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여기가 어디야….”
빛이라곤 한 줄기뿐인 어두컴컴한 방.
빈틈없이 쌓인 차가운 회색 벽돌이 둥그렇게 원을 이룬 공간에 새하얀 침대가 덜렁 놓인 이곳.
“대체 뭐야….”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지만 통증이 있는 걸 보니 현실이었다.
“분명 어제….”
어제 술을 진탕 마시고 그 상태로 창문을 깨서 탈출했지, 아마?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기억이 없어.”
엘레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납치당한 거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너무나 친절했다.
벽 한쪽 구석에는 뷔페처럼 딸기 케이크와 마카롱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책과 종이가 놓여있었다.
“뭐야, 대체.”
이불을 걷자 새하얀 잠옷 원피스가 드러났다.
옷이 바뀐 걸 보니 누가 친절하게 잠옷까지 입혀놓은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몇 번째 감금이야. 게다가 이번엔 취향이 독특하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평하게 딸기 케이크를 집었다.
아무래도 이젠 될 대로 되라 식이었다.
납치, 감금에 익숙해진다는 것도 참 웃기지만 이 상황에서 딸기 케이크나 먹고 있는 자신이 더 웃겼다.
그대로 테이블로 가자 웬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따가 데리러 올게.」
급하게 휘갈겨 쓴 필체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에이든….”
갑자기 화가 들끓어 오른 엘레나는 케이크를 입 안에 한가득 밀어 넣었다.
“얘가 또 뭐 하자는 거야? 나랑 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엘레나는 쪽지를 땅바닥에 던지곤 발로 퍽퍽 밟아댔다.
아무리 짓이겨도 분노가 가시질 않자 쪽지를 들어 눈앞에서 찢어버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내가 황궁에 남겠다고까지 했는데 날 이따위로 취급해?”
식식거리며 화를 삼키던 엘레나는 조그마한 창문으로 가 밖을 살펴보았다.
“여긴 대체…. 응? 저게 뭐야?”
창밖에는 웬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다.
또 저 멀리서는 화살과 폭탄이 날아다니고 건물이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하루 새에 바뀐 황궁 풍경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드넓은 풀밭은 모조리 타버려 잿더미가 되었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게 뭐야…. 진짜 전쟁이라도 난 거야?”
살면서 단 한 번도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미디어로만 보던 상황이 실제 눈앞에 펼쳐지니 팔다리가 벌벌 떨렸다.
“나가야 해…. 여기서….”
엘레나는 곧바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예상대로 문이 열리기는커녕 꽁꽁 잠겨있어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엘레나는 깃펜을 들고 돌바닥에 짓눌러 펜촉을 구부렸다.
그러곤 열쇠 구멍을 찾아 박아 넣고 이리저리 돌렸다.
“좀 돼라, 좀!”
하지만 거친 마찰음만 들릴 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엘레나는 문짝에 얼굴을 들이대고 연신 펜촉을 돌렸다.
철컥-
“됐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뭐든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그렇게 팔을 뻗어 문고리를 열려는 감동적인 순간,
끼익-
갑자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아악!”
그 덕분에 딱딱한 돌바닥에 보기 좋게 넘어졌다.
대자로 뻗은 엘레나는 식식거리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아니, 문이 무슨 자동으로….”
“너, 뭐 해.”
가만, 이 목소리를 듣자 하니 분명 에이든의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금색 갑옷으로 무장한 그가 보였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긴, 뭐야. 비켜.”
엘레나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새하얬던 잠옷에도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가자, 시간이 없어.”
에이든은 다짜고짜 그녀를 짐짝 들 듯 안아 들었다.
예고도 없이 공중에 떠버린 엘레나는 기함하며 비명을 질렀다.
“야! 너 이게 뭐 하는 거야!”
“나중에 말해줄게.”
그는 구불구불한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부서진 탑 입구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너 당장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
에이든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허름한 마차에 그녀를 실었다.
“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너…!”
쾅-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는 부리나케 출발했다.
얼떨떨한 상황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하….”
엘레나는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뜯으며 창밖을 살폈다.
온통 우거진 나무로 이루어진 숲길인 걸 보니 황궁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 * *
수많은 기사들의 선두에 선 데카루스는 따가운 태양 볕 때문인지 아니면 온전히 기분이 언짢은 것인지 날이 선 얼굴로 상황 보고를 들었다.
“현재 상황은.”
