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제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예절 선생님과 제인이 가르쳐준 궁중 예법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고개를, 고개를 들어….”
엘레나는 바닥을 향해 푹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새하얀 피부에 제 눈과 똑같은 눈동자였다.
어쩐지 초상화에서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 찬 눈을 껌뻑이며 입술을 마구 달싹였다.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가 맞느냐….”
엘레나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예절 선생님한테 배운 기억이 없다.
단지 처음 보는 남자가 저를 보고 울먹거리니 조금 이상했다.
아빠를 만나면 분명 기쁘거나 슬플 줄 알았는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황제에 대한 경외심만 느껴졌을 뿐.
“엘레나….”
순간 몸이 그에게로 자석처럼 이끌렸다.
조금은 마른 몸에선 왠지 모를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네가 어떻게, 어떻게… 죽은 줄만 알았는데….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 온 거야.”
“…….”
“기억나니, 엘레나. 내가 네 아빠란다.”
조금 겁먹은 눈빛으로 고개를 젓자 황제는 얼굴을 푹 숙이곤 어깨를 떨었다.
눈물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엘레나는 어쩔 줄을 몰라 데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괜찮다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저는 기억이 잘….”
그러자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맞닿은 따듯한 손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단다, 엘레나. 이 아비가 널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말에 마음이 울렁였다.
기억하지 못해도 그는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온기가 가득한 따듯한 품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니. 마침 네게 줄 선물도 있단다.”
황제는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일어서기엔 버거웠는지 시종들이 그를 부축했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모습이 영 안쓰러워 보였다.
“일어나, 엘레나.”
데카루스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쥐가 난 탓에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그가 잡아주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가자.”
황제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자 또 하나의 거대한 방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마름모꼴 무늬가 새겨진 벽지는 진짜 금을 발라놓은 듯 반짝였고 창문 사이사이엔 새 모양의 조각상이 자리해 있었다.
그는 시종들의 부축으로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황제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 저요?”
“그래, 엘레나.”
약간 뻘쭘한 감이 조금 있었지만 이내 자세를 반듯이 잡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커다란 침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됐다는 듯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황제 앞에서 일어서 있으려니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네게 오랫동안 해주고 싶었던 것이 있어.”
황제는 미소를 띠며 살짝 웃어 보였다.
한참 마른기침을 하던 그는 손을 들어 시종을 불러들였다.
“가져오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복을 입은 노인이 붉은 방석 위에 놓인 보물상자 같은 걸 들고 왔다.
대체 무엇인가 싶어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황제는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네가 성인이 되면 꼭 주고 싶었단다, 엘레나.”
황제의 손짓에 신관은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제 위용을 뽐내며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떼지 못하자 황제는 미소를 띠며 티아라를 들었다.
“황태녀 엘레나 폰 에스티나.”
황태녀.
황제의 딸, 그리고 제위 계승의 제1순위에 있는 황녀.
익숙지 않은 호칭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황족의 성이라니.
엘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 그란디오스 폰 에스티나가 에스텔의 이름으로 그대를 영원히 축복할지어니 고개를 들어 기쁘게 받들라.”
머리에 작은 왕관이 씌워지자 황제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탄식했다.
“돌아온 걸 축하한단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왔는지 모를 테지. 엘레나, 이 아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작은 손을 맞잡았다.
야윈 손등 위론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끈끈한 가족애나 동질감 따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가슴을 저미듯 아팠다.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폐하….”
그러자 황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비가 죽는 것이 싫으냐.”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찾은 가족을 잃고 싶진 않았다.
더 오래, 더 많이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 그럼 당연히 우리 따님께서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그렇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아왔고 힘든 일은 없었는지, 데카루스는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또 일곱 살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황제가 그녀를 얼마나 아꼈는지 따위의 추억들도 나누었다.
다만 황후에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기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어여쁘게 자라주어 정말 고맙다, 엘레나.”
