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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3화 (93/117)

93화.

“…에이든.”

피로 샤워를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문에 살짝 기대어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희대의 살인마 같았다.

“내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가?”

한 손에 긴 검을 쥔 에이든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다가왔다.

“이러니까 꼭 내가 진짜 나쁜 놈이라도 된 것 같잖아.”

피는 마치 붉은 비처럼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는데.”

“에이든, 그만해.”

“응, 엘레나. 미안한데 이번에는 진짜 못 참겠어.”

에이든은 뿜어져 나오는 웃음을 입술로 꼭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입술, 그 손, 그 몸. 전부 다 내 건데. 지금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내 걸 건드리고 있잖아.”

“엘레나, 뒤로 가 있어.”

데카루스는 위험을 감지한 듯 그녀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카루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딱딱한 팔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괜찮다고 속삭였다.

엘레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형이랑 이렇게 싸워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내가 항상 지기만 했었는데.”

“…….”

“그럼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싸움은 시작되었다.

칼과 칼이 만나 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에이든은 아주 여유롭게 모든 공격을 다 막아냈다.

마치 검무라도 추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에이든은 싸움의 ‘ㅆ’자도 모를 정도로 몸 쓰는 덴 꽝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유연하게 칼을 쓰는 것일까.

“형, 그렇게나 날 죽이고 싶은 거야?”

에이든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급소를 노려 칼을 찔렀다.

하지만 다행히 칼을 맞기 전 데카루스가 바로 튕겨내어 위기는 면할 수 있었다.

“역시 에스텔의 숨겨진 소드마스터라 이건가?”

“…소드마스터?”

현 에스텔 제국에 소드 마스터는 단 3명뿐.

그중 한 명이 이삭이고 또 한 명이 북부 프루아 공국의 막시우스 대공.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베일에 감춰진 자….”

그게 데카루스라니.

엘레나는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고로 소드마스터라 하면 타고난 재능이 아니고서야 노력만으로는 뚫기 힘든 자리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 능력과 뛰어난 검술 그리고 검기를 뿜어낼 수 있는 특출난 실력자만이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다.

“근데 난 그걸 뛰어넘는 필리움이거든.”

방어만 하던 에이든은 이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들의 싸움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에이든은 천하의 소드마스터를 앞에 두고도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그에 반해 데카루스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카루스…!”

저택 안은 칼끝의 마찰음과 거친 호흡 소리로 가득 찼다.

엘레나는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 조마조마하며 손을 꼭 끌어모았다.

“꽤 잘 버티네. 뭐,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에이든이 급소만 노리며 강하게 그를 몰아세웠다.

날카로운 칼끝이 갑옷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다.

“소드마스터가 이것밖에 안 됐어? 너무 실망인데.”

그는 도발이라도 하듯 연신 하품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이제 끝내야겠네.”

데카루스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기둥으로 내몰린 그는 간신히 몸을 굴려 몰아치는 칼날을 피했다.

그 틈을 타 데카루스는 에이든의 얼굴을 향해 세게 검을 휘둘렀다.

“허, 재주를 부리네.”

뺨에서 붉은 피가 흐르자 에이든은 실소하며 그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내던졌다.

쨍그랑-

그 순간 주위에 있던 큰 액자와 거대한 조각상들이 그의 몸 위로 와르르 떨어졌다.

“컥…!”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면 안 되지.”

에이든은 그의 흉부를 밟고 양손으로 번쩍 검을 들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데카루스가 죽을 수도 있다.

엘레나는 급히 계단을 내려가 에이든의 이름을 외쳤다.

“그만해, 에이든.”

“올라가 있어, 레나. 나 지금 많이 바쁘거든.”

“그만둬.”

엘레나는 높이 검을 든 그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쳐. 어서 올라가 있어. 금방 끝내고 갈 테니까.”

“그만두라고, 에이든.”

엘레나는 팔을 대자로 뻗고 데카루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라리 나를 죽여.”

“엘레나, 비켜…. 위험해….”

데카루스는 갈비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에이든, 제발. 그만해.”

엘레나는 울먹이며 맨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새하얀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레나, 이게 대체 뭐 하는…!”

놀란 에이든은 얼른 검을 내동댕이치고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가로챘다.

그러곤 갑옷을 벗고 옷을 찢어 상처 부위를 꽁꽁 감쌌다.

