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4화 (94/117)

94화.

“그게 걱정돼서 이렇게 온 거야?”

에이든은 팔을 뻗어 고개 숙인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유롭게 미소 짓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빌어, 제발. 제발….”

“내가 이런 걸로 죽을 것 같아? 난 안 죽어, 레나. 널 두고 내가 어떻게 죽어.”

“하지만, 에이든….”

그는 여느 때처럼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태평한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어떻게 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이라도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간다는 말일까.

무릎에 닿은 돌바닥은 뼈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느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불안했다.

“날 믿고 기다려. 난 절대 안 죽어.”

“하….”

태연자약한 그의 모습에 엘레나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며칠 새에 일어난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깨질 듯한 두통에 엘레나는 철창을 잡고 일어나 간신히 몸을 가눴다.

“괜찮아?”

“응, 난 괜찮으니까 네 걱정이나 해.”

엘레나는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비틀비틀 걸었다.

꼭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 바람에 꺾인 갈대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그냥 잠들고 싶어….”

차라리 픽 하고 쓰러져 오랫동안 잠이 들었으면.

차라리 몸이 아파 쓰러져 사경을 헤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에겐 이 모든 상황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엘레나는 간신히 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곧장 데카루스에게 향했다.

조금이라도 그를 봐야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았다.

끼익-

문을 열자 의원과 이삭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붕대에 휩싸인 그가 보였다.

“엘레나.”

“응, 나왔어.”

엘레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힘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중심 잡아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어디 아파?”

“아니, 아프긴.”

데카루스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탓에 엘레나는 민망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아니야, 거짓말. 좀 피곤해서 그래.”

엘레나는 의자를 끌어다 그의 옆에 앉았다.

피딱지가 붙어있는 얼굴과 몸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팠겠다.”

“안 아파.”

“당신도 거짓말하네.”

“당신보단 아니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와 마주 보며 웃고 떠들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당신을 다신 못 볼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엘레나는 큰 손을 잡고 얼굴을 묻었다.

손이 큰 건지 아님 얼굴이 작은 건지 얼굴이 한 손에 다 들어갔다.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카루스.”

“진심 아니었잖아.”

“응, 아니야.”

“그럼 됐어.”

“정말?”

“응.”

그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따듯한 온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 심장까지 전해졌다.

이 순간을 주머니 속에 고이 접어 간직하고 싶었다.

“카루스.”

“응.”

“좋아해.”

그동안 해줄 수 없었던 그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저번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이 아니면 또다시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에.

꼭꼭 숨겨놓은 진심을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싫어졌어?”

“…아니.”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상념에 잠긴 듯 진지한 모습에 궁금증이 피어났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데카루스는 꼭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겉으론 아무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왠지 속마음이 투명하게 보였다.

“당신이 그 말을 하고 또 떠날까 봐.”

“내가 떠나?”

“응.”

일곱 살 때 사라졌던 걸 말하는 걸까.

떠났을 때는 그때밖에 없었으니까.

“그때도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곱 살 이전의 엘레나는 당돌한 아이였나 보다.

그렇게 결혼하자, 좋아한다 겁 없이 말해대다니.

“이제 안 떠나, 카루스.”

그의 말대로 그에게 완전히 물들어버렸다.

헤어날 수 없이 깊은 심연 속에서 첨벙대도록.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을 거야.”

따듯한 손길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봄날의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기분.

이대로 잠이 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게도 당신이 너무나 소중해졌어.”

“…….”

“떼어내고 싶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손가락에 엉기는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풀어졌다.

사락사락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이 모든 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

“그럼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예쁜 것도 보러 가자.”

“그래.”

엘레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잔잔한 바람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줄곧 아니라고 부정했다.

이 끔찍한 참상의 원흉이 스스로가 아니길 바라며.

“…나 때문에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이 전쟁, 나 때문에 시작된 거냐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하긴, 어떻게 저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엘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자 그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거짓말. 이 전쟁의 모든 게 전부 나와 관련돼 있잖아. 에이든이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당신이 날 찾으려 황궁에 온 것도. 전부.”

