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살갗에 맞닿은 새 잠옷의 촉감은 나쁘지 않았다.
실크로 짠 듯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엘레나는 그저 멍하니 누워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대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끼익-
때마침 들려오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엔 아직 머리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데카루스가 서 있었다.
“다 씻었어?”
“응.”
“몸은.”
“괜찮아.”
가늘게 뜬 그의 눈가엔 의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긴 이렇게 맥없이 누워만 있는데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테지.
“진짜야.”
“그래.”
그는 이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천천히 침대 가로 다가왔다.
검은 가운 사이로 보이는 근육이 저를 봐 달라는 듯 아우성쳤다.
거대한 몸이 침대에 오르자 정갈했던 시트엔 주름이 마구 졌다.
그는 머리에 팔을 괴고 누워 그저 아무 말 없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두 눈동자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안아줘, 카루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은 그를 원했다.
그를 어루만지고 안고 싶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맞부딪치며 몸을 탐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이 헛헛한 마음을 채우고 싶었다.
“…….”
데카루스는 조용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 폭삭 안긴 엘레나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
그는 잔말 없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엘레나는 눈을 감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판판한 가슴에서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봐?”
엘레나는 그의 가슴에 대고 조곤조곤 말했다.
분명 황후가 무슨 짓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니 이상했다.
“응.”
“…왜?”
“나쁜 기억이잖아.”
아까 그 꼴을 보고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황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끔찍한 일인 걸 알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겠지.
엘레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둥지처럼 포근하고 따듯한 게 잠자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내 예전 이야기를 들려줘, 카루스.”
“…….”
“기억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누가 칼로 잘라놓은 것처럼.”
앵두처럼 조막만 한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숨소리가 퍼졌다.
비록 타인의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엘레나라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궁금했다.
일곱 살 이전엔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모습을 했는지.
“듣고 싶어.”
“그래.”
데카루스는 좋은 향이 나는 머리 위에 짧게 키스했다.
귓가에 닿는 짙고 어두운 목소리가 젤리처럼 끈적거렸다.
“당신은 늘 장난꾸러기였어. 노아와 매일 싸우곤 했지. 난 그 옆에서 둘을 중재하는 역할이었고.”
“…….”
“그리고 제멋대로 하기 일쑤였어. 당신 마음에 차지 않으면 투정을 부리곤 했지. 황후는 그런 당신을 아주 사랑했고.”
“그랬구나….”
기억나진 않아도, 버림받았어도 사랑을 받았었구나.
엄마에게.
“황제께서도 당신을 총애했어. 늘 옆에 끼고 다니실 만큼 남다른 애정이셨지. 오죽하면 어전회의 때도 당신을 데리고 가셨을까.”
황후가 엄마니까 당연히 황제가 아빠겠구나.
꽤 당연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것에 코웃음이 나왔다.
“그럼 당신과 나는? 어떻게 알게 됐어?”
데카루스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당신이 아주 어렸을 때, 연회에서 처음 만났어. 다섯 살밖에 안 된 꼬맹이가 황좌에 앉아 으스대더군.”
“내가? 내가 그랬다고?”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그는 눈꺼풀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선 곧장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 하도 오냐오냐 귀하게 자라서 폭군이 따로 없었어. 늙은 귀족들마저도 혀를 찰 정도였지. 당신 말이 곧 법이었으니까.”
참나, 말만 들으면 진짜 폭정이라도 한 줄 알겠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어 다른 주제로 넘겼다.
“그럼 당신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데?”
일순간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께름칙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되레 당황한 엘레나는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왜, 왜, 왜 그래.”
“이만 자.”
그는 엘레나의 얼굴까지 얇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덕분에 숨이 막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그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기에 갑자기 놀리고 싶어졌다.
엘레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두 눈을 크게 뜨고 고집스레 물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부끄러운 일이야? 응?”
“이만 자.”
그는 난생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등을 돌렸다.
이런 건 보통 그녀가 하던 일인데 상황이 역전되니 꽤 재밌었다.
“카루스.”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그를 껴안자 이번엔 완전히 붉어진 귓바퀴가 보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엘레나는 몸을 꼭 붙이곤 탄탄한 가슴을 간질였다.
그러자 그는 요망한 손을 꼭 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다.
“뭐야, 카루스…!”
일순간 그녀의 몸 위엔 사나운 남성의 몸이 자리 잡았다.
