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0화 (80/117)

80화.

대공저, 회의실.

“성급한 결정이십니다. 아직 여타 다른 공국과 병력 조율도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심지어 현재 데제르 공국은 내부 분열로 인한 내전 상태고요. 갑자기 전쟁은 말이 안 됩니다, 전하.”

“그럼 이대로 황후가 두 눈 뜨고 살아있는 꼴을 보란 말인가, 만델. 엘레나가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 왔는지 경들도 잘 알 텐데.”

그의 말에 회의실은 싸늘한 냉기로 가득 찼다.

단체로 실어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 말이 없자, 보다 못한 이삭은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진정 좀 해. 누가 몰라? 여기서 마음 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나도 지금 당장이라도 황후를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

“네 말대로 지금 당장 부족한 병력으로 황후를 친다고 쳐. 그럼 이길 것 같아? 황후가 지금까지 야금야금 갉아먹은 권력이 얼만데. 심지어 군 통솔권마저 황후가 가지고 있잖아. 그 정도면 제국을 휩쓸 수 있는 힘이라고. 애들 장난이 아니야, 이건.”

데카루스는 지끈대는 머리를 저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 어떤 때보다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까닭일까.

이삭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럼, 저번에 말한 귀족파에 관련된 사항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그는 엄지로 미간을 꾹 누르며 입을 뗐다.

“반 이상이 황제파로 편입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무리 회유해도 도통….”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그들 역시 황후 편은 아닐 테니. 또 황태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퍼지면 알아서들 따라올 테지. 어찌 됐든 자기 밥그릇 하난 소름 끼치게 잘 챙기는 자들이니.”

그들은 동의하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눈알을 살살 굴리던 한 행정관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다름이 아니라, 전하. 황후가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병력은 물론이고 황궁 내부 인사들을 전부 갈아치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뭔가.”

“8황자 전하와 황후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8황자 전하께서….”

데카루스는 이를 으드득 갈며 행정관을 노려보았다.

겁에 질린 그는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기어코 노아가 일을 벌이고 만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황제파를 전멸시키고 자기가 왕관을 쓸 셈이겠지.

황자들, 아니 이미 대부분의 황족이라면 황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테다.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황궁 내에서도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니.

“공식적인 황태녀 책봉식을 당장 내일로라도 앞당기셔야 합니다, 전하. 최근 황제 폐하의 상태가 위중하시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황제파의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또 황태녀 전하의 책봉과 동시에 황제파의 입지는 더욱 두드러질 테고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긴 것 같았다.

깃펜으로 책상을 여러 번 두드리던 데카루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황태녀 책봉식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저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니까. 그럼 우선 내일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걸로 하지.”

“예, 전하.”

“그리고 황태녀가 돌아왔다는 그럴듯한 소문을 퍼뜨리도록 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좋아. 최대한 타 공국까지 빠르게 퍼지도록.”

* * *

빛이라곤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

그 안에서 흐느끼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여자가 있다.

그 소리는 너무나도 서글퍼 지나가는 바람조차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오늘은 네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준 날이구나, 엘레나…. 내가 너의 엄마가 되었다니, 이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기뻐….”

새하얀 일기장의 한 구절을 읽던 엘레나는 혹시라도 종이에 눈물이 떨어질까 손으로 연신 눈가를 비벼댔다.

하지만 눈물은 그렇게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이 겹겹이 쌓여갔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날 사랑했으면서 왜….”

엘레나는 하얀 양장본을 품에 안고 소리 내어 구슬피 울었다.

그녀의 뒤로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젊은 남녀와 앳돼 보이는 소녀가 그려진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행복했구나….”

그림 속 너는 행복하구나, 엘레나.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미소 짓는 네가 부러워.

지금 이 몸뚱어리가 너무나도 아파서, 그래서 질투가 나.

“난 왜 매번 아파하기만 해야 해….”

엘레나는 손으로 액자를 쓸어내렸다.

지난 삶이 전부 거짓말처럼 믿기지 않았다.

매일 밤을 홀로 버텨왔던 어린아이.

늘 외로움에 사무쳐 사랑을 갈망하던 어린아이.

언젠가 나아지겠지 하던 말들이 전부 부질없어.

