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저녁 식사를 마친 엘레나는 모처럼 일찍 씻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아까 난리를 피운 탓인지 온몸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저녁도 안 먹으려고 했었지만 데카루스가 억지로 먹이는 바람에 체할 뻔한 걸 꾹꾹 참으며 입에 욱여넣고 왔다.
“내일 황궁에 갈 거야.”
“아, 그래?”
멍하니 어두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던 엘레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당신도 함께.”
아, 방금 한 말은 취소다.
무척이나 상관있는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그토록 끔찍한 황궁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니.
그것도 제 발로 말이다.
“…왜?”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일순 엘레나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황제 폐하라면 아까 초상화에서 본 그 남자를 말하는 걸까.
분명 가족을 만나는 건 두근대는 일이다.
하지만 황후를 만난 이후론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안 갈래.”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지금도 간신히 견뎌내고 있는데 그 지옥 같은 곳에 제 발로 걸어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엘레나, 별일 없을 거야.”
데카루스는 침대 가로 다가와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마주 닿은 눈빛에선 솜사탕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는 아기를 다루듯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싫어. 당신도 알잖아. 내가 그곳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왔는지.”
“그래, 나도 알아. 당신 힘든 거. 하지만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무슨 일.
두려운 감정을 무시할 만큼 중요한 일이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엘레나는 그저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알만 요리조리 굴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시는 추세고.”
“몸이 안 좋다고…?”
“응, 그래서 이렇게 서두르려는 거야. 또 형식적으로라도 당신이 돌아왔다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아….”
증명해야 한다는 게 무슨 소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그러니까 아빠라는 사람이 더 아프기 전에 봐야 한다는 말일 테니.
“그래, 알았어.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걱정은 됐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낳아준 사람이 많이 아프다고 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래, 내일 바쁠 테니 이만 일찍 자도록 해. 또 졸리다고 칭얼대지 말고.”
“안 칭얼거려.”
애도 아니고 언제 칭얼댔다고 그러는 걸까.
입을 빼죽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거짓말할 거야.”
“거짓말 아닌데.”
“또 거짓말.”
데카루스는 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소리 나게 입술을 맞췄다.
“뭐야.”
“거짓말한 벌.”
“됐어. 옷이나 갈아입어.”
데카루스는 곱슬대는 머리를 세게 비비곤 거울 앞으로 향했다.
멀대같이 큰 키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모습이 꼭 프로 모델 같았다.
게다가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에 팽팽히 당겨진 셔츠는 뭇 여인들을 홀리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또 한 손으로 단추를 푸는 게 원래 저렇게도 섹시한 거였나.
바스락거리며 벗겨지는 셔츠 속에는 탄탄한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저를 봐 달라며 아우성치는 듯한 모습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카루스.”
“응.”
“이리 와 봐.”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무릇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요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그는 잠옷을 꺼내다 말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그냥 와 봐.”
데카루스는 의심쩍은 얼굴로 눈썹을 살짝 구겼다.
하긴 똥개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옷 갈아입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면 무슨 일인가 싶겠지.
참을성 없는 엘레나가 발을 동동 구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왜.”
올록볼록한 엠보싱 근육이 눈앞에 있으니 만져보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손으로 콕콕 찍어보고 싶었지만 그럼 분명 변태 취급을 받겠지.
오랜 생각 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았다.
“안아줘.”
데카루스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뭐?”
“안아달라고.”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침대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 팔을 뻗었다.
이때다 싶어 그의 품에 폭삭 안기자 크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따끈따끈한 찐빵 같은 근육에 안기니 금세 졸음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쭉 펴 판판한 등을 쓸어내렸다.
울퉁불퉁한 게 꼭 어린이용 블록을 만지는 듯했다.
얼굴엔 그대로 느껴지는 가슴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나 변탠가.”
“그런 것 같은데.”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수긍하는 그가 괘씸했다.
심통 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자.”
“싫어.”
“왜 또.”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그의 몸을 더 느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그냥 지금 이 포근함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따듯한 열기 그리고 사랑이 담긴 손길.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좋다.”
“뭐가.”
“그냥 지금. 이 순간이.”
평온하고 따듯한 이 순간이.