당황해 고개를 들자 아까보다 더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마치 곧 사냥감을 잡아먹을 듯한 사자처럼 으르렁댔다.
“먼저 건드린 건 당신이야.”
순간 촉촉하고 말랑거리는 무언가가 거칠게 그녀를 범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밀고 들어왔다.
살며시 입술을 벌리자 말캉한 혀가 곧바로 그녀를 정신없이 탐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맞잡고 진하게 키스했다.
데카루스는 갈피를 못 잡고 서성이는 혀를 붙잡고 옭아맸다.
그가 혀를 세게 빨아대는 탓에 혀뿌리가 아려왔다.
강도가 심해질수록 그녀의 손톱이 널찍한 등을 파고들었다.
그 덕에 얼얼해진 입 안에서 서로의 타액이 어지러이 섞였다.
그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살짝 입술을 떼자 타액이 거미줄처럼 주욱 늘어났다.
“카루스, 그만….”
엘레나는 입술이 아픈지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애원하듯 반짝이는 눈이 사슴처럼 어여뻤다.
“근데 어쩌지.”
“…….”
“오늘은 그렇게 울어도 소용없어, 엘레나.”
* * *
짝-
짝-
짝-
매섭게 내려친 손이 살갗을 스쳤다.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얼굴을 내리칠 때마다 목이 꺾일 듯 돌아갔다.
황후는 희번덕한 눈빛으로 눈을 부라렸다.
허공에 높게 들린 새하얀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화를 참는 듯 꾹 다문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발칙한 것. 네가, 네가 감히 나를 능멸해!!!”
황후는 미친 사람처럼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개새끼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때부터 알아봐야 했어.”
“…….”
“내 눈앞에 엘레나를 내보인 걸로도 모자라 거짓을 고해!!!”
무릎을 꿇은 노아는 감정 없는 인형처럼 눈을 흐렸다.
이미 셀 수 없이 맞은 볼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입 안에서 흘러나온 피는 입술을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듯 눈을 치켜뜨며 황후를 응시했다.
“다 하셨으면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전 단지 황후께 아주 좋은 제안을 드리러 온 겁니다.”
“천박하기 짝이 없구나, 노아. 네가 감히….”
“어차피 황후께선 절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으십니까.”
노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의 주위엔 목이 잘린 호위병과 시종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다.
이는 마치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보는 것과 같았다.
“절 이렇게 만든 스스로를 원망하십시오. 애초부터 이런 끔찍한 괴물을 만든 건 황후 본인이시지 않습니까.”
그는 이 상황이 마냥 재밌는지 소리 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후는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내심 공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키운 강아지는 어느새 호랑이, 아니 괴물이 되어 있었기에.
“군의 통솔권을 제게 주십시오. 황제는 제가 직접 칩니다. 황후께선 뒤에서 잠자코 보고만 있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엘레나, 엘레나를 죽이거라…. 엘레나가 살아 있으면 내가 죽어. 내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황후는 숨 가쁘게 가슴을 쥐며 호흡했다.
마치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벌벌 떠는 모습이 우스웠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황후가 이토록 나약할 수가.
“어차피 황후는 죽습니다. 저를 거부하면 제가 황후를 죽일 것이고 엘레나가 살아있다면 황후는 속절없이 죽겠죠. 제가 이제까지 왜 황후를 살려 둔 줄 아십니까.”
노아는 손톱이 파고들도록 손을 꽉 쥐었다.
호랑이처럼 번뜩이는 눈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으드득 이를 악물자 아직 가시지 않은 피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당신이 엘레나의 어미라 살려둔 거야, 베로니카. 엘레나가 슬퍼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필요 없더군. 난 그저 엘레나면 돼. 찢기고 망가지더라도 그저 엘레나만 있으면 돼.”
황후는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위압감에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닭 모가지 하나 비트는 것도 두려워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이젠 완벽한 살인귀가 된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 따위 시시한 놀이에 불과했다.
“뭐든 해줄 테니 날 살려. 어떻게든 날 살려내.”
“우린 같은 편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살려드려야지요.”
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짧게 입맞춤했다.
주름진 손은 공포에 질린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노아는 그런 황후를 보며 비죽 조소를 흘렸다.
“앞으론 일이 아주 재밌어질 겁니다.”
그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뒤를 돌았다.
“피로 흠뻑 젖은 기분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