더 이상 희망 고문 따위 당하고 싶지 않아.

“신은 없는 거야….”

털썩-

엘레나는 무릎을 꿇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 손으로 입을 막아봤지만 손가락 사이로 퍼지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차가운 돌바닥엔 따듯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아파, 너무 아파….”

이 감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모님을 찾아서일까.

아님 저를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일까.

검은 소용돌이가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괴롭다.

괴롭고 아프다.

이렇게 가슴 찢어지도록 아픈 줄은 몰랐는데.

그저 가족을 찾으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 삶의 불행은 어디까지일까.

얼마나 더 깊고 진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생겨 아물어도 다시 시작되는 악몽.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더 깊어지는 어두운 골.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 거지 같은 삶을 다시 살아갈 자신이 없다.

어차피 한 번 죽은 몸, 다시 죽는다고 해도 후회 따위 없으니까.

“너무 지쳤어.”

지금까지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더 이상 살려고 아득바득 발악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 죽음의 강을 건너 조용히 숨을 내려놓고 싶다.

툭-

두 손을 올리자 두꺼운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레나는 회색 안개가 낀 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이 천천히 목을 죈다.

두려운 감정이 앞섰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윽……”

뼈가 부러질 정도로 힘을 주자 마른기침이 터졌다.

점점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마저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엘레나는 손을 놓고 콜록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끈을 집어 목에 걸었다.

“죽어…. 제발, 제발 죽어….”

“엘레나!”

익숙한 목소리와 동시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하지만 죽기는커녕 살이 말려들어 아프기만 했다.

데카루스는 미끄럼 타듯 계단을 내려와 반쯤 정신이 나간 엘레나의 손을 붙들었다.

“당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화가 난 목소리였다.

빛깔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놔, 이거….”

엘레나는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같은 팔로 그를 밀쳐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화가 난 그가 무섭기보단 원망스러웠다.

이제껏 마음대로 해왔으면서 왜 끝까지 저를 괴롭히는 것일까.

“상관없잖아…. 가.”

“엘레나 헬리오스!!!”

그가 쥔 어깨에 힘이 세게 들어갔다.

덕분에 목에만 맴돌던 통증이 어깨에 맺혔다.

엘레나는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너무 힘들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카루스.”

“…….”

“인생이 괴로워. 나도 너무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그래서 아득바득 살아왔는데. 근데 이제 다 놓아버리고 싶어. 내 삶이 너무 불행해.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갖는 행복이 내겐 쉽지가 않아. 왜, 왜 나만. 나만 그래야 해? 응?”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유리구슬처럼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정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나 좀 죽여줘…….”

“못 죽어. 당신이 어떻게 죽어.”

그는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토끼처럼 그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벗어날 수 없다고 했잖아. 내가 죽을 때까지 당신은 내 옆에 있으라고. 근데 왜 자꾸 말을 안 들어.”

“…….”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는 더 세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소중한 걸 잃지 않고 싶은 마음이 온몸에 퍼져 흘렀다.

“삶이 진창일지라도 살아남아. 당신 목을 죄어도 버티고 또 버텨.”

“…….”

“내 허락 없이 당신은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죽음도 삶도. 전부 내가 정해.”

새하얀 셔츠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생채기가 난 것처럼 마음이 아려왔다.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입술을 꼭 깨물며 참았다.

“남은 삶이…. 지옥일 뿐이라도?”

그녀의 몸은 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이처럼 잘게 떨렸다.

트라우마처럼 깊게 새겨진 공포심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지옥일 뿐이라도 내 곁에 남아. 난 절대 당신 불행하게 하지 않아.”

엘레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심장 소리가 맞닿은 가슴에 울려 퍼졌다.

따듯한 그의 온기가 전신을 훑어 내렸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인두처럼 뜨겁게 자국을 남겼다.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날 버리지 마. 당신만은 내 곁을 떠나지 마.”

“그럴 리 없잖아.”

머리카락에 닿은 큰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눈을 감고 온전히 손길을 느끼던 엘레나는 이내 천천히 몸을 떼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맺힌 작은 눈물방울은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의 입술이 그 자리를 천천히 훑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

“당신이 싫다고 해도 절대 놔주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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