말랑말랑하고 폭신거리는 이 기분이.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전신에 퍼진다.
“나도.”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살포시 닿은 입술이 눈과 코를 타고 입술에 닿았다.
“당신과 함께라서.”
엘레나는 한참 동안 그의 눈을 응시했다.
마음속엔 따스한 촛불 하나가 켜져 어두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오래된 얼음이 녹고 푸릇푸릇한 새싹이 피듯 그녀의 마음에도 노오란 봄이 왔다.
* * *
그와 함께하는 세 번째 마차는 이제 꽤 익숙했다.
여전히 옆에 앉으라고 고집을 부리는 게 조금 언짢긴 했지만 말이다.
“황궁에서 또 황후를 만나게 되면 어쩌지?”
“내가 옆에 있잖아.”
“…응.”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
아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악마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자 데카루스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절대 아무도 당신을 해칠 수 없어.”
그는 정수리에 입술을 파묻곤 조심스레 등을 토닥였다.
봄날에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포근한 품 안에서 가만히 그를 느꼈다.
“황제 폐하는…. 어떤 분이셔?”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생각에 잠긴 모습이 꼭 건전지가 빠진 로봇 같았다.
“궁금해?”
“응.”
엘레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머리카락에 온전히 맞닿았다.
“사사로운 감정 없이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시고 옳은 일엔 늘 먼저 나서서 행동하시지. 그리고 이 에스텔과 국민들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분이셔.”
그저 입에 발린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가 사람을 이 정도로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기에.
“좋은 사람인가 봐. 당신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응, 황후와는 달리 정말 깨끗하게 살아오신 분이야. 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 곁을 지켜주기도 하셨고.”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나를… 기억할까?”
“당연하지. 당신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셨는데.”
“그렇구나….”
그렇게 마차는 한참을 달려 황궁에 다다랐다.
거대한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몸이 잘게 떨렸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데카루스는 떨고 있는 그녀를 보곤 고개를 숙여 이마에 사뿐히 입을 맞추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움직였다.
아무리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은 언제나 주위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직접 보는 황제궁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웅장했다.
마치 그리스 신전처럼 박힌 기다란 원주와 화려하게 조각된 페디먼트가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와….”
“그만 구경하고 이리 와.”
데카루스는 조막만 한 손을 잡아 궁 내부로 향했다.
내부 역시 지금까지 봐 왔던 모든 건축물을 압살할 정도로 화려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희귀 광물부터 크리스털로 장식된 빛나는 벽, 그리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섬세한 천장화까지.
사치스러움을 넘어 돈을 찍어 발랐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입 찢어지겠어.”
“이 정도로 굉장할 줄은 몰랐어.”
“에스텔이잖아.”
에스텔은 제국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아니 다른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강대국이다.
오죽하면 에스텔 국민은 국가 간 출입이 프리패스일 정도로 신뢰가 깊은 나라이다.
그래서 다들 이 나라에 정착하고 싶어 시민권을 따러 유학까지 올 정도지.
“저기, 저기가 황제가 계신 곳이야.”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엔 아주 거대한 문이 있었다.
진짜 금을 박아놓은 듯 벽돌 무늬로 장식된 문은 반짝거리며 빛났고 손잡이엔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가 다닥다닥 박혀있었다.
“스큘러스 대공 전하 납십니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병의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거대한 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신비스럽게 열렸다.
내부는 금색 실로 짜인 베일로 감춰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데카루스가 먼저 입장하자 시녀들은 칸칸이 쳐져 있는 베일을 걷어내며 우리를 안내했다.
“언제까지 걸어야 해?”
“쉿.”
한참을 걷자 그 끝엔 높은 옥좌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에 보석을 박은 듯한 푸른 눈을 가진 남자.
치렁치렁한 붉은 망토에 금빛 왕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황제가 맞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긴장한 듯 데카루스의 손을 꽉 잡으며 걸었다.
“너는….”
황제는 혼란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하염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방증해주는 듯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황제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며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계단을 내려왔다.
아무래도 노쇠하여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데카루스와 그 주변 시종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눈치 보던 엘레나 역시 재빨리 무릎을 꿇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엘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