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8화 (88/117)

88화.

익숙한 듯 낯선 향기,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공기.

분명 대공저는 아니야.

여긴 대체….

“으음….”

“일어났어?”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차르르 흘러내리는 백금발에 호박석을 박아놓은 듯 빛나는 금안, 절벽을 깎아 놓은 듯 갸름한 턱선.

그리고 다부진 어깨와 높다란 키.

“에이든…?”

“응, 레나. 잘 잤어?”

분명 반가운 얼굴인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기억을 잃은 듯한 기분.

“여기가 어디….”

언제 한번 와본 듯한 짙은 초록색으로 둘러싸인 벽.

원목으로 만든 흔들의자와 붉은빛이 감도는 벽돌로 쌓인 벽난로.

여기 설마.

“아…!”

그 순간 누가 한 대 친 것처럼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괴로운 듯 신음했다.

“뭔데 이렇게 머리가….”

“억지로 기억할 필요 없어. 너 조금 쉬는 게 좋겠다.”

“아니, 아니야….”

분명 에이든을 만나러 정오쯤 포레가의 오두막에 갔어.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뭐야, 대체….”

그들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바로 정신을 잃었지.

에이든은 그저 그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간신히 숨을 쉬고 있지만 시야가 흐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진정해, 레나. 지금 이렇게 움직이면 위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엘레나는 여전히 머리를 쥔 채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꺼질 듯한 호흡이 미약하게나 불씨를 잡고 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숨 쉬어, 괜찮아.”

에이든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그의 박자에 맞춰 숨을 쉬자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말해….”

“레나.”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똑바로 말해.”

그녀는 분노한 듯 이를 악물고 그를 세게 밀쳐냈다.

덕분에 넘어질 듯 주춤한 에이든은 의자를 쥐고 중심을 잡았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난 널 위해서….”

“…야, 장난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어 연신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알기나 해?”

“…….”

“나 더 화나기 전에 똑바로 대답해.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냐고, 에이든 밀러.”

그는 한참을 말없이 흐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똑딱똑딱.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울릴 뿐이었다.

지켜보다 못한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입술 사이로 말을 밀어냈다.

“말, 하라고.”

그러자 에이든은 허탈하게 웃더니 침대 가에 살며시 앉았다.

머리카락에 닿은 손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납치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한데. 뭐,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뿐이야. 그러니 불안해 할 필요 없어. 이곳에서 널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구는 에이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대체 요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사람이 바뀌어 버린 걸까.

“황후가 시켰어? 널 겁박한 거야? 날 다시 데려오라고?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는 둥글게 눈웃음을 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온전히 내 선택이야.”

“…뭐?”

“난 그저 나쁜 괴물에게 붙잡힌 공주님을 지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더라고. 좀 과격하긴 했지만, 뭐. 이제 네가 안전하잖아?”

허무맹랑한 논리에 본드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억지로 데려와 놓고 하는 말이, 이제 안전하다고?

“너, 정신 차려.”

엘레나는 그의 어깨를 세게 쥐어 잡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는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 같았다.

꼭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갈게.”

엘레나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가지 말라며 잡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무슨….”

문을 열자 금빛 갑옷을 입은 수십 명의, 아니 수백 명의 위병들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상황에 입이 쩍 벌어졌다.

“곧 널 구하러 올 왕자님이 등장할 차례거든.”

언제 왔는지 인기척조차 없이 다가온 에이든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분께 이 정도 선물은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황실의 법도에 따라 손님을 즐겁게 맞이해야 하니까.”

“너, 대체 왜 이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신은 인간에게 참 재밌는 걸 주셨어. 탐욕. 이것만큼 황홀한 게 있을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의 눈빛에선 악마가 보였다.

“그만해.”

“이미 게임은 시작됐어. 움직인 말을 무를 순 없거든.”

“…….”

“분명 형도 기뻐할 거야.”

* * *

대공저, 집무실.

여느 때처럼 고요한 집무실은 깃펜을 두드리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데카루스는 한쪽 눈썹을 가지런히 올리곤 먼 허공을 응시했다.

“엘레나를 쫓던 정예병이 다 죽었다….”

“예, 전하. 30명 모두 전멸하였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손을 들어 잠시 집사의 말을 멈춰 세웠다.

멍했던 눈동자에 다시 매서운 활기가 돌았다.

“재밌는 짓을 하네.”

