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그를 밀어내려 한 게 아닌데.
엘레나는 그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뒤를 돌았다.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니…? 데카루스와 내 사이를 갈라놓고 그 옆을 네가 차지하는 거?”
그러자 에이든은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천사처럼 보였던 그의 얼굴이 이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다.
“말이 조금 잘못됐네. 원래 그 자린 내 거였고 난 그걸 되찾은 것뿐이야.”
“미친 새끼….”
“응, 그렇게라도 불러줘. 난 네가 하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까.”
“넌 인간이 아니야….”
입술을 꽉 깨물자 입 안에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데카루스를 지키기 위한 피의 약속이니.
“한 가지만 약속해.”
그는 손을 들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따듯한 미소와 손길이 더 이상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
“이 모든 일을 전부 끝내겠다고.”
“…….”
“약속해. 지금 여기서.”
그러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무릎을 꿇었다.
“그래, 알았어.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야. 무엇이든.”
그는 더러운 손을 들어 새하얀 손등 위에 키스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툭툭 떨어져 그의 팔목에 닿았다.
“왜 울어. 마음 아프게. 난 너 평생 안 울리려고 노력했단 말야.”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껴안았다.
마음속엔 거대한 불꽃이 번지듯 활활 타올랐다.
배반의 슬픔일까, 아니면 이별의 슬픔일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울지 마. 공주님은 우는 거랑 안 어울려.”
* * *
엘레나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떠나라는 모습에 이토록 마음이 미어질 수가.
더는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꾹꾹 참아가며 원하지도 않는 말을 내뱉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론 시간문제겠군.”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누가 더 빨리 시작점에 서느냐가 문제다.
노아 쪽이 먼저 치기 전에 황제파에서 손을 쓸 수밖에.
이 싸움은 누가 먼저 킹을 차지하느냐가 관건이니까.
“엘레나….”
엘레나를 한낱 체스판의 말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게임의 목적은 엘레나였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선 유혈 사태는 막을 수 없겠지.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이야.
“도착했습니다, 대공 전하.”
말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들썩였다.
어두운 밤인데도 밖은 시종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끼익-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시종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데카루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 앞을 스쳐 지나갔다.
몇몇 시종들은 피 칠갑이 된 그의 몸에 기함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비명을 머금었다.
“지금 당장 회의를 소집해. 한시라도 빨리 오라고 전해.”
예고 없는 야근에 그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된 이 늦은 밤에 블랑슈 가까지 찾아가 행정관님을 모셔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에선 주술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긍정의 답이 흘러나왔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데카루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저택 안으로 향했다.
끼익-
회의실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해 두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이삭이 보였다.
“빨리 와, 한창 심심하던 참…. 너 꼴이 왜 이래?”
데카루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로 가 앉았다.
꼭 사람이라도 죽인 것처럼 옷과 얼굴이 온통 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이삭은 잠시 그 꼴을 지켜보더니 얼굴을 왈칵 구기며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황궁.”
“황궁에서 뭘 했냐고. 제대로 좀 말해.”
책상 위에 다리를 걸쳐놓고 의자를 기울이던 이삭은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엘레나가 황궁에 갇혔어. 내일 당장 엘레나를 데리고 올 거야. 그러니 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전하가 황궁에 갇히다니. 설마, 또 황후의 짓이야?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아니.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는데?”
이삭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어 젖히며 그를 노려봤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은 황후밖에 없다.
감히 누가 황태녀를 가둔단 말인가.
“노아.”
“노아? 노아라면, 8황자?”
데카루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웠던 그의 눈빛엔 살기가 가득했다.
“대체 그가 왜….”
“엘레나에게 나를 죽이겠다고 겁을 준 것 같더군.”
“…뭐? 널 죽여? 누가? 8황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이삭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잘 따르던 형에게 칼을 겨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게다가 갑자기 무슨 일로 그를 죽이겠다는 말인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가 널 왜 죽여?”
“노아가 엘레나를 좋아해.”
이삭은 거북이처럼 목을 길게 빼며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귀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탓에 방 안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다시 말해 봐. 8황자가 누굴 좋아해???”
“엘레나.”
“허!”
쩍 벌린 입에선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눈만 껌뻑이던 이삭은 깍지를 끼더니 기도하듯 입에 갖다 댔다.
“아니, 그래. 좋아한다고 쳐. 근데 널 죽여?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야? 소꿉놀이냐고.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장난이 아니야. 노아는 황제의 자리까지 탐내고 있거든.”
