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6화 (96/117)

96화.

“언니, 언니.”

“일어나.”

분명 데카루스 옆에서 자고 있었는데 언니라니.

게다가 언니라고 부를 사람이 이 세계에 있나?

작은 부름에 감았던 눈을 뜨자 웬 두 소녀가 보였다.

“너흰…. 누구야?”

한 명은 검은 머리를 한 소녀, 또 한 명은 분홍 머리를 한 소녀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엘레나.”

“…나?”

“응, 우린 언니이자 엘레나야.”

“‘나’이자 엘레나….”

“그래, 맞아.”

떨떠름하게 답하자 아이들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럼…. 여긴 어디야?”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우주처럼 끝없이 펼쳐진 넓은 공간에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방.

“언니의 무의식 속. 엘레나의 작은 세계.”

“작은… 세계….”

아이들은 꺄르르 웃으며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여전히 멍하니 앉아만 있자 그들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 이리 와.”

얼떨결에 일어난 순간 허공엔 셀 수 없이 많은 투명한 비눗방울이 나타났다.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 속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이든?”

“맞아. 에이든 그리고 노아.”

“나쁜 놈!”

“나쁜 놈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사람을 죽이고 언니까지 죽이려 했는데 나쁜 놈이지 뭐야?”

소녀들은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며 싸웠다.

“얘들아, 그만….”

“그럼 언니가 말해!”

아이들은 합창하듯 동시에 말했다.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귀여웠다.

“뭘?”

“에이든은 좋은 사람이야?”

“아니면 나쁜 사람이야?”

분홍 머리 소녀와 검은 머리 소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이든은 어떤 사람이었지?

“에이든은….”

소녀들은 기대가 되는 듯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어려워할 필요 없어.”

“맞아, 그냥 선택하기만 하면 돼.”

“YES.”

“NO.”

“무슨 소린지….”

“참, 답답하게. 여길 봐.”

검은 머리를 한 소녀가 비눗방울을 살짝 터트리자 새하얗던 방 안이 온통 까맣게 변했다.

“야! 네가 먼저 하면 어떡해!”

“매도 일찍 맞아야 아프지 않다고 했어. 잘 봐.”

까맣던 화면엔 어린 시절 에이든의 모습이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울렁였다.

‘레나, 내가 만약 널 죽이러 온 첩자라면 어떡할 거야?’

‘네가? 날? 참나, 개미가 사자 밟아 죽이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나 진짜로 진지하다니까? 만약 진짜 그러면 어떡할 거냐고.’

‘그 멍청한 머리 한 대 때려주고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할 거다. 왜!’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 생각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검은 머리 소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렇게 아련한 표정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봐. 저렇게 처음부터 이빨을 세우고 있었어. 기회를 보고 있었다고!”

“하지만 날 진짜 죽이진 않았는걸….”

“답답하네, 정말.”

검은 머리 소녀는 툴툴거리며 이번엔 좀 더 크기가 큰 비눗방울을 터뜨렸다.

‘너, 설마…. 데카루스를 칼로 찌른 것도 네가 한 거니…?’

‘응, 내가 했어. 아, 물론 황후가 시켜서 한 짓이긴 하지만 내 흑심도 조금 섞여 있었지.’

‘…….’

‘그래서 내가 찔렀어. 물론 그 새끼 빼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 실력이 워낙 좋거든.’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간신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심장이 조여왔다.

“봐, 엘레나. 에이든은 저렇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 했어. 실수도 아닌 고의로! 그것도 황위가 탐나서.”

“…….”

“게다가 널 13년 동안 속이기까지 했지. 밀러가의 영식? 타국에서 쫓겨난 귀족? 아니, 전부 다 아니야. 처음부터 널 죽이기 위해 계략을…!”

“그만, 그만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

구역질이 나 토할 것만 같았다.

맞다. 그는 데카루스를 죽이려 했고 황제인 그녀의 친부 또한 죽이려 했다.

그리고 친구라고 믿었던 그 오랜 세월을 부정하는 끔찍한 거짓말을 하기도 했지.

“에이든은…. 에이든은….”

“잘 생각해 봐. 에이든이 네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황후와 손까지 맞잡았어. 그리고 그녀의 명에 따라 널 죽이려고까지 했지. 그는 악마야. 괴물이라고.”

검은 머리 소녀는 어깨를 감싸 안고 귓속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죽여도 돼.”

“너 그만해!”

분홍 머리 소녀는 검은 머리 소녀의 몸을 억지로 떼어냈다.

바닥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소녀는 세모 눈을 하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야! 이러기 있어? 아직 다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이제 내 차례야. 언니, 잘 봐.”

소녀가 작은 손가락을 들어 투명한 비눗방울을 터트렸다.

