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황궁, 루비궁.
붉은 베일이 드리워진 궁 안에는 옥좌에 앉은 황후와 노아 그리고 대신들이 서 있다.
장내 분위기는 연막을 뿌린 것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황제파 쪽에서 아주 발칙한 짓을 꾸미고 있더군요. 귀족파를 끌어들일 생각까지 한다니. 꽤나 마음 졸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황후는 기다란 빨간 손톱을 만지며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가운데에 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대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들이 발악해 봤자 현재 황후파의 병력이 더 우세합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 전쟁을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민간인 피해는 물론이고 경제적, 외교적 피해까지 막심할 것입니다. 모쪼록 고위급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그건 자네가 맞아, 제임스. 지금 제국민들의 반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 심리적인 불안도 또한 최고치고. 우선 황태녀를 안전하게 모시는 게 1순위다. 황제의 목은 그다음에 쳐도 늦지 않아.”
노아가 말을 꺼내자 황후는 쥐 죽은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분위기를 파악한 대신들의 관심은 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전하. 황태녀 전하를 스큘러스 대공 쪽에서 빼낼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이를 어찌….”
“아니, 방법은 있어.”
노아는 이를 아드득 물며 허공을 노려봤다.
“내가 직접 하지.”
* * *
“어우, 더워.”
아무리 화창한 날씨라도 그렇지 이제 곧 7월이라 그런가 너무 덥다.
덕분에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꼴이라니.
“밖은 햇빛 때문에 따가우니까….”
그래도 한국처럼 습하지 않은 날씨 덕에 그늘에 가만히 있으면 시원하긴 하다.
“심심한데 뭐 할 거 없나?”
기지개를 쭉 켜며 창문을 바라보던 엘레나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게 뭐야?”
엘레나는 눈을 한껏 찌푸리며 얼굴을 쭉 내밀었다.
웬 포동포동한 비둘기가 창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뭔데, 뭔데 대체. 무슨 비둘기가 저렇게.”
쾅쾅-
돼지 같은 비둘기는 부리로 창문을 쾅쾅 내리치며 문을 열라고 아우성이었다.
다리에 쪽지가 달린 걸 보니 전서구인데 대체 이런 포동포동한 비둘기를 보낼 사람이….
“설마 에이든?”
하긴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전서구를 보낼 사람은 에이든밖에 없었다.
데카루스의 눈에 띄지 않기에 좋았고 통신 수단 중에서 가장 빠르기도 하니까.
의심쩍은 얼굴로 창문을 열자 비둘기는 포로롱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보자.”
발목에 단단히 묶인 쪽지를 떼어내 펴자 꽤 긴 장문의 글이 보였다.
「엘레나,
연락이 없어서 걱정돼.
저번에 그렇게 떠난 이후로 한숨도 못 잤어.
몸은 괜찮은 거야?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
내일 정오에 포레 가에 있는 집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 에이든.」
“짜식, 이 누님이 그렇게 걱정됐구나. 기특해라.”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친구가 최고라니까.
마침 내일 데카루스는 델리트 지역 사찰이 있으니까 걱정 없이 나갈 수 있겠다.
다만 이제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해야겠지.
“그럼 답장을 써줘야지.”
엘레나는 비둘기 발목에 매달 수 있을 만큼 종이를 얇게 잘라 그 속에 작게 글씨를 썼다.
「에이든,
역시 이 누님을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내일 정오에 나갈 테니까 기다려.
그리고 나도 너 진짜 보고 싶어.
- 엘레나」
“이 정도면 되겠지?”
엘레나는 햇빛에 종이를 한번 비춰보곤 기쁜 마음으로 전서구의 발목에 쪽지를 매달았다.
“자, 에이든에게 전해줘.”
창밖으로 힘차게 날아간 비둘기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할 것도 없는데 산책이나 해야겠다.”
엘레나는 옷장 앞에 서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뒤적거렸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니 반팔 원피스를 입어야 할 차례겠지.
“이걸로 할까.”
새하얀 단추가 달린 연하늘색 원피스.
둥근 카라에 작은 레이스가 달려 사랑스러운 느낌이 났다.
색깔이 시원해 보이는 건 물론이고 소재마저 통기성이 훌륭하다.
“좋아!”
엘레나는 새하얀 양산을 들고 저택 안을 빠져나갔다.
한 손엔 챙이 넓은 모자를 들고 한 손엔 양산을 들었으니, 완전 중무장이 따로 없었다.
“어딜 갈까나.”
엘레나는 뜨거운 햇살을 막으며 정원 쪽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나가보는 정원엔 여름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아무래도 시종들이 관리를 잘해 놓은 건지, 시든 꽃도 없이 파릇파릇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무 그네 쪽에 다다르자 웬 소년이 그네를 타고 있는 게 보였다.
“뭐야, 누구야. 내 자리 빼앗은 놈이.”
괘씸함에 살며시 다가가 혼쭐을 내주려던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소년은 뒤를 돌았다.
