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황궁, 루비궁.
두 남녀가 붉은 티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가식인지 진실인지 모를 두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그래서, 엘레나가 지금 황궁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자.”
“예, 그렇습니다.”
황후는 붉은 찻잔을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은 찻물로 향했지만 간사한 눈동자는 그를 향해있었다.
“설마 진심으로 황위를 포기할 건 아니겠지요.”
황후는 불안한 듯 손톱을 매만지며 살짝 웃어 보였다.
이대로 그가 황위를 포기한다면 권력은커녕 지금의 자리조차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태녀에게 거짓을 고한 건 미안하지만 전 황위를 절대 황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역시 황자십니다. 이 황후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우린 같은 배를 탄 사이가 아닙니까. 저 스스로 그 배를 가라앉게 할 리가 없지요.”
그녀는 손등을 들어 살며시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가식적인 미소에 노아는 속으로 비소를 흘렸다.
“황자는 참으로 재치가 있습니다.”
“폐하의 칭찬에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그럼 내일부터 시작되겠군요. 피의 전쟁이.”
노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황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 아무래도 스큘러스 공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이 틀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도 장단에 맞춰 놀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황자.”
* * *
“비켜, 비키라니까? 내 말 안 들려?”
“…….”
“하, 진짜….”
황태녀고 뭐고 다 소용없다.
앞에 놓인 위병마저 제대로 부릴 수 없는데 무슨 황태녀야.
에이든이 사라지고 몇 시간째 홀로 외로운 농성을 벌였지만 그저 객기일 뿐이었다.
대체 에이든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러는 걸까.
쾅-
엘레나는 하릴없이 문을 닫고 들어와 작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투명한 병에 담긴 술병을 보노라니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술뿐인데.
먹고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게 낫겠다.
“내 인생….”
엘레나는 기다란 술잔에 주황빛이 감도는 술을 천천히 따랐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차라리 한국에 있을 때가 덜 힘든 것 같다.
그냥 로봇처럼 일이나 하고 돈 버는 삶이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납치는 물론이거니와 감금까지 당하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게다가 믿었던 친구라는 놈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하질 않나.”
또 그가 데카루스를 죽이려 했던 범인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얼마만큼 속일 생각이었던 걸까.
실망감을 넘어선 알 수 없는 생경한 감정에 속이 뒤틀렸다.
“앞으로 이렇게 꼼짝없이 황궁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에이든이 황위를 포기한다고 약속했지만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 거짓말들, 그리고 여전히 숨겨진 비밀들을 세자면 손에 꼽을 수도 없을 테다.
“그러니까 더더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황후를 만나도 겁먹지 말아야 해, 엘레나.”
엘레나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저번에 마셨던 것보단 덜 독했지만 여전히 쓰디썼다.
“나쁜 새끼….”
아무리 욕지거리를 뱉어봐도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넘어선 해탈이랄까.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뼛속까지 아는 사이라 믿었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멍청하게.”
탁-
엘레나는 책상에 얼굴을 박고 눈을 감았다.
데카루스의 허여멀건 얼굴, 무심한 표정, 사랑한다고 말하는 입술.
손가락 사이로 얽힌 그의 손, 품 안에 안겼을 때의 온기.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어….”
왜 이제까지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보고 싶은데.
이렇게 사무칠 정도로 그리운데.
조금 더 일찍 말해줄걸.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지겹도록 말해주고 올걸.
“데카루스….”
엘레나는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은 듯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한 번에 들이켜서 그런가, 머리가 띵 하고 속이 쓰리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보단 나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엘레나는 달빛이 비치는 투명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환한 별들이 꼭 이리 오라며 유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가 유리창을 만지자 찡한 찬기가 살 속을 파고들었다.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머릿속엔 번개처럼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창문을 깨부수고 나가면 되잖아.
탈출 N회차 프로 탈출러인데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난 거야.
“단단한 거….”
엘레나는 조금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창문을 깨부술 무언가를 찾았다.
“조각상은 너무 크고, 액자는 던지기 힘들어. 그렇다면….”
눈앞에 보이는 건 단단하게 생긴 술병뿐이었다.
이걸 던진다면 저 창문도 깨지지 않을까.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던지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는 거야.
“일단 마시고.”
술맛이 좋았는지 엘레나는 술병에 있는 술을 모두 들이켜고 비장한 눈빛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야구선수 같은 포즈를 취한 뒤 있는 힘껏 술병을 던져버렸다.
쨍그랑-
“와, 홈런이다.”
엘레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 차양을 하고 술병 입구가 날아가는 걸 구경했다.
그러곤 벽난로에 있던 부지깽이를 들고 남은 유리들을 모조리 깨부쉈다.
“하, 역시 난 천재라니까.”
술기운이 잔뜩 오른 엘레나는 의자를 끌고 창문 너머로 몸을 뉘었다.
근데 중요한 건 여기가 2층이라는 것이었다.
“이씨, 이젠 다 날 무시한다 이거지?”
하는 수 없이 먼저 창문 밖으로 이불과 베개, 옷을 모두 던져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자리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엘레나. 할 수 있다.”
엘레나는 자기 암시를 한 뒤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털썩-
바닥에 떨어지자 푹신한 이불과 베개가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멀쩡한 걸 보니 아직까지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이대로 황궁을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빨리, 빨리.”
엘레나는 곧바로 일어나 길도 모르는 황궁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황제 폐하께 가든, 입구를 찾아서 탈출하든 뭐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술기운에 사물이 흐릿하게 보여 도통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 어지러워 죽겠네….”
그렇게 최대한 몸을 숨기며 황궁을 돌아다닐 무렵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는 안 보이는 곳에 몸을 숨기고 그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발소리는커녕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몸을 튼 순간 무언가에 머리가 닿았다.
“뭐지, 여기 벽이 없었는데….”
“벽이 아니라 나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키가 큰 사내 한 명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뭐야, 너. 에이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에이든의 목소리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시야가 뿌옇고 정신이 없는 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리 와.”
“…싫어, 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그녀를 잡아 세웠다.
“놔…!”
엘레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반동으로 온몸이 휘청거리자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 술 마셨어?”
“놔, 이거. 네가 뭔데 날 맘대로….”
“하….”
에이든은 머리가 아픈 듯 잠시 고개를 젓더니 만취한 몸을 잡고 등에 업었다.
자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팔다리가 거슬렸지만 참을 만했다.
원래 몸에서 나던 복숭아향과 술 냄새가 섞여 코가 조금 찡했지만 말이다.
“네가 뭔데 날 막 마음대로….”
엘레나는 세상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취한 듯 노래를 부르질 않나 머리를 쥐어뜯질 않나.
매일 얻어맞는 걸로도 모자라 머리카락까지 뜯길 줄이야.
“내가 참아야지….”
그렇게 강제로 방에 환송된 엘레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침대에 눕혀도 자꾸 일어나고 잠을 자는가 싶다가도 다시 눈을 번쩍 뜨고.
게다가 계속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족발, 피자, 치킨…. 김치찌개, 된장찌개, 부대찌개…. 짜장면, 짬뽕, 탕수육….”
“뭐라는 거야, 대체.”
에이든은 의자에 기대어 웅얼거리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엘레나를 보고 있자니 이토록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앵두같이 조막만 한 입술에선 불쾌한 이름이 들려왔다.
“카루스…?”
“…뭐?”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한데 왜 귓구멍엔 다른 사람 이름이 들리는 것일까.
“카루스…. 카루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허.”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다.
단지 잘못 들은 거라 착각한 저 자신이 한심했다.
“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 대체 뭘 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통제되지 않는 입꼬리 사이로 조소가 흘렀다.
간신히 뛰고 있던 심장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큰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빨리 와. 와서 나 안아줘.”
에이든은 손에 힘을 주어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엘레나는 단숨에 그를 껴안았다.
어깨에 묻힌 얼굴에 달콤한 향기가 묻었다.
“사랑해, 카루스. 사랑해.”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를 이렇게 듣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름을 부르는 네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
“…….”
“그런 표정, 그런 목소리로 다른 사람 이름 부르지 마.”
에이든은 입술을 짓이기며 무너지는 마음을 참아냈다.
당신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거친 파도에 몰아쳐 부서진다.
침몰하는 배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다.
지금이라도 피로 이 온몸을 물들이고 싶은 마음을 너는 알까.
이 작디작은 몸을 미친 듯이 끌어안고 싶은 심정을 너는 알까.
“카루스…. 울어…?”
“아니, 안 울어…. 사랑해, 사랑해. 엘레나.”
“나도. 사랑해, 카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