타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다정함이 물씬 묻었다.

“네가 델리트 지역의 일로트들을 해방시키고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 또한 이 아비가 잘 알고 있단다.”

“그걸 어떻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걸 말할 사람은 데카루스밖에 없다.

이 인간을, 입을 아주 그냥 꿰매버리든가 해야지.

“이 에스텔에게 필요한 사람은 너란다, 엘레나. 제국민들을 위해 앞장서 일할 수 있는 사람. 온전히 자신을 굽혀 낮은 자를 돌볼 수 있는 사람.”

“…….”

“난 네가 황제가 되는 걸 단 한 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단다. 어렸을 때부터 말야.”

“폐하….”

“오직 너만을 위한 자리었단다, 엘레나.”

그의 말에 가슴속엔 비눗방울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한없이 믿어주고 한없이 지지해주는 것.

겉보기에 모자라고 부족한 씨앗일지라도 매일 깨끗한 물을 주며 꽃이 필 때까지 계속 바라봐 주는 것.

“제겐 이 모든 게 전부 다 과분해요….”

“과분하다니.”

“제 세상엔 그저 미움과 혐오뿐이었는데 어느새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가끔은 이 모든 게 한낱 꿈은 아닐까 두렵기도 해요. 마치 손에 쥐면 사라지는 구름처럼.”

황제는 긴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쏙 안았다.

천천히 등을 두드리는 온기가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네가 그 어떤 삶을 살았든 난 너를 사랑한단다, 엘레나. 널 가진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내 딸이니까.”

엘레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따듯한 파도가 몰아쳤다.

마치 노을에 물든 붉고 잔잔한 바다처럼 그렇게 아스라이.

그 짭짤한 물에 지금까지 음지에 고인 이끼들이 쓸려 내려간다.

가끔은 눈이 따갑기도 하겠지만 이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빠가 제 아빠여서 좋아요.”

“나도 엘레나, 네가 내 딸이어서 좋단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들은 서로를 품어 안았다.

거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단단한 나무처럼.

그 어떤 풍파에도 견뎌낼 튼튼한 기둥처럼.

* * *

대공저, 집무실.

성난 고양이처럼 털을 바짝 곤두세운 데카루스는 지금 매우 기분이 안 좋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엘레나의 생각뿐이었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회의를 마치고 그녀에게 달려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데제르의 내전이 끝나 병력 공급이 원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모래사막 때문에 이동 시간은 다소 지연되겠지만 이제 데제르 공국의 전체가 황제파라 병력에 막대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덕분에 황후파의 병력이 줄어들기도 했고요. 꼴 좋습니다. 그러니 왜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 가지고선….”

“브레오경!”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헛소리를….”

브레오는 데카루스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이라도 더 헛소리를 하면 당장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기 전에 언질을 준 만델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황후파가 더 우세한 상황입니다. 긴장들 늦추지 마시지요. 서바테일에서 들여온 신무기가 한 번에 사람을 열댓 명 날려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우리는 겨우 핸드캐논뿐이라고요!”

“맞습니다. 저도 한 끗 차이로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다고요! 군사국에선 이런 신무기 도입엔 관심이 없는 겁니까?”

“군사국에서도 신무기 도입을 하고 싶지만 경제국에서 예산을 안 내주는데 저희라고 어쩔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늘 말합니다. 군사력이 국력이라고! 하지만 경제국에서는….”

“그걸 왜 경제국 탓을 합니까? 군사국에서 횡령 사건 터진 건 생각도 안 나시나 봅니다? 저희는 예산을 충분히 드렸는데도 그쪽에서…!”

“조용.”

군사국장 킬리언과 경제국장 만델의 싸움에 데카루스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매우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풍기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긴급 회의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엔 긴급이 아니라 싸우러 나온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전하.”

그는 머리가 아픈 듯 눈을 감더니 이마를 밀어 올렸다.

“그럼 말해. 뭐가 그리 긴급한지.”

“그, 그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꾸물대는 것일까.

데카루스는 답답함에 하릴없이 만델을 집어 물었다.

“경이 말해.”

“8황자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