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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4화 (84/117)

84화.

쾅-

“카루스!!”

방문을 열자마자 거울 앞에서 셔츠를 갈아입는 그가 보였다.

그의 표정은 퍽 좋지 않았다.

하긴 갑자기 문을 대차게 열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뭐야?”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당신한테 결혼하자고 했냐고! 일곱 살 전에!”

데카루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머릿속 퓨즈가 탁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이 망할 입 때문에 생긴 거라니.

“내 팔자야. 내가 미쳤지.”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고.

지금 이 말이 아주 딱 들어맞는다.

“왜, 누가 그래? 제인이?”

“…그래.”

엘레나는 좀비처럼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한창 난리가 났었지. 당신이 나와 결혼한다고 온 궁궐에 떠들썩하게 소리치고 다녔으니까.”

대체 이 몸의 원래 주인아, 왜 그랬니.

왜 그런 짓을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후회돼?”

“몰라,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말 걸지 마.”

엘레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만약 과거의 엘레나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데카루스를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가족을 찾지도 못했겠지.

만약 과거로 돌아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골랐을까.

“하….”

엘레나는 이불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를 마주 보았다.

여전히 잘생긴 외모는 지나가는 여인네 한 명은 거뜬히 꼬실 만큼 빛이 났다.

“대체 뭐 때문에….”

저도 모르게 들린 손은 그의 얼굴을 향했다.

각진 턱을 쓸어내리자 그는 움찔하며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유혹하는 거야?”

“아니, 대체 당신의 뭘 보고 반했나 생각 중.”

“뭘 그리 멀리서 찾아.”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턱에 닿은 손을 잡고 살며시 키스했다.

“그냥 봐도 알 것 같은데.”

“뭔 소리야.”

그는 마주 잡은 손으로 턱선을 쓸어내렸다.

은근한 눈빛이 레이저처럼 얼굴을 쏘아댔다.

“잘생겼잖아.”

“허….”

이 정도의 당당함이라면 세상 어딜 가든 기죽지 않을 테다.

아니, 자기 입으로, 그것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생겼다고 하는 사람이 세상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주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야?”

엘레나는 뭐 씹은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잘생긴 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됐어. 저리 가.”

“당신 입으로 듣기 전까진 못 가.”

“무슨…!”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엘레나는 그에 맞춰 고개를 천천히 뒤로 내뺐다.

하지만 이내 그의 팔이 목덜미를 가로막았다.

“왜 이래. 놔.”

“알려줘.”

다크 초콜릿처럼 진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진실을 요구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검은 속눈썹, 코끝에 닿은 날카로운 콧날,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꽃잎으로 물들인 듯한 붉은 입술.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용안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엘레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뭐, 잘생겼네….”

데카루스는 이제야 마음에 드는 답을 들었는지 입가에 쪽, 하고 키스했다.

이 한마디 했다고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비켜….”

그를 마주 볼 엄두가 안 났다.

또 볼이 빨개진 걸로 놀릴 게 뻔했기에.

조심스레 두 팔로 그를 밀어내자 다시 한번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맞닿았다.

“귀여워서 못 놔주겠어.”

그는 이마, 코, 입술에 번갈아 가며 입을 맞추었다.

그 덕에 온몸이 짜릿짜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 그만해.”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등에 연신 키스를 했다.

“그만하라니까.”

“당신 입술 조금 더 먹고 싶어.”

먹고 싶다니, 먹긴 뭘 먹어.

어떻게 이런 민망한 말을 잘도 꺼내는지.

아무래도 이 고집불통과의 온전한 대화는 포기해야 할 듯싶다.

“명령이야. 진짜 그만해.”

처음으로 그에게 명령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말을 하고도 이건 미친 짓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황태녀라는 신분을 이렇게 이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놈이 말을 안 들으니까!

손가락을 살짝 벌리자 그 사이로 샐쭉한 표정을 지은 그가 보였다.

“전하께서 그러시다면야.”

진짜 명령이란 게 통하는 건가?

이 좋은 걸 이때까지 모르고 살았던 거야?

“분부대로.”

엘레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진짜로 이러는 건지, 가짜로 이러는 건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나 목말라.”

그러자 그는 군말 없이 티테이블에 놓인 물을 따라 가져다주었다.

의심쩍은 표정을 짓자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컵을 건넸다.

“무엇이 불편하십니까, 전하.”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는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왜 일곱 살 이전의 엘레나가 그를 부려먹었는지 알 것 같다.

지니처럼 해달라고 하기만 하면 다 해주니까!

“그럼, 여기 이리 와서 누워.”

마치 로봇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침대 주위를 빙 돌아 바로 옆에 몸을 뉘었다.

“잘했어.”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아주 지금까지 쌓인 체증이 확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위에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일 줄이야.

그렇게 엘레나는 다짐했다.

복수할 것이라고.

“즐거우십니까.”

“응, 엄청.”

권력은 아주 달콤한 것이야.

왜 사람들이 이렇게 탐내는 건지 알겠어.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아득바득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 것이구나.

엘레나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어댔다.

지금 누가 돌로 자신을 때린다고 해도 즐거울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많이 즐겨두시길 바랍니다, 전하.”

데카루스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미소 지었다.

