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일순간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버렸다.
말하는 방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목구멍에서 잘게 흐르는 바람 소리만 내는 것이었다.
“…뭐?”
“사랑. 사랑한다고.”
엘레나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
“그래,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우린 그저 친구잖아.”
“…….”
“근데, 잘못 걸렸어. 레나. 난 널 친구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
“무슨….”
에이든은 천천히 다가와 팔로 그녀의 양옆을 짚었다.
완전히 갇힌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뿐이었다.
“널 볼 때마다 이 더러운 욕망이 들끓어 올라. 안 될 걸 알면서도 자꾸 널 갖고 싶어.”
“…….”
“하지만 참고 참았지. 난 널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에이든….”
“그런데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났지 뭐야. 내 공주님을 훔쳐 가려고 하는 나쁜 괴물.”
에이든은 옛 기억을 회상하듯 위로 눈알을 굴렸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풍기는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난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는데 그 괴물은 단 한 번에 널 갖고 말더라고.”
“…….”
“질투가 났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는데 참고 또 참았어. 언젠간 다시 네가 날 봐 줄 거라 생각했지.”
“…….”
“근데 아니더라. 괴물이 공주님을 삼켜버렸어. 이젠 공주님도 그 괴물이 좋대.”
그는 종잇장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우는 듯 웃었다.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 어떤 위로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지금까지 공주님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제 내 곁엔 아무도 없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꺼낸 망상 따위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에이든….”
“왜, 나한텐 기회조차 주기 싫은 거야?”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난 그 새끼한테 죽어도 널 보낼 수가 없어. 그래서….”
“너, 미쳤어….”
엘레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거덕거렸다.
넋을 잃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 나 미쳤어. 이제 알았어?”
“…….”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황제가 되려 하는 것도, 그 새끼를 죽이려는 것도. 다 전부 널 위한 일이야.”
이 모든 게 전부 그녀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데카루스를 전부 죽이고 황제가 되려고 한 것, 모두.
대체 언제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 아님 데카루스를 만났을 때부터?
그 순간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너, 설마…. 데카루스를 칼로 찌른 것도 네가 한 거니….?”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 참혹했던 상황이 이 고운 손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매서웠다.
“역시, 우리 공주님은 눈치도 빨라.”
그는 입꼬리를 주욱 말아 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가히 천사를 닮은 미소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응, 내가 했어. 아, 물론 황후가 시켜서 한 짓이긴 하지만 내 흑심도 조금 섞여 있었지.”
“…….”
“그래서 내가 찔렀어. 물론 그 새끼 빼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 실력이 워낙 좋거든.”
별거 아닌 듯 말하는 그가 진짜 괴물처럼 보였다.
분명 누군가 진짜 에이든을 바꿔치기해 놓은 것일 테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
“넌, 넌 에이든이 아니야….”
엘레나는 곧장 뒤를 돌아 문고리를 잡고 세게 밀었다.
하지만 금세 붙잡혀버린 그녀의 몸은 밧줄로 동여맨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딜 가려고.”
“갈 거야. 비켜.”
기어코 열린 문밖에선 다시 끔찍한 장면이 반복됐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제야 더 이상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쩔 생각이야….”
엘레나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살며시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엔 무력감이 감돌았다.
“너 이런 애가 아니었잖아. 근데 어떻게….”
에이든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가녀린 턱을 들어 올렸다.
“아니, 난 원래부터 이랬어. 더럽고, 추악한, 이게 내 본모습이야, 레나.”
“아니야, 아니야. 그만해….”
처절하게 무너진 그녀의 모습은 꼭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이미 늦었어.”
“에이든, 에이든….”
“응, 나 여기 있어.”
“당장 멈춰…. 이건 미친 짓이야.”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황제가 된다는 것.
황량한 땅을 파 금은보화를 발견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황후와 손을 잡고 시작한 일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일일 터.
이 정신 나간 짓을 멈춰야만 했다.
어떻게서든 그를 멈추고 이 모든 걸 원상태로 돌려놔야 한다.
“황궁에 남을게.”
“…….”
