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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3화 (83/117)

83화.

시야에서 황후가 사라지자마자 엘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발작하듯 떨렸고 알 수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트라우마처럼 새겨진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엘레나.”

데카루스는 가녀린 몸을 번쩍 들어 곧장 마차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태가 매우 위태로워 보였기에.

“카루스. 나 너무 무서워….”

“괜찮아. 아무 일 없었잖아. 응?”

엘레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떨었다.

미친 듯이 두렵고 무서웠다.

황후가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귀에서 윙윙 울렸다.

손으로 다급히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괜찮아, 엘레나. 숨 쉬어.”

그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연신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는 박자에 맞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황후가 또 나를 죽이려 들면 어떡해. 쥐도 새도 모르게 날 잡아가면 어떡해, 카루스.”

“그럴 리 없어. 내가 옆에 있잖아.”

엘레나는 번데기처럼 그의 품에 안겨 몸을 웅크렸다.

보다 못한 데카루스는 큰 담요를 펼쳐 떨고 있는 몸을 살며시 감싸주었다.

“당신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절대로.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을 거니까.”

“응….”

그는 작은 몸을 쓸어내리며 안심시켜주었다.

잠들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황후의 얼굴이 생각나 쉬이 잠들 수 없었다.

결국 창밖을 보며 마음을 다독이던 엘레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황제 폐하는 좋은 분이신 것 같아….”

“응, 좋은 분이셔. 무엇보다 당신을 아주 사랑하시고.”

“응….”

아직은 가족애에 관한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데카루스가 보이던 눈빛과 똑같은, 아니 어쩌면 더 강렬한 마음이랄까.

“근데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셨어. 계속 기침하시고….”

“엘레나, 당신을 잃고 한순간에 그렇게 건강이 나빠지셨어. 머리가 하얗게 센 것도 그 이유고.”

“아….”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그렇게 정정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저 때문인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미어졌다.

“당신 탓 아니야.”

“…응?”

그는 점쟁이처럼 사람 마음을 꿰뚫어 봤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 잘못 아니라고. 노쇠하신 탓도 있고 또 그건 전부 황후가 벌인 짓이니까.”

“…….”

“그러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황제께선 앞으로 당신을 위해 사실 테니까.”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건 무엇일까.

평생 스스로를 위해 살았던 기억밖에 없는데.

누군가를 위해 본인을 희생해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건 말로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이겠지.

“그러니 겁먹지 마. 나도, 황제 폐하께서도 평생 당신 곁에 있을 테니.”

“응….”

그렇게 굽이굽이 펼쳐진 길을 달리던 마차는 이내 대공저에 다다랐다.

그 앞엔 역시나 마차를 맞이하는 시종들과 위병들이 있었다.

창밖으로 언뜻 보인 제인의 얼굴에 괜스레 안정감이 들었다.

끼익-

마차가 멈추자 데카루스는 안긴 몸을 꽉 붙들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합창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황태녀 전하!”

생경한 광경에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데카루스는 그런 그녀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 역시 무릎을 꿇고 황제나 황후한테 할 법한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고귀하신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왜, 왜, 왜 이래? 대체 이게 다 뭐야.”

순간 민망함이 들끓어 온몸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극진한 환대를 원하던 것이 아닌데.

게다가 황태녀 전하라니.

심지어 주변을 살펴보자 주위에 있던 귀족들까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무슨….”

이 상황에서 대체 무얼 해야 하는 걸까.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래, 내가 그 고귀하신 황태녀 전하다.’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일순간 머리가 미친 듯이 팽팽 돌아갔다.

대체 왜 이 민망함은 제 몫인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애꿎은 손만 파닥거리자 데카루스는 손을 잡고 정중히 키스했다.

“황태녀 전하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카루스, 대체 왜 이래….”

당황한 엘레나는 복화술을 하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목소리만 내었다.

그의 손을 살짝 당기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저만 들리게 속삭였다.

“모두 당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명령이라니.

명령은 무슨 명령.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이 부끄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야 했다.

엘레나는 눈을 꼭 감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모, 모두 일어나세요.”

그러자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지만 전부 제자리에 우뚝 서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가보셔도 좋아요….”

알아서 눈치껏 입을 벙긋거리자 사람들은 한 번 더 합창을 한 뒤 모두 자리를 떴다.

“영원의 제국 에스텔에 무한한 영광을!”

“아, 네…. 감사해요….”

여기서 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왜 했는지.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다.

“황태녀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울먹거리는 제인이 보였다.

“제인….”

“전하, 전하….”

제인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무릎을 꿇고 동네가 떠나가라 울었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엘레나는 그녀 옆에 쭈그려 앉아 아이를 달래듯 등을 두드렸다.

“제인, 대체 왜 이래. 응?”

“전하….”

제인은 목이 메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저 전하라고만 외칠 뿐이었다.

답답했지만 서럽게 우는 사람에게 꼬치꼬치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결국 그녀는 제인을 꼭 안아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제인, 괜찮아. 울지 마. 응?”

“전 전하가 돌아오시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제 오랜 염원이 이렇게 풀어지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 자꾸 아까부터 다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거야.

대체 이 황태녀라는 게 뭐라고 이렇게들 야단이 난 거냐고!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러니 이만 일어나. 응?”

“네, 네….”

“올라가자.”

어찌 된 상황인 건지, 일단은 제인을 먼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엘레나는 훌쩍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시녀 방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내내 줄곧 시종들이 ‘황태녀 전하’라며 무릎을 꿇는 통에 성가시긴 했지만 말이다.

끼익-

“제인, 제인. 괜찮아? 응?”

제인이 우는 건 많이 봤어도 이토록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봤다.