“수적으론 밀리지 않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필리움1)까지 투입되어 저희 쪽 병력이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군사국에 추가 병력을 요청해. 전하를 찾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예, 전하.”
그때 머리가 하얗게 센 정예 기사가 거칠게 말을 몰며 다가왔다.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전하, 온 황궁을 뒤져봐도 황태녀 전하께서 보이질 않습니다.”
“크리스탈 궁은.”
“그곳 역시 찾아보았습니다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체 엘레나를 어디로 빼돌린 것일까.
이 넓은 황궁도 아니라면 분명 외부일 테다.
“외부, 외부라….”
“…….”
“이삭, 군 통솔권을 전면 네게 위임한다. 불만은 없겠지.”
“나야 좋지. 난 그 자식을 산 채로 데려올 테니까 넌 전하 먼저 찾아와.”
데카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고삐를 잡아 말머리를 돌렸다.
“공국 외곽에 있는 북부 별장으로 간다. 이제 경들이 할 일은 단 하나. 폐하를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다. 이곳에 나온 이상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말라.”
“예, 전하!”
* * *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달리자 웬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숲속의 성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커다란 건물이었다.
입구 주변엔 역시나 금색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즐비했다.
분위기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차가워 찍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황태녀 전하.”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위병들을 따라 저택 안으로 입장했다.
나름대로 관리가 잘된 탓인지 쾌적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중앙계단까지 깔린 레드카펫을 기점으로 양쪽엔 시종들이 서 있었다.
저 지긋지긋한 제국의 별 소리는 그만 듣고 싶었기에 엘레나는 손을 들어 행동을 멈춰 세웠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인처럼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시녀가 2층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기에 얌전히 그녀를 따라갔다.
끼익-
“이게…. 다 뭐야?”
문을 열자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진 방과 가구가 보였다.
심지어 어른용도 아닌 아기용 침대와 장난감이 즐비했다.
분홍색 딸랑이, 분홍색 곰 인형, 분홍색 캐노피.
극도로 사치스러운 공주님 방 아닌가.
“전하께서 어릴 적 쓰시던 방입니다.”
“내가 쓰던 곳?”
“예, 전하. 겨울이 되면 이곳으로 자주 놀러 오곤 하셨지요.”
“아….”
성인 줄만 알았던 이곳이 별장이라니.
게다가 예전에 자주 방문하던 장소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잠깐 나가줄래? 혼자 구경하고 싶어.”
“예, 전하.”
어릴 적 손길이 닿았던 물건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마법처럼 이 몸의 기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또 그때의 온기를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귀엽네.”
방 한가운데는 조그맣게 그려진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무슨 북한도 아니고 어떻게 얼굴이 나온 그림을 가운데에 걸어놓았을까.
엘레나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방을 구경했다.
오래된 옛 추억이 묻어나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음, 근데 이건 또 뭐야.”
책이 뭉텅이로 꽂힌 커다란 책장 옆엔 삐뚤빼뚤 서툴게 그려진 까만 선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4살, 5살, 6살이라고 나이가 적혀 있었다.
“키?”
아무래도 1년마다 키를 잰 흔적 같다.
글씨가 삐뚤빼뚤한 건 어릴 적 엘레나가 쓴 탓일 테고.
“이렇게 작았네.”
그렇게 까만 선을 매만지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순간, 밖에선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놀란 엘레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헐레벌떡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카루스다.”
이토록 심장이 두근거렸던 적이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방문을 뛰쳐나갔다.
“카루스…!”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걸음마다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마치 그에게 가는 시간에 슬로 모션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끼익-
커다란 대문이 열리자 은빛 갑옷을 입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데카루스는 빠르게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천천히, 엘레나.”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 듯 와락 안겼다.
비록 따스한 품이 아닌 차가운 갑옷이었지만 그의 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당신이야?”
“응, 나야.”
이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가 있을까.
끈적이는 그의 음성에 고막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어. 카루스….”
“나도.”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피가 살짝 튀긴 했지만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행이다. 다친 곳은 없어서.”
“이 정도에 다칠 리가.”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숙여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가자. 시간이 없어.”
“응, 가자.”
“이리 와.”
그는 작은 병아리라도 만지듯 조심스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엘레나 역시 떨어지지 않으려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행복한 엔딩으로 막을 내리려는 순간.
늘 그렇듯 악당이 나타났다.
“그건 안 되겠는데.”
1) 필리움 : 황궁 내 특수용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