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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6화 (86/117)

86화.

“그래, 누나야. 괜찮아?”

레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조그마한 머리를 어렵게 끄덕였다.

“하…. 다행이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누난 진짜 바보구나. 난 끄떡없어.”

레이는 희끄무레한 얼굴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장난칠 정신머리는 있나 보다.

호두 같은 머리를 콩, 하고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아픈 어린애를 때릴 순 없으니 참았다.

“걱정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대공님.”

“…….”

“카루스, 당신은 애가 이러는데 무슨 말이라도 좀….”

“누나, 괜찮아. 그러지 마. 난 대공님께서 날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좋아.”

“하….”

아픈 애가 고맙다고 하는데 한 마디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속에선 그에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픈 레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 나와. 나랑 얘기 좀 해.”

아무래도 할 얘기가 많았다.

전쟁이든 레이든 지금 당장 해결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를 막는 작은 꼬맹이 덕에 속절없었다.

“안 가면 안 돼…?”

아이의 오밀조밀한 눈동자에 차마 싫다고 할 순 없었다.

엘레나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알았어. 누나가 옆에 있을게.”

조막만 한 손을 꼭 쥐고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자 레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잠들었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손가락에 걸린 작은 손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 아빠를 모두 눈앞에서 잃었으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는 스스로가 미웠다.

“그나저나 전쟁 얘기, 뭐야.”

“당신이 알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

일순간 속이 뜨겁게 울렁였다.

서운함과 실망감이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당신은 왜 항상 그런 식이야.”

“…….”

“매번 내게 무언가를 숨기려 해. 매번 당신 혼자 모든 걸 안고 가려 해.”

“엘레나.”

“지금까지 내가 황태녀인 것도 숨겨왔잖아. 온전히 내가 상처받을까 봐. 당신이 아픈 줄은 모르고.”

싸늘한 방 안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려고? 언제까지 혼자서 짊어지기만 할래? 우리 부부….”

“부부?”

순간 엘레나는 토끼 눈을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헛소리를 내뱉는 이 요망한 입술을 때려주고 싶었다.

“아, 아니. 그, 그, 그게 아니라….”

이 상황에 당당하진 못할망정 말은 왜 더듬는지.

데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가냘픈 턱을 쓸어내렸다.

“내가 잘 못 들어서. 다시 한번 듣고 싶은데.”

“내 말은…!”

가느다란 눈으로 얼굴을 훑는 그는 꼭 간사한 여우 같았다.

어느새 턱을 쓸던 손가락은 목을 거쳐 쇄골로 내려왔다.

“당신이야말로 숨기지 마.”

어이가 없어서 조소가 튀어나왔다.

그에게 숨긴 건 단 한 개도 없다.

아니, 숨길 수조차 없게 만들었으니까.

엘레나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내가 뭘 숨겨. 숨긴 건 당신이잖….”

“당신 감정.”

일순간 시공간이 멈춘 듯 숨이 멎었다.

감정을 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도 이렇게나 잘 드러내고 있는데.

매번 감정을 숨기고 무표정인 건 당신 아닌가.

“그게 무슨….”

“날 향하는 당신 마음.”

“…….”

“듣고 싶어. 당신 입으로. 무슨 말이든.”

“그, 그런 거 없어….”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향한 마음이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것 봐. 당신도 숨기면서 나보곤 뭘 숨기지 말래.”

“됐어, 나 갈래.”

쾅-

“하….”

조용한 방 안에 혼자 덜렁 남은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엘레나가 그렇게 나가버린 게 착잡한 모양인지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너, 레이….”

“시끄러워서 영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또 제가 어리긴 해도 분위기 파악 하난 잘하거든요.”

영특하다고 해야 할지 교활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꼬맹이.

대체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걸까.

“누나도 지금쯤 골을 싸매고 있을걸요? 제3자가 봐도 좋아하는 게 한눈에 보이던데. 참나.”

“…….”

“그러니 너무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대공님. 곧 누나도 마음을 표현할 테니.”

* * *

“마음? 마음???”

지금 엘레나는 무척 화가 난 상태다.

“그래서 내가 지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조금 전 그가 한 헛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듯 맴돌았다.

“하, 참나.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놈팡이 같은 인간을…!”

마음이 불안해진 엘레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분주해진 눈동자가 갈 길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그 순간 새빨간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의 입맞춤, 포옹 그리고.

“이런 미친.”

그래, 그건 그냥 원나잇이었다고 치자.

근데 기분 나쁘지 않은 원나잇이었던 거야.