아니, 얼마나 꾹꾹 참아왔으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전하. 전하….”

“그래, 그래. 나야. 제인. 그러니까 뚝 해. 응?”

엘레나는 제인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계속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눈물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제인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탁상에서 목걸이와 작은 액자를 꺼내 들었다.

“이건….”

저번에 제인의 방에서 몰래 보다가 걸린 하트 목걸이였다.

“사실 이건 전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랍니다. 제가 혼자 울고 있을 때 전하께서 제 목에 걸어주셨었죠. 그 작고 예쁜 꼬마가 어떻게 이렇게 많이 크셨는지….”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곱 살 이전에 착한 짓을 많이 했나 보다.

데카루스가 말괄량이에 폭군이라고 했지만 마음씨가 좋았던 게 분명하다.

“그럼, 저번에 말한 황녀가 날 말한 거였어?”

“네, 네. 맞아요. 전하세요.”

마음이 찡했다.

홍길동도 아니고 황녀를 황녀라 부르지 못하는 사실이 얼마나 슬펐을까.

“하지만 난 아무런 기억이 없어, 제인. 너와 있던 추억을 듣고 싶어.”

제인은 이내 눈물을 닦으며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손에 쥔 액자를 들며 말을 이었다.

“보이세요? 조그맣던 아가씨와 저랍니다.”

액자를 보니 정말로 어린 제인의 품에 엄청 작은 꼬마가 안겨있었다.

“이게… 나야?”

“네, 전하세요.”

“완전 애기네.”

“그쵸, 이때 어찌나 칭얼대시던지. 궁중 화가님께 저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 달라고 난리 난리를 피웠지 뭐예요. 그래서 이 그림이 이렇게 나온 거랍니다. 참 예쁘죠?”

아무래도 폭군이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저 작은 꼬마가 궁중 화가를 보고 그림을 그리라고 난리를 피웠다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하하…. 뭐 또 다른 이야기 없어? 아주 얌전하다든가 아니면 너무 착했다든가 하는 그런….”

“우리 전하께서는 매번 황자님들을 때리고 다니셔서 황궁이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그 덕에 황자님들께서 기를 못 펴고 사셨죠.”

“아….”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미담을 듣고 싶었는데 들리는 건 전부 누굴 때렸거나 으스댔던 내용밖에 없다.

“아니, 다른 건 있을 거 아니야. 뭔가 조신했다든가 우아했다든가.”

“글쎄요. 기억이 잘….”

제인은 정말 기억 따위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턱을 쥐었다.

“하,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럼 다른 얘기 해줘.”

“음…. 아. 전하께서는 저를 정말 아끼셨어요. 어딜 갈 때마다 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으셨죠. 그때가 얼마나 귀여운지! 아직도 잊을 수 없다니까요. 그리고 먹을 걸 항상 나눠주셨어요.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나타나신 이후론….”

갑자기 제인의 얼굴은 이 세상 모든 우환을 떠안은 사람처럼 어두워졌다.

“뭐, 뭔데… 왜 그래!”

“대공님께서 전하를 빼앗아 가버리셨어요…. 하루 종일 붙어계셨죠. 게다가 얼마나 대공님을 부려 먹던지. 다들 놀랐을 정도라니까요.”

그녀는 옛 생각이 난 듯 눈알을 굴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까 황후도 그가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무슨 소리야? 더 자세히 말해줘.”

“아, 거의 쫄병이라고 해도 다름없을 정도였죠. 양산을 들고 매번 졸졸 따라다니던 모습이 생각나요. 또 그 더운 여름날에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하면 후다닥 달려가서 가져오고. 지금이랑은 완전 다른 사람이셨죠.”

“그가 그랬다고….?”

이건 에이든보다 더한데.

아니, 에이든도 부려 먹진 않았었다.

대체 어떻게 그를 부려 먹을 생각을 했었던 걸까.

지금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네, 그리고 전하께서 사라지시기 전까지 매일 찾아오곤 하셨어요. 타의인지 자의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열렬히 사랑하신 게 분명해요!”

그 작디작은 꼬마들끼리 열렬한 사랑이라니.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근데 카루스는 왜 그렇게 나를 쫓아다닌 거지? 뭐가 좋다고….”

“제가 듣기론 전하께서 먼저 결혼하자고 고백했다고 하시던데요? 그래서 그 이후로 더 열렬하게….”

“뭐???”

일순간 저택이 흔들릴 만큼 우렁찬 비명을 내질렀다.

덕분에 창가에서 얌전히 모이를 먹던 새들도 전부 달아났다.

제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다고??? 아니, 왜? 미친 거 아니야?”

“그거야 전하께서도 대공님을 많이 좋아하셨으니….”

“하….”

순간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 침대에 철푸덕, 하고 누워버렸다.

그를 좋아했다고?

게다가 결혼까지 하자고 했다고?

“미친….”

아니, 근데 설마.

그래서 이 인간이 이렇게 결혼에 집착한 건가?

“그래, 먼저 결혼하자고 꼬신 쪽이 나니까….”

“전하…?”

“미친, 미쳤어. 난 미쳤어. 돌았어. 내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고? 그 자식한테?”

엘레나는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왜 벌어졌는지 알겠다.

정신 연령이 어리고 말도 안 통하는 고집스러운 인간한테 먼저 플러팅을 날렸으니!

그러니까 그 인간이 그렇게 결혼에 목을 맨 거였어.

“안 되겠어, 제인. 나 지금 그놈한테 가 봐야겠어.”

“아, 네. 네. 가 보세요.”

“나중에 다시 올게.”

엘레나는 계단을 마구 뛰어올라 방으로 향했다.

하도 빠르게 뛴 탓에 숨이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데카루스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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