천사 같은 얼굴엔 음흉한 속내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소리야.”

일순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엘레나, 정신 차려.

지금 이렇게 기가 죽으면 안 된다고!

황태녀로서의 체통을 지켜야지.

“흠흠, 무슨 소리지? 말해.”

“밤엔 그리 여유로이 즐기실 수 없을 테니까요.”

그는 아주 무해한 얼굴로 눈꼬리를 접었다.

마치 시커먼 능구렁이가 또리를 튼 것만 같았다.

“즈, 즐기긴 뭘 즐겨.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밤이 되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너, 너!”

저 요망한 입을 당장이라도 막아버려야 했다.

엘레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입을 확 막았다.

그러자 물컹물컹한 살이 손바닥을 핥는 게 아닌가.

“꺄악!”

순간 온몸에 솜털이 모두 곤두섰다.

아니, 개도 아니고 손을 핥아?

이 남자 진짜 미쳤나!

“당신 미쳤어! 왜 멀쩡한 손을 핥아!”

“전 그저 전하께서 좋아하실까 그런 건데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미소를 쏘아대니 눈이 부셔 쳐다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됐어. 당신이랑 말 안 해.”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토마토보다 더 새빨갰다.

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전하.”

“왜, 왜!”

“이리 오시지요.”

“싫어.”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긴 뭘 후회한다는 거야.

엘레나는 화끈거리는 볼을 부여잡고 뒤를 홱 돌았다.

팔을 괴고 끈적거리게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뚫어질 것만 같았다.

“간다, 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그의 옆으로 돌아갔다.

분명 지체 높은 황태녀인데 그와 상하관계가 바뀐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왜 불러.”

그는 말없이 시트를 툭툭 쳤다.

방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 잔말 말고 누우라는 뜻이다.

“싫어.”

“두 번 말하진 않습니다.”

“아오!”

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그는 곧바로 허리를 끌어당겼다.

마치 자석처럼 끌린 몸은 단단한 근육에 딱 붙었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난 황태녀야. 그저 내가 착하니까 당신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태녀 전하.”

그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귓가에 닿은 손길은 작은 동물이라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눈을 빼죽 뜨고 쳐다보자 이마엔 다시 입술 도장이 찍혔다.

“얼굴 닳겠어.”

“그 정도론 안 닳아.”

그는 다시 얼굴을 붙잡고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입을 뾰로통 내밀자 그는 한 번 더 입술을 맞부딪쳤다.

“그만해.”

부끄러워진 엘레나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대고 딱 붙였다.

이렇게 하면 이제 더 이상 입은 못 맞추겠지.

가까이 닿은 몸통에선 은은한 블랙베리 향이 풍겨왔다.

코를 간질이는 향기에 그에게 점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던 엘레나는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카루스.”

“무슨 소리야.”

“원래도 난 내가 누군지 몰랐는데 이젠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그는 말없이 기다랗게 늘어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난 누굴까. 분명 난 엘레나 헬리오스인데. 이제 사람들은 날 엘레나 폰 에스티나 그리고 황태녀라고 불러. 나만 빼고 세상이 전부 바뀐 것 같아. 제인도 더 이상 날 아가씨라 불러주지 않고.”

“그래서, 섭섭해?”

“응.”

그는 입술로 정수리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말했잖아. 세상 모든 게 다 바뀌어도 엘레나는 엘레나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따끈한 입술이 한 번 더 머리에 닿았다.

“당신은 당신이란 존재 자체로 너무나도 특별한 사람이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

“단 하나뿐인 사람….”

“그래, 당신이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당신이 엘레나인 건 바뀌지 않으니까.”

“응….”

“그래, 그거면 됐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숨소리에 맞추어 토닥이는 손바닥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당신은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는 거야?”

“배우다니.”

“당신과 있으면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아. 꼭 심리상담이라도 받는 것처럼.”

엘레나는 판판한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서 당신이 더 끌려. 자꾸 당신을 원하게 돼. 꼭 달콤한 초콜릿처럼. 먹으면 또 먹고 싶고. 중독되는 것 같아.”

“초콜릿을 몸에 바를까, 엘레나.”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분명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웬 생뚱맞은 소리야.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해괴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그게.”

“당신이 먹으면 또 먹고 싶다길래. 몸에 바르면 더 맛있을까 해서.”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인간,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체 그런 망측한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당신 머리엔 그런 생각밖에 없지?”

“그런 생각이라니, 엘레나. 당신을 위한 건데 그렇게 매도하면….”

“됐어, 이 변태 색마야.”

“그 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변태 색마를 변태 색마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음흉해선.”

아무래도 이러다간 또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오지 마. 당신은 핵폭탄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야.”

데카루스는 피식 코웃음 치더니 아주 천천히, 사냥감을 가두듯 그녀를 몰아세웠다.

“오지 말라니까.”

“나도 당신에게 끌려.”

“…….”

“벌이 꽃을 찾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내 몸이 당신을 찾아.”

여린 몸 위에 올라탄 그는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아등바등하던 손은 이미 그에게 포박되어 제 기능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목과 쇄골 주위를 번갈아가며 움직였다.

덕분에 간신히 지워진 붉은 꽃이 다시 피어났다.

“그럼 지금부터 여유로이 즐겨보시죠,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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