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엘레나는 아침부터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고 있다.
꼭 하얗게 굳어버린 눈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이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다.
“좋아해. 좋아해….”
연신 한 단어만 읊어대던 엘레나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베개를 때렸다.
“좋아해? 좋아해???”
불쌍한 베개는 하도 얻어맞아 숨이 푹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격투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먹을 날렸다.
“근데 왜 그 인간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건데!”
어젯밤 그 민망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분명 이 요망한 입술이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지.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
근데 그 인간은 정말 아무 대답도, 아무 반응도 없이 자리를 떴지.
게다가 불러도 대꾸도 안 해, 돌아보지도 않아.
그냥 잠만 잤다 이거야.
그것도 아침에 깨워주지도 않고!
“괘씸해….”
엘레나는 숨이 죽은 베개를 꽉 누르며 이를 갈았다.
“하, 됐다. 됐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두고 봐.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일단 에이든부터 만나러 가는 게 우선이다.
밥이고 뭐고 굶어서 쓰러져 버릴 테다.
“감히 내 고백을 거절해???”
분노에 휩싸인 엘레나는 다시 한번 베개를 부서져라 친 뒤 옷장 앞에 섰다.
“맘 같아선 확 이 집을 나가고 싶지만 내가 참는 거야. 대인배라서 참는 거라고.”
그러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원피스를 골라 거울에 비춰 보았다.
벚꽃처럼 흐드러지는 연분홍 머리카락에 예쁜 얼굴, 그리고 새하얀 피부.
“그런데도 나를 거절해?”
엘레나는 구시렁거리며 잠옷을 벗고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분명 아무거나 입어도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가 있지?
“재수 없는 놈….”
엘레나는 로브를 들고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창문에 비친 하늘은 어찌나 흐리던지 꼭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비 맞고 다니지 뭐.”
대책 따위 없었다.
일단은 에이든을 보는 게 목표고 일이 끝나면 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똥줄 타라지 뭐.
“흥.”
위풍당당히 저택을 빠져나간 엘레나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포레 가로 향했다.
포레 가는 키가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라 그런지 캄캄한 하늘이 더 어둡게 보였다.
혹시라도 숲속 동물이 뛰쳐나올까 조금 겁을 먹긴 했지만 엘레나는 주위를 잘 살피며 오두막으로 향했다.
“어…?”
이미 누가 와 있는 건지 오두막 내부엔 은은한 빛이 돌았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양초를 켤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에이든밖에 없다.
“에이든?”
“레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향긋한 꽃향기가 풍겼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자 에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뭐 해, 들어와.”
“아니, 향이 나길래. 이거 향초야?”
“응,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정말 친구 생각해주는 건 에이든밖에 없다.
일순간 마음이 찡해지는 게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야, 안겨.”
“뭐야, 갑자기.”
그는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거라도 본 사람처럼 몸을 슬슬 내뺐다.
“널 위한 특별 서비스랄까. 어려워하지 마. 자.”
엘레나는 팔을 쭉 뻗어 그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에이든은 그물에 갓 잡힌 생선처럼 품에 안겼다.
“야. 너….”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는지.
예전에는 품에 쏙 들어왔던 아이가 이제 남자가 되어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다.
“남자네, 남자야.”
“뭔 소리 하는 거야.”
“많이 컸다고, 짜식.”
손바닥을 쫙 펴 등을 팡팡 치자 그는 아픈 듯 얼굴을 구겼다.
“야, 그만 때려. 너 때문에 내 몸이 멍투성이라고!”
“멍은 무슨 멍이야. 거짓말도 정도껏 해라.”
에이든은 억울한 듯 울상을 지으며 등을 매만졌다.
그러자 엘레나는 개의치 않은 듯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근데, 왜 부른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보고 싶으니까 불렀지.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는 사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렇게나 마음이 잘 통하는데.
“좋아, 마음에 들었어. 그 답변.”
지금부터 데카루스 생각 따윈 하지 않을 테다.
에이든과 함께니까 즐겁게 놀 생각만 할 거야.
드륵-
친절하게도 그는 의자를 끌어 그녀를 앉혀주었다.
그러곤 어디서 가져온 건지 마카롱과 케이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뭐야, 이것들은.”