“어? 누나?”
“…레이?”
소년은 다름 아닌 레이였다.
하긴 검은 뒤통수를 가진 아이는 이 저택에서 레이밖에 없지.
작은 발을 구르며 뛰어오는 그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누나!”
“어, 안녕. 근데 너 좀 달라졌다?”
“키 컸잖아!”
“키?”
엘레나는 샐쭉하게 눈을 뜨고 작은 머리통 위에 줄자처럼 손을 똑바로 그었다.
“너 곧 있으면 나보다 커지겠다?”
“당연한 거 아니야? 누나는 조그맣잖아.”
“…뭐???”
엘레나는 눈과 입을 크게 벌리며 기함했다.
살다 살다 이런 꼬맹이한테서까지 조그맣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그리고 이 정도 키라면 조그만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163cm 정도면 작은 건 아닌데.
이 괘씸한 꼬맹이가!
“야, 내가 어디가 얼마나 조그만데? 지금 너보단 한참 크거든?”
그러자 레이는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 뭐…. 그래.”
“너 반응이 왜 그 모양이야.”
“아니, 아니야. 됐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말하려다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도 어린 게 감히 어른을 흘겨봐?
순간 엘레나의 꼰대 정신이 발동했다.
아무렴 동방예의지국에선 이런 건 용납되지 않는다.
“야, 꼬맹이. 어른 앞에서 예의를 지켜야지.”
“누나가 어른이야?”
“뭐?”
레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예쁘게 깜빡였다.
어린아이의 눈빛이 천사 같다는 건 사실인가 보다.
이 꼬맹이의 맑은 눈빛에 나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난 열여섯 살쯤 되는 줄 알았는데. 누나 되게 젊어 보인다.”
아부성 멘트인지 사실인지 모를 발언에 일순 당황스러웠다.
이 꼬맹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님 진심인가?
“어른으로 안 보여.”
요새 초등학생들은 영악하다던데.
이 꼬마도 열한 살쯤 되었으니 그러려나.
그렇게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꼬마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그가 3연타를 날려버렸다.
“누나, 예쁘다.”
그래, 어린아이의 영혼은 아주 맑고 투명하댔어.
그러니 절대 거짓일 리가 없지.
“큼큼, 그래? 짜식, 너도 뭘 좀 아는구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레이는 이내 뒤를 돌아서 작게 읊조렸다.
“바보.”
“뭐?”
“아니, 누나 예쁘다고. 그나저나 나 심심해. 놀아줘.”
레이는 작은 손을 들어 어딘가로 그녀를 이끌었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질질 끌려간 엘레나는 지루한 듯 입을 뗐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기다려 봐.”
그렇게 한참을 걷던 순간 레이는 풀숲에 숨어 무언가를 훔쳐봤다.
“뭔데, 그래…. 카루스?”
“누나, 빨리 앉아.”
아니, 설마 데카루스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거였어?
한마디 하려 옆을 홱 돌아보자 꼬맹이는 선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데카루스는 따르는 건지.
이렇게 연예인 보듯 스토킹이나 하고.
그래, 어른이 참아야지.
“전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황태녀 전하의 안위가 우선이야.”
“예, 전하.”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말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니?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레이는 뭐라도 알고 있을까 싶어 옆을 돌아본 순간.
그가 귀를 막고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레이? 레이!!”
“누나, 나 너무 무서워….”
순간 놀란 엘레나는 작은 몸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애가 경기를 일으키며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새하얘졌다.
“카루스… 카루스!”
“엘레나?”
그녀의 작은 외침을 듣고 따라온 데카루스는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레이, 레이가….”
“이리 줘.”
일순간 심각성을 깨달은 데카루스는 레이를 안고 재빨리 저택으로 향했다.
* * *
“전쟁 후유증입니다. 보통은 폭탄 소리 같은 굉음을 들었을 때 나타나곤 하는데 단어로 발작이 일어날 정도면 심각한 수준입니다. 적당히 안정을 취하시면 금방 회복할 테니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에스텔에 무한한 영광을.”
의원이 예를 차리고 방문을 나가자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졌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데카루스는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꼭 붙들어 안았다.
“괜찮아?”
“카루스….”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던 순간 아까 그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근데,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말에 천천히 등을 토닥이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그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분명 분위기는 심각해 보였다.
게다가 황태녀의 안위가 우선이라니.
그럼 더더욱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거짓말. 내 얘기도 나왔잖아.”
“엘레나.”
“심각한 거야? 대공저까지 위험한 일인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어떻게 내가 신경을 안 써. 당신은 왜 항상…!”
“엄마…. 엄마….”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지려던 순간, 가느다란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는 곧장 침대 가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
“엄마….”
“괜찮아? 레이?”
레이는 연신 엄마를 불러댔다.
이 작은 꼬마가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을까.
레이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었다.
붉은 눈동자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엘레나가 비쳤다.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