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일주일째.
두 종파 간 병력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반 이상의 병력을 투입해 황궁을 진압했지만 그에 대항하는 황후파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에 쉬이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움인 에이든의 부재로 황후파의 기세는 확 기울게 되었다.
“몸은 좀 어때?”
데카루스 역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원래 2주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엄청나게 튼튼한 몸 덕분인지 빨리 낫는 것 같았다.
“괜찮아졌어. 이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야.”
“그래도 움직이지 말고 좀 누워있어. 2주는 누워있어야….”
“전하, 황후 폐하께서 보내오신 서신입니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시종은 공손히 종이를 건넸다.
서신을 받아 들고 찬찬히 읽던 데카루스는 이내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왜, 뭔데 그래.”
“황후가 또 장난질을 하려는군.”
그는 조소를 짓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 지금은 푹 쉬어야….”
“또 무슨 헛소릴 하는지 들어나 보게.”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엘레나는 손을 대자로 뻗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 못 가. 가지 마. 갔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그럴 일 없어. 금방 돌아올게.”
“그럼 나도 같이 가.”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는 그녀에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던 걸까.
그는 이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걱정하지 마. 무사히 잘 다녀올 테니까.”
“안 돼, 안 돼, 안 돼!”
엘레나는 혹시라도 갈비뼈에 또 무리가 갈까 그를 살포시 안았다.
“그냥 옆에 가만히 있을게.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지켜줄 거잖아.”
그는 한 번 더 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정말?”
“응.”
엘레나는 기쁜 듯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 * *
황궁, 루비궁.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호오, 우리 황태녀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혹시 이 어미가 보고 싶어 그런 것입니까.”
“그저 자식이 된 도리일 뿐입니다, 황후 폐하.”
“황태녀께서도 능청이 많이 느셨습니다. 이제야 황족답군요.”
황후는 즐거운지 긴 손톱을 들어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끔찍한 악몽처럼 귓구멍에 파고들었다.
“황송하옵니다.”
“뭐, 이렇게 됐으니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지요.”
황후는 턱을 괴고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8황자가 갇혀 있다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어찌 우리 황자께서 그곳에 갇혀 계실까. 참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황후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8황자를 죽이세요.”
순간 엘레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분명 에이든과 황후는 손을 잡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를 죽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황후 폐하.”
데카루스 역시 조금 의아한 듯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황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흘겼다.
“8황자는 내 쪽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패입니다. 그러니 더 기어오르기 전에 밟아 죽이라는 말입니다.”
황후는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만화에나 나오는 마녀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 쪽에서도 사형을 선고할 계획입니다. 허나 황후께서 무슨 의도로 황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해준다고 했었지요.”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톱으로 볼을 툭툭 쳤다.
“보자, 보자. 어디부터 말해줘야 할까.”
“공은 디아나, 그러니까 공의 어미를 이 황후가 죽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직접적으로 공의 어미를 죽인 건 8황자입니다.”
일순간 데카루스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황후가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했다.
한데 이제 와서 갑자기 에이든이 그녀를 죽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께서 11살, 그러니까 황자가 9살이던 때 공의 어머니를 그가 죽였습니다. 그때 아무런 증거도, 단서도 나오질 않았지요. 이제 그 이유가 뭔지 알겠습니까, 공.”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엘레나는 떨리는 손에 깍지를 꼭 잡아 꼈다.
“그걸 지금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데카루스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쏟아지는 감정을 참으려는 듯 이를 악문 모습이 안쓰러웠다.
“혹시나 공의 그 여린 마음이 8황자를 살려둘까 하는 염려 때문에 말씀해 드리는 겁니다. 그런 괴물은 이 세상에서 없애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동요하지 않던 그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황후는 뱀처럼 요사스럽게 눈을 뜨며 입매를 활짝 올렸다.
“역시 공께선 아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군요. 그렇다면,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엘레나에게 닿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황태녀께서는 8황자가 왜 그 보육원에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알고 있다.
분명 그때 황후가 황제가 되기 위해 황족을 축출하려 제일 만만한 에이든을 보육원으로 내쫓았다고 했었지.
“황자 전하께서는 그저 폐하께서 황족 축출을 목적으로….”
그러자 황후는 어이가 없었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족 축출이라. 뭐 겉으론 맞는 말이긴 합니다. 축출과 동시에 황태녀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황태녀 암살이라는 간단한 단어가 이토록 어렵게 느껴질 줄이야.
엘레나는 황후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
그러자 황후는 가볍게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쉽게 말하면 엘레나, 널 죽이기 위해 황자가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야.”
“…….”
“우정? 사랑? 그런 건 다 가식일 뿐입니다, 엘레나. 호시탐탐 널 죽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웃기지 않습니까.”
“전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황후는 금실로 짜인 붉은 부채를 탁 펴며 입을 가렸다.
“허, 안쓰러워라. 의외로 황태녀께서 상처를 많이 받으셨나 봅니다. 하기야, 그렇게 오랜 친구가 살인마에, 납치범에,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니. 이 황후 같아도….”
“아니야….”
“…….”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엘레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
“엘레나.”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황자를, 황자를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증오로 가득한 얼굴이 황후를 찢을 듯이 노려봤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여유가 넘쳐 보였을 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황후의 말은 전부 거짓말일 테다.
에이든을 배신하려고 거짓을 고하는 것일 테다.
그래야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게 납득이 된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황자께 직접 물어보면 될 테지요.”
“내가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
엘레나는 독살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곤 곧바로 뒤를 돌아 뛰쳐나갔다.
“엘레나!”
그러자 황후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우리 따님께서 매우 혼란스러우신가 봅니다. 가서 등이라도 토닥여 주시지요, 스큘러스 공.”
“에스텔에 무한한 영광을….”
데카루스는 이를 까득 물곤 마지막까지 예를 지켰다.
그러곤 곧장 돌아 그녀를 향해 뛰쳐나갔다.
“엘레나! 엘레나!”
“놔!!!”
엘레나는 잡힌 팔을 세게 뿌리치며 그를 노려봤다.
둥글게 말린 눈가엔 투명한 눈물이 곧 떨어질 것처럼 고여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에이든이 그럴 리가 없어. 에이든이….”
엘레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색에 데카루스는 그녀를 품에 안고 안정시켰다.
“그래, 엘레나. 그럴 리 없을 거야. 그러니 일단 돌아가자. 당신 상태가 안 좋아 보여.”
데카루스는 엘레나를 먼저 마차에 올려 태웠다.
몸이 잘게 떨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당장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이리 와.”
데카루스가 고갯짓을 하자 엘레나는 너른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가빴던 호흡이 그의 숨소리에 맞추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차분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황후가 한 말, 잊어버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굳이 오겠다고 떼를 쓸 때 제대로 말렸어야 했는데.
“에이든이 그럴 리 없어. 끝까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응, 그래. 그럴 리 없어.”
“황후가 거짓말을 하는 거야. 에이든을 죽이려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고 하는 거라고.”
얼추 맞는 말이다.
손을 잡았던 노아를 배신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는 속셈이겠지.
그래서 노아가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로 도발을 한 것일 테고.
큰 타격을 준 건 사실이긴 하지만 어차피 노아는 죽을 목숨이었다.
이미 엘레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에.
더 이상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에이든을 죽일 거야?”
새들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막을 거야, 카루스. 난 에이든 저렇게 못 보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꼭 참으려 애쓰는 모습이 가여웠다.
하지만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엘레나.
“그래, 이만 자. 대공저에 도착하면 깨워줄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