“너 좋아하는 거잖아. 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다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참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엘레나는 노란색 마카롱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에이든은 살짝 웃으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 근데 말야. 전쟁 나?”
“뭐?”
“전쟁. 아니, 어제 데카루스 그놈이 하는 얘길 몰래 엿들었는데 전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뭔지 알려달라고 떼를 썼는데 알려주지도 않더라. 진짜 치사하지 않냐?”
“아….”
에이든은 꺼림칙한 얼굴로 말을 줄였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 엘레나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너 뭔가 알고 있지?”
에이든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 오늘도 그 얘길 하러 온 거야.”
그의 말에 엘레나는 먹던 마카롱을 잠시 내려놓았다.
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다급히 그를 채근했다.
“그 전쟁, 대체 뭐야? 뭔데 이렇게 심각한 건데.”
에이든은 한숨을 푹 쉬더니 가느다란 손을 꼭 쥐어 잡았다.
“본론부터 말할게, 엘레나. 난 네가 황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구겼다.
분명 뒷이야기가 있겠지만 일단 그의 말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거 알아. 네가 황후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잘 알고. 하지만 지금으로선 네겐 황궁이 가장 안전해.”
“왜 그러는데. 진짜 전쟁이라도 나는 거야?”
에이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전쟁이라니.
대체,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는 걸까.
“왜? 갑자기? 에스텔은 전쟁 국가가 아니잖아. 외교도 원만하고, 또 전쟁이라면 이미 100년 전에 끝났다며. 대체 왜….”
“그래서 꼭 네가 황궁에 있어야 하는 거야. 넌 이제 일반 시민이 아닌 황태녀야. 나라를 이끌어야 할 황태녀. 그러니 에스텔에선 무엇보다도 네 안위가 가장 중요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황태녀라는 신분도 아직까지 낯선데 거기다가 갑자기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니.
이건 너무나도 가혹한 중책이 아닌가.
엘레나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싫어. 난 못 해.”
“레나.”
“아빠도 살아계시고 황후도 있는데 내가 굳이 왜?”
“…….”
“암만 내 이름이 바뀌었어도 난 아직도 내가 황태녀인 게 부담스러워.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엘레나.”
“나라를 지키고 자시고. 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차라리 네가 하면 되겠네.”
황태녀라는 이름 같은 거 받고 싶어서 받은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황후가 나라를 이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에이든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다.
“좋은 생각 아니야? 너도 황제가 되고 싶다며. 그러니까 차라리 네가 황태자가 되는 거야. 내가 황제 폐하께 잘 말해 볼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
“그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나한테도 황태녀는 쉬운 일이 아니야. 꼭 수갑이 채워진 것 같다고. 그러니까 황태녀의 안위니,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니 같은 말은 이제 그만해.”
에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쥐었다.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데리고 갈 거야.”
“…뭐?”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간다고 말해. 난 너 억지로 데려가기 싫어.”
“무슨 소리야. 억지로 날 데려가?”
에이든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맞잡았다.
놓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동아줄처럼 그렇게 세게.
“앞으로 에스텔의 판도가 바뀔 거야. 황제는 죽고 새 시대가 열릴 거야. 엘레나.”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나 대체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황제 폐하가 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가 아프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 내가 오를 테니까.”
일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득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짙은 보랏빛 탐욕에 먹혀버린 눈빛이었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 설마….”
“응, 내가 전쟁을 일으킬 거야.”
“…에이든.”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목구멍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차마 큰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것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확정된 건 아니야. 황제파 쪽에서 순순히 물러나 준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오늘 그의 상태가 좀 안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약을 먹었거나 술을 마신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모습에 엘레나는 책상에 놓인 로브를 쥐었다.
“너 지금 진짜 이상한 거 알아?”
“…….”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낫겠다. 나 갈게.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앉아.”
“갈게.”
“앉아, 레나.”
엘레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문 앞에 다다랐을 때쯤 일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주위를 둥그렇게 감싸기 시작했다.
당황한 엘레나는 허둥거리며 뒤를 돌았다.
하지만 에이든은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나도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
“에이든…!”
“이제 그 이름은 그만 버려. 노아 폰 제네우스. 이게 진짜 내 이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