‘그래도 넌 좋았겠네. 부모님이 귀족이고 집도 있고 맛있는 것도 배부르게 먹었을 거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 얼굴도 알 테고. 나 같은 건 그런 거 꿈도 못 꿔.’

‘그래도 난 지금이 좋아, 레나.’

‘지금이 좋긴 뭐가 좋냐? 나 때문에 사서 고생만 하는데.’

‘널 만났잖아. 난 널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 매일 배불리 먹을 순 없어도, 잠을 충분히 자진 못해도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 내가 살아온 순간 중 지금이 가장 특별해.’

저땐 한창 자존감이 낮았을 때였다.

인생을 비관하고 저 스스로를 비하했을 때 에이든이 저 말을 해줬지.

부모님이 없는 자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으니까.

“그래, 언니. 에이든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언니 옆을 지켜왔어. 힘들 때는 항상 튼튼한 버팀목이 돼주기도 했지. 그렇게 평생을 언니 옆에 있던 사람이야.”

“맞아….”

“에이든은 황후의 뜻대로 살아왔을 뿐이야. 황후의 인형처럼 움직였을 뿐이라고. 분명 사정이 있을 거야.”

소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전부 황후의 명에 따라 움직인 것일 뿐.

그의 뜻으로 데카루스의 어머니와 나를 죽이려 한 건 아니지.

“자, 또 봐.”

소녀는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또 다른 비눗방울을 찾아 콕 찍어 눌렀다.

‘콜록! 콜록! 야, 하아…. 너 미쳤어? 너까지 죽으려면 어쩌려고 여길 뛰어들어!!!’

‘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내 목숨이 무슨 상관이야. 난 너 없인 못 살아. 죽으려면 같이 죽어.’

‘…….’

‘다음번에 같은 일이 일어나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후회 따위 없어.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였지.

파도가 거세서 정말 죽을 뻔했는데 에이든이 거침없이 달려들었어.

몸집도 작은 게 어쩜 그렇게 수영을 잘하던지.

물살이 세고 발끝이 닿지 않는 곳이었는데도 날 이끌고 육지까지 헤엄쳐서 간신히 살았지.

“봐, 언니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언닐 죽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

“에이든이 분명 잘못한 건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렇게나 언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어? 언니도 에이든을 좋아하잖아.”

“응…. 나도 에이든을 좋아해. 에이든이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가 미워. 너무너무 미운데, 그런데 난….”

두 소녀는 찰싹 달라붙어 손을 맞대고 가까이 다가왔다.

눈물을 머금고 올려다보자 그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선택해.”

“YES?”

“NO?”

* * *

“하아…! 하아….”

“엘레나, 엘레나. 정신 차려.”

눈을 떠 보니 두 소녀는 온데간데없었고 익숙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온몸은 식은땀을 흘려 축축했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차가 아닌 방이었다.

“내가 왜….”

“당신이 너무 곤히 자서 깨울 수가 없었어.”

손수건을 든 데카루스는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땀을 조심스레 닦았다.

“꿈…인가.”

“무슨 소리야.”

“나를 닮은 작은 꼬마 아이 두 명….”

검은 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분홍 머리를 한 여자아이.

꿈이었지만 너무나도 생생했어.

마치 진짜 나를 만난 것처럼.

“당신 더 쉴 필요가 있겠어. 오늘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데카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수건이 담긴 트레이를 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마.”

엘레나는 울먹울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셔츠를 잡아끌었다.

그가 가면 다시 이 넓은 방에 혼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알았어.”

그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따스한 온기가 담긴 눈빛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

갑작스러운 칭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 말은 좀 자제해.”

“왜, 싫어?”

“아니, 부끄럽잖아.”

그는 살며시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데.”

남이 부끄러워하는 걸 좋아하다니.

취향 한번 참 독특하다.

“변태.”

“변태?”

“응, 변태.”

“허.”

데카루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진짜 변태가 뭔지 보여줄까?”

“…뭐?”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그는 꼭 인간의 탈을 쓴 서큐버스 같았다.

데카루스는 단추를 천천히 풀어 내리며 셔츠를 젖혔다.

“당신이 나보고 변태라며. 그래서 보여주고 싶어서.”

“아, 아니! 나는!”

엘레나는 놀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다, 당신이 자꾸 옷을 벗으니까….”

“무슨 소리야. 이건 그냥 더워서 그런 건데. 난 당신이 일어나면 나비가 변태하는 걸 보여주려 그랬지.”

순간 토마토 같은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이 인간 분명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괜히 사람 민망하게 하려고!

“됐어. 말 걸지 마.”

“왜, 아깐 같이 있어 달래 놓고.”

“됐어, 나가. 이제 필요 없어.”

엘레나는 벌레라도 날리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자꾸 말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그의 장난에 질려버렸다.

“아님, 진짜 당신이 원하는 걸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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