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전쟁이라도 난 듯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에이든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엘레나를 업고 한달음에 달렸다.
“레나, 조금만 참아.”
엘레나는 너른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온몸은 물에 젖어 축축했고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제까지 벌어진 상황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네, 어미란 말이다. 엘레나.’
‘그러니 기억해, 엘레나. 기억하라고!! 내가 네 어미란 말이다!!’
‘차라리 죽지 그랬니. 응? 왜 자꾸, 왜, 무엇 때문에.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냔 말이다!!’
엘레나는 눈을 꼭 감고 방금까지의 기억들을 되새겼다.
망치로 벽돌을 깨부수는 것처럼 시끄럽게 머리가 웅웅거렸다.
“내가 황후의 딸이래….”
엘레나는 체념한 듯 조용히 입을 벙긋거렸다.
그 기색은 곧 상이라도 치를 사람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황후가…. 내 엄마래.”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끔찍한 진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둘 사이엔 그저 찌르르, 하는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나뭇잎을 간질이는 바람 소리만이 조용히 흐를 뿐이었다.
“넌…. 다 알고 있었던 거지.”
눈을 질끈 감은 채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그에 대한 원망 어린 감정이 쉴 새 없이 파도쳤다.
“진짜…. 진짜로 내 엄마가 황후야…?”
이미 진실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끝까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목구멍에 물먹은 솜이 낀 것처럼 먹먹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
입술을 