“너 제정신이야? 그렇게 다짜고짜 검을 잡으면…!”

쾅-

그 순간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저택 안을 울렸다.

놀라 뒤를 돌자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대문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아, 역시 여기 계셨네요, 8황자님.”

“…이삭?”

“어? 전하! 잠깐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 테니까. 그리고 데카루스 저놈은 왜 굴러다니고 있어?”

어깨에 검을 둘러멘 이삭은 한 손을 붕붕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짙은 먼지 너머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 일렬종대로 줄 서 있었다.

“하, 방해꾼들이 나셨네?”

에이든이 검을 주우려 하자 은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일순간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 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황자께서 아무리 필리움이라고 해도 이건 못 당하시겠죠?”

“응, 이건 나도 무리지.”

에이든이 두 손을 들며 항복 표시를 하자 이삭은 고갯짓으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하, 괜찮아?”

“응, 난 괜찮은데 카루스가….”

그녀의 말에 이삭은 쓰러져 있는 데카루스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야, 넌 꼴이 그게 뭐냐.”

“시끄럽고 이 조각상 좀 치워.”

데카루스는 기침을 토해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팀을 이뤄 무거운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카루스…!”

엘레나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날쌘 다람쥐처럼 달려나갔다.

머리엔 온통 피가 흘러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응? 하, 이 피 좀 봐.”

“별거 아니….”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입으론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별거였다.

병사들은 한달음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절뚝절뚝 걷는 그의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용병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자면 길어. 일단 가자. 카루스 치료부터 해야지.”

* * *

대공저, 집무실.

여느 때처럼 의원은 몸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게다가 이번엔 보조 두 명을 데리고 와 노련한 손길로 데카루스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상태가 좀 어떤가요?”

“예, 전하. 워낙 몸이 튼튼하셔서 갈비뼈가 조금 부러진 거 말곤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그 큰 조각상을 들이받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의원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줄였다.

온몸에 붕대가 둘둘 감긴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미어졌다.

또 이 상황에서 전쟁 상황 보고를 주고받는 그가 참 경이로웠다.

“현재 상황은.”

“예, 전하. 병력의 30%가 소진된 상황입니다. 절반 이상이 부상자입니다. 20% 정도 추가 병력을 투입하긴 했지만 곧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이삭, 네 계획은.”

“어차피 지금 정면 돌파는 무리야. 일단은 휴전 선언을 하고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습격할 거야. 부상자들도 휴식이 필요하니까.”

데카루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폐하께선 무사하신가.”

“그래, 우선은 대공저로 대피시켰어. 황궁의 대부분이 모두 황후파로 갈렸더군. 황자들은 물론 필립 경, 멕스 경까지 전부.”

“노아는.”

“지하 감옥에 가둬놨어. 무슨 명상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하고 있던데. 뭐 곧 자기 목이 날아가는 건 알고 있나 보지.”

이삭은 우스꽝스럽게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손을 올렸다.

“목이… 날아가?”

“뭐 말로만 그렇지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어. 감히 황제와 제1계승권자 살해 음모를 했으니까. 반역죄지. 나 같으면 그냥 황자로 살 텐데 왜 그렇게 큰 욕심을 부려 가지곤….”

일순간 엘레나의 얼굴은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던 그녀는 허둥지둥 움직였다.

“엘레나, 왜 그래.”

“나, 나 잠시 지하 감옥에 좀 가볼게.”

“엘레나!”

엘레나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에이든을 만나야 했다.

그가 사형선고라니.

“빨리, 빨리.”

한달음에 달려간 지하 감옥은 음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안은 어두컴컴한 건 물론이고 축축이 젖은 냄새가 진동했다.

날카로운 철창으로 막힌 입구 양옆에는 위병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이럴 때나 황태녀 신분이 유용하다니, 퍽 우스웠다.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에이든을 찾았다.

꽤 넓은 지하 감옥 안에는 여러 죄수들이 갇혀있었다.

“에이든!”

이삭의 말대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던 그는 번뜩 눈을 떴다.

“레나, 와줬네.”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빌어.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어. 빨리!”

엘레나는 축축한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철창을 잡아 흔들었다.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에이든은 여린 손을 꽉 잡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사형이래, 사형. 에이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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