“엘레나.”

“애초에 내가 바보같이 에이든을 보러 가지만 않았어도.”

“…….”

“그럼 이렇게까지 큰일로 번지진 않았을 텐데.”

“엘레나, 나 봐.”

데카루스는 그녀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햇빛처럼 따듯한 시선이 살갗에 녹아들었다.

“당신 탓이 아니야.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하지만 이 한 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모두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을 텐데.

겨우 이 한 몸 지키겠다고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렸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죄책감을 안 가져.”

“그들은 모두 이 나라에 충성을 다한 자들이야. 황태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그들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거야.”

“그래도….”

마음이 저미듯 아팠다.

황태녀가 돼서 국민들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죽이는 꼴이라니.

“어차피 한 번쯤은 일어날 전쟁이었어. 제일 먼저 황위를 노린 건 황후야.”

“…뭐?”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먼저 황위에 오르려던 자가 황후야. 우리는 그걸 막으려 했고. 그런데 노아가 일을 쳐서 시기가 앞당겨진 것뿐이지.”

황후가 황제 폐하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르려 했다는 건가.

그러니까 황제가 되기 위해 엄마가 아빠를 죽이려 했단 말이지.

“어떻게 끝까지….”

이미 나락까지 떨어진 사람임에도 더 떨어질 곳이 남아있구나.

황후는 정말 최악이다.

어떻게 딸을 죽이고 버리려 했던 걸로 모자라 제 남편까지 죽일 생각을 하는가.

“내가 용서치 않을 거야. 황후는….”

“황후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를 보는 것 따위 서슴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뭐?”

일순 그의 몸짓이 싸하게 굳었다.

마치 큰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이쳤다.

“뭐라고 했어.”

“…….”

“말해.”

“…….”

“카루스!”

“황후가 어머니를 죽였어.”

일순간 엘레나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한 번 더 되물었지만 똑같은 말이 되돌아왔다.

“황후가 당신 어머니를 죽여…?”

데카루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반으로 떨어져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의 어머니마저 황후의 손에.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

“말도 안 돼.”

엘레나는 반복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제 어미를 죽인 살인마의 딸이라니.

“미안해. 미안해, 카루스….”

엘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먹였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이토록 자신이 싫었던 적이 없다.

“당신이 그럴 필요 없어. 죄를 저지른 사람은 당신이 아니잖아.”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볼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실수한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래도 카루스, 아무리 그래도 날 낳아준 사람이 당신 어머니를 해친 거잖아.”

“황후는 당신을 낳아주기만 했을 뿐 부모의 도리는 다하지 못했어. 너무 염려치 마.”

살며시 볼을 쓸어내리는 손은 파도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당신은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대체 어떻게 견딘 거야….”

“…….”

“내가 밉지 않아?”

엘레나는 울먹이며 그를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는 한 치의 일렁임조차 없었다.

그를 보자니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응, 하나도.”

“…….”

“당신을 사랑하기만 해도 모자란데 어떻게 미워하겠어.”

* * *

황궁, 루비궁.

태양 빛에 물든 붉은 기운이 온 방 안을 밝게 비추었다.

새빨간 구슬로 짜인 발은 빛을 뿜어 아름답게 빛났다.

그 가운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황좌에는 황후가 앉아있다.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그녀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황자가 잡혔다?”

“예, 황후 폐하. 8황자 전하께서 지금 대공저에 잡혀 계신다는 소식입니다.”

“허.”

황후는 새빨간 손톱을 입가에 갖다 대며 하프를 연주하듯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표독스러운 얼굴로 한참 눈알을 굴리던 황후는 이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소식이야. 그렇게 함부로 날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녀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술을 꾹 눌러가며 웃음을 참았다.

“스큘러스 공은.”

“현재 부상으로 휴식 중이라고 합니다.”

순간 황후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그러곤 대신들 중 한 명을 가리켜 명령했다.

“당장 서신을 보내. 회복 즉시 황궁에 들르라고.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할 터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