난 그저 상대가 필요했던 거고.

그 인간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이제 싫진 않잖아….”

엘레나는 불안한지 손톱을 뜯으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언제부턴가 그로 인해 점철되었던 공포와 혐오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자꾸 원하게 되지….”

그 순간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내가 왜 그를 원하지?”

편해서? 아님 그가 불쌍해서? 아님 정말.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말이 안 됐다.

대체 왜 갑자기 그를 좋아한다는 거야.

이 망할 심장아, 얘기 좀 해 봐.

그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난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는 여자가….”

끼익-

운명이란 게 이런 것일까.

그는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반쯤 감긴 눈꺼풀, 게다가 피곤함에서 느껴지는 퇴폐미까지.

“그 표정은 뭐야.”

“아,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얼굴은 더럽게 잘생겨서 왜 남을 이렇게 홀리냐고.

게다가 살짝 풀어 헤친 저 셔츠는 뭔데.

이거 완전 작정하고 꼬시려는 거 아니야?

“당신 어디 아파?”

“아니! 아니, 전혀? 내가 왜?”

“얼굴이 붉은데. 열이라도 난 거야?”

위험한 시한폭탄이 천천히 침대 가로 다가온다.

이거야말로 정말 일생일대의 순간이다.

“오지 마. 나 지금 당신이랑 이야기하기 싫어.”

그는 어쩐 일로 순순히 뒤돌아갔다.

아마 아까 레이가 있던 방에서 그렇게 뛰쳐나간 탓이겠지.

엘레나는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 박동을 느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마치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빠르게 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저건 그냥 잘생겨서 그런 거라고.”

아무래도 실험이 필요했다.

그를 진짜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몸을 대봐야 알겠지.

“당신, 잠시 이리 와 봐.”

단추를 풀다 만 데카루스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빨리, 나 급해.”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착하게도 다시 돌아왔다.

강아지였다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을 테다.

“왜.”

“확인해 볼 게 있어. 다만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건 그저 실험의 일종이니까 착각 같은 건 하지 마.”

그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허리 숙이고 가까이 와 봐.”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가까워진 얼굴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순간 감탄사를 내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고 크게 심호흡했다.

“하, 진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막상 맨정신에 이 정신 나간 짓을 하려고 하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대체 뭐야.”

“경고했어, 난.”

엘레나는 두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세게 쥐어 잡았다.

“이건 정말 아무 감정 없이 하는 거야.”

그 순간 엘레나는 그의 입술에 얼굴을 갖다 박았다.

잇몸이 아플 정도로 박았으니 일단 실패하진 않았다.

“대체 무슨….”

“정말 아무 감정 없어.”

이번엔 어설프게 입술을 움직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살짝 눈을 뜨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엘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침대에 눕혔다.

흐트러진 셔츠와 머리가 어찌나 섹시하던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실험이야, 실험.”

불자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법화경을 읊으며 이 요망한 남자를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러곤 입 밖으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그의 얼굴에 다시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가 매번 해주던 대로 이마, 눈, 코, 입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그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도리어 제 얼굴만 빨개진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엘레나는 애써 부정하며 다시 그의 입을 짓눌렀다.

혀로 살살 입술을 핥다가 그 사이를 살며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도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빨며 등을 감싸 안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느새 분위기가 끈적하게 녹아들었다.

입 안에선 거친 호흡이 풍기고 서로의 몸은 꽉 맞닿아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우주에 몸을 누인 듯 아득해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발악하는 심장만이 그의 가슴팍에 전달될 뿐이었다.

“카루스….”

이건 분명 실험이었는데, 분명 아무 감정이 없어야 하는데.

불꽃처럼 펑펑 터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그를 탐할수록 더, 조금 더, 깊이 원하게 된다.

“아니야, 그만.”

엘레나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얼굴은 이미 붉어져 만지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또 쉼 없이 뛰는 심장은 스피커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가슴속을 마구 울렸다.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엘레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머리를 넘겼다.

“당신이랑 있으면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머릿속은 자꾸 당신을 원해.”

“…….”

“당신이 아프면 나도 죽을 것같이 아프고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미친 듯이 불안해.”

그녀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조소가 흘러나왔다.

미묘한 기분이 마음속을 마구 휘젓는다.

바닷속 소용돌이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울렁인다.

“멀리 있으면 당신이 떠올라. 같이 있어도 함께 있고 싶어. 당신과 있는 시간들이 전부 즐거워.”

엘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던 엘레나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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