엘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볼을 붉혔다.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황제가 얼마나 그녀를 아끼는지는 알 수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데카루스를 사랑하느냐.”
“네???”
엘레나는 기함하며 방을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황제는 입꼬리가 눈에 닿을 만큼 웃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단다, 아가. 이 아비는 다 알고 있어.”
“아, 아니. 아니에요! 제가 카루스를 왜….!”
“그럼 싫은 게냐.”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니고….”
엘레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온화한 미소를 띠던 황제는 이내 데카루스를 불러 세웠다.
“예, 폐하.”
“공은 내 딸을 사랑하는가.”
“예.”
데카루스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미친 듯싶어 그의 허벅지를 꼬집자 손엔 살며시 깍지가 끼워졌다.
“황제의 자리를 포기할 만큼 사랑하는가, 스큘러스 공.”
말을 마친 황제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쏟아냈다.
급히 시종들이 달려들자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아섰다.
“애초에 욕심 따위 없었습니다, 폐하. 처음부터 황태녀 전하의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래. 참, 자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늘 충직하고 올곧았지. 무엇보다 부인을 아끼던 마음이 참으로 예뻤는데.”
“…….”
“그러니 짐이 없어도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폐하.”
엘레나는 다시 그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무슨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견례 자리도 아니고,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야.
이 인간, 사실 흑심 품고 폐하를 알현하러 온 거 아니야?
“저,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폐하.”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앞으로 자주 오렴. 마음 같아선 당장 입궁시키고 싶지만 너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것이 더 좋겠지.”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황제는 깍지 낀 두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진짜 신혼부부가 된 듯한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네, 니요! 폐하, 그럼 자주 뵈러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당황한 엘레나의 입에선 네와 아니요의 합성어가 튀어나왔다.
정신없이 부랴부랴 데카루스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뒤를 돌아 황제에게 다가갔다.
“정말, 자주 올게요. 아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막 뱉었다.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조막만 한 두 손을 꼭 잡아끌었다.
“그래, 내 딸.”
처음으로 내뱉어 본 단어, 아빠.
살면서 이 단어가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냥 왠지 모르게 오늘은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궁을 빠져나온 엘레나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걸었다.
황태녀라는 칭호도, 바뀐 성도, 아빠가 황제라는 것도 전부 믿기지 않았다.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해….”
데카루스는 시무룩해 보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 사이로 따듯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세상 모든 게 바뀌어도 엘레나, 당신은 엘레나 그 자체야.”
“…….”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단 한 사람.”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엘레나는 엘레나다.
머릿속에 새겨 보았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이 가시진 않았다.
“돌아가면 푹 쉬어야겠어. 당신 많이 지쳐 보여.”
“응….”
“이게 누구십니까.”
그 순간 귓구멍을 짓이기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동요한 심장은 터질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스큘러스 공과.”
황후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며 입꼬리를 매섭게 올렸다.
“황태녀 전하 아니십니까.”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데카루스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황족에 대한 예를 차렸다.
그러자 황후는 기괴한 콧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대체 누가 소문을 낸 건지 온 제국 안이 시끌벅적합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고 아우성이라더군요.”
가지런히 접힌 빨간 부채가 그녀의 손에서 탁탁 소리를 내었다.
부채가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제 주인을 몰라보는 천한 것들을 잡아 없앨 수 있어 다행입니다.”
“…….”
“한데 황태녀께서는 이 어미를 보고도 인사도 하질 않는군요. 서운해지려 합니다.”
황후는 귀신처럼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는 데카루스와 잡은 손을 꼭 쥐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어미가 두려운 것입니까.”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전하께서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살모사처럼 표독스러운 얼굴로 웃어 젖혔다.
“마치 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만 같군요. 그렇게 개처럼 엘레나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더니. 이번에도 자처해서 개가 되신 겁니까, 스큘러스 공.”
“그저 전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황후는 곧장 말을 받아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하, 그래요. 모쪼록 얼굴을 보니 좋았습니다.”
“영원의 제국 에스텔에 무한한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