“…예?”

데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그늘진 얼굴엔 서늘한 한기만이 감돌 뿐이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간다.”

“예, 그럼 어서 채비를….”

“아니, 나 혼자 가도 충분해.”

“전하,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인원이라도 끌고 가시는 게….”

그는 집사의 말에 개의치 않고 묵직한 문을 밀었다.

“됐어.”

“…….”

“하룻강아지의 장난에 놀아줄 만큼 그렇게 여유롭진 못해서 말야.”

* * *

약 기운 때문인지 다시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벌써 어둑어둑해진 하늘과 달리 방 안은 주황빛 등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에이든은 딱 봐도 독해 보이는 술을 기울이며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에이든.”

“어, 깼어?”

살짝 얼굴을 붉힌 에이든은 입꼬리를 올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끝에 무게가 실리자 가벼운 몸이 조금 기울었다.

“너 지금이라도 그만해. 당장 저 병사들 물려. 안 그럼 내가 직접 나설 거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물끄러미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눈빛, 변한 게 없어. 이제야 진짜 황태녀 같네.”

“말 돌리지 말고, 에이든. 내 말 들어. 지금 당장 저 사람들 내보내.”

“…….”

“안 그럼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녀의 눈동자 속엔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굳센 불꽃 말이다.

“그럼 약속해.”

“…….”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황궁을 떠나지 않겠다고.”

“너….”

엘레나는 비소를 흘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직접 병사들을 물릴 셈이었다.

“소용없을걸.”

“…….”

“걔넨 내 말밖에 안 듣거든.”

그 누구도 에스텔의 제3권력자인 황태녀를 거스를 순 없다.

아무리 그것이 황자일지라도.

엘레나는 수많은 병사들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전부 돌아가.”

“…….”

“황태녀의 명이다. 전부, 제자리로, 돌아가.”

“…….”

“어서!!!”

우렁찬 목소리가 궁궐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엘레나는 뒤를 돌아 그에게 향했다.

“당장 물려.”

“그 전에 대답해.”

“명령이야, 에이든.”

“어쩌지. 그 명령은 영 끌리지가 않아서 말야.”

그는 당황은커녕 여유롭게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대체 너 왜 이래. 도대체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거냐고. 이러다가 진짜 큰일이라도 나면…!”

“형이 이런 걸로 죽을 것 같아? 그 형은 안 죽어. 목숨이 너무 질겨서.”

“너….”

에이든은 마치 재미있는 개그 프로라도 보듯 조소를 흘렸다.

죽음을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하루 새에 그녀가 알고 있던 본래의 그는 사라졌다.

“그러니 말해. 여기 남겠다고. 끝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그의 눈빛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시렸다.

마치 새하얀 눈밭의 하이에나가 사냥감을 노리듯.

하지만 그의 말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황후가 있는 이 황궁이 싫었고 이 미친 듯한 상황이 싫었다.

“…아니, 난 이곳이 싫어. 무슨 일이 있어도 대공저로 돌아갈 거야.”

“그렇게 형이 좋아?”

그의 말에 엘레나는 얼음처럼 굳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아님,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나 보네.”

“에이든…!”

“그럼 나 더더욱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주욱 찢어진 입꼬리가 잘 만든 피에로처럼 소름 끼쳤다.

공포영화에라도 나올 듯한 미소에 자리에서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너 대체 무슨 소릴….”

“죽여버리려고.”

“…뭐?”

그의 입에서 이렇게 험한 말이 나온 건 난생처음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다.

“죽이다니, 너 무슨….”

“나도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어. 나 역시 형을 사랑하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허여멀건 얼굴은 불빛에 비쳐 노랗게 물들었다.

“근데, 이젠 도저히 못 참겠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레나.”

“…….”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야.”

광기가 어린 그의 얼굴엔 군데군데 핏줄이 솟아있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는 모습에 몸이 잘게 떨렸다.

“장난도 정도껏 해. 네가 어떻게 그를….”

“왜, 못 할 것 같아?”

“…뭐?”

불안정한 눈동자 위로 겁에 질린 그녀가 비쳤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에게서 물러날 때마다 그는 천천히, 동물을 우리에 가두듯 다가왔다.

“이래서 사랑은 위대한 거야. 뭐든 가능하게 하잖아.”

“무슨, 소리야….”

“널 사랑해, 엘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