“그러니 이 미친 짓은 당장 그만둬. 이게 전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포기할게.”
“그래, 그래야지.”
에이든은 드디어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전군, 제자리로. 스큘러스 대공에 대한 무력 진압은 해제한다. 또….”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의 대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하얀 셔츠를 온통 피로 물들인 사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걸을 때마다 땅에 끌리는 긴 칼끝 소리가 커다란 궁 안을 소름 끼치게 울렸다.
그가 나타나자 지레 겁을 먹은 병사들은 바닷길이라도 열 듯 빠르게 길을 텄다.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루스?”
그의 얼굴엔 피가 튄 자국이 가득했다.
상처 하나 없이 온 것에 감사해야 할까.
그는 미약한 미소를 띠며 희미한 눈빛으로 위를 노려보았다.
“하다 하다 이런 짓궂은 장난까지 칠 줄은 몰랐어, 노아.”
바닥은 피 묻은 칼의 흔적인지 붉은 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에이든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보조개를 패며 그를 반겼다.
“아, 형. 왔어? 오랜만이네?”
가식적인 그의 미소에 데카루스는 조소를 지으며 방문 앞에 섰다.
“또 이렇게 큰 선물까지 준비할 줄이야.”
“좀 감동이지? 내가 어떻게 하면 형을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을까 밤새도록 고심했거든.”
“날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도라니.”
“울지는 말고. 아마 앞으로 울 날이 많을 것 같아서 말야.”
문에 기댄 그는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흑기사 같았다.
살며시 잡힌 손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가자, 엘레나.”
데카루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이리 와.”
무언가 이상해 다시 한번 부르자 그녀는 천천히 그를 밀어냈다.
“가, 카루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분명 왜 이제 왔냐며 가슴을 마구 두들기며 채근할 줄 알았는데.
힘없이 저를 밀어내는 그녀가 어딘가 좀 달라 보였다.
“가…. 나 여기 있을 거야.”
데카루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노아를 바라보았다.
“애한테 또 무슨 말을 한 거야?”
“무슨 말이라니. 날 나쁘게 몰아가지 마, 형. 서운하게. 온전히 레나의 선택인걸.”
그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히 엘레나를 건드리는 저 간사한 손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다.
“이 이상 오지 마. 내 걸 건드리면 나도 더 이상 참기가 힘들거든.”
노아는 엘레나를 데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데카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쫓아 다가갔다.
“말로 해선 안 되겠네.”
스릉-
노아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진심이 담긴 그의 표정에 입꼬리 사이로 비소가 흘러내렸다.
“오늘이 내 생일인가 보네. 이렇게 깜짝 선물까지 준비할 줄이야.”
“그럼 마음껏 즐겨. 전부 형을 위한 거니까.”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참다못한 데카루스 역시 긴 칼을 들어 그의 목에 겨눴다.
“와, 날 죽이려고?”
노아는 꽤 즐거워 보였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목에 닿은 칼끝을 잡았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에 엘레나는 그 둘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그만.”
그녀가 둘 사이를 가로막자 검은 저절로 제 모습을 감췄다.
“둘 다 그만해.”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의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서로 칼을 겨누며 싸우는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제발….”
“이리 와, 엘레나.”
데카루스는 손을 내밀며 끝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카루스. 이만 가.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차마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 자신도 혼란스러운데 그는 얼마나 속이 상할까.
“엘레나.”
“내가 결정한 사안이야. 그러니까, 가.”
“아니, 난 절대로….”
“가, 제발.”
“당신….”
“가! 가라고!! 당신 얼굴 보기 싫어. 그러니까 가라고!”
엘레나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온 방 안을 넘어 복도까지 여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았다.
그를 살리기 위해선 끝까지 버텨야 했다.
“황명이야. 다신 찾아오지 마. 그럼 그땐 정말 끝이야.”
“…….”
“형, 아무래도 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레나가 이렇게 싫어할 정도면 말 다 한 거야.”
정적인 눈동자가 낙엽이 떨어지듯 굴러 떨어졌다.
데카루스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내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아무도 품어줄 수 없는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