데카루스는 책상 위에 놓인 의사봉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이야. 제1계승권자인 네가 있는데 8황자가 어떻게 황위를…. 아니, 설마.”
“그래, 나를 죽이고 황위에 오르겠다는 뜻이야. 그래서 황후와 손을 잡은 것일 테고.”
이삭은 이마를 쓸어넘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입가에선 하릴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네 말은 8황자가 황태녀 전하와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널 죽이겠다. 이 말이야?”
“그래.”
“대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무렴 네가 죽었다고 쳐. 그래도 황태녀가 살아있는데 황제가 되겠다고?”
죽었다고 치라는 말에 데카루스는 약간 언짢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곤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건 그냥 자기 사리사욕 채우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전하는 인질이고 황제파를 몰살시켜서 황위에 오르려는 거 아니냐고.”
“나도 노아 속을 모르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안 되겠네.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어. 내가 그 자식 정신머리를 아주 그냥 똑바로 고쳐주고 올 테니까…!”
이삭이 손가락을 들어 작은 머리를 콕콕 찌르는 시늉을 하자 데카루스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이삭.”
“무슨 소리야. 내가 현재 에스텔에 3명밖에 없는 소드마스터라고!”
이삭은 기세등등하게 너른 가슴을 탁탁 쳤다.
소드마스터는 황제가 인정한 제국의 제일가는 검사이니 당연히 자랑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아는 그 이상이야.”
“무슨 소리야. 감히 소드마스터를 이길 자가 누가 있다고….”
“황궁 내 비밀리에 움직이는 특수용병, 필리움.”
“…….”
“노아가 그중 한 명이야.”
이삭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황자가….”
“포레가의 살인 사건, 탄신 연회 사건. 전부 노아가 한 짓이야. 모두 범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실력이었지. 암암리에 필리움의 소행이라고 확정 지었고.”
이삭은 입을 쩍 벌린 채 단단히 굳어버렸다.
그러곤 회상이라도 하듯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그때 널 죽이려 했던 범인이 그 자식이라고?”
“그래.”
“너 어디서 이상한 걸 듣고 온 건….”
“아니, 전부 진실이야.”
일순간 이삭의 얼굴은 싸하게 굳었다.
손이 패도록 주먹을 쥔 그는 이를 까득 물며 분노했다.
“그 새끼는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감히 누굴 건드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엘레나, 엘레나를 데려와야 해. 노아 품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어.”
“그럼 내일 당장 인원을 꾸려서 황궁으로….”
끼익-
“대공 전하, 행정관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하나같이 피곤에 절어 보이는 행정관들이 회의실 내부로 들어왔다.
“전하, 이 밤엔 무슨 일로 이렇게….”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연신 하품을 하던 그들은 차례대로 자리에 앉았다.
제대로 얼이 나간 표정에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황태녀 전하께서 황궁에 묶여있다.”
“…예? 그게 무슨….”
그들은 놀란 얼굴로 웅성대더니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왜 황태녀 전하께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군사국의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예, 전하. 현재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충원되었습니다. 데제르 공국의 내전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어 말씀하신 기간까지의 인원 확충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데카루스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럼 현재 상황에서 전쟁 개시시 민간인이 입을 피해는.”
“만약 전쟁이 황궁 내부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인구의 최대 10% 정도로 예측됩니다. 또 추후 1, 2년간 경제적인 타격 또한 불가피할 것입니다.”
“경제국.”
“예, 만약 전쟁 피해가 황궁 외부로까지 이어진다면 황궁 중심으로 반경 10메트르(5km), 그러니까 황궁 인근 지역, 그리고 공국 외곽 지역의 상업지구와 곡창지대에 극심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자세히.”
“예를 들면, 통계상 전국 밀 수확량의 40%, 그리고 밀 생산의 10% 정도 감소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합니다.”
데카루스가 책상에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잠시 침묵에 빠지자 행정관들은 뭔가 잘못됐을까 싶어 서로 눈알을 굴리며 슬슬 눈치를 살폈다.
“황후파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 그들 또한 민심이 동요하는 걸 원치 않을 테니. 그렇다면 우선 내일은 일부 병력을 끌고 황궁으로 간다. 군사국에선 중간 전달책를 배치해 소통에 착오가 없도록 준비해.”
“예, 전하.”
“다들 긴장해야 할 거야. 이번 일로 황태녀 전하 구출 작전을 넘어 황위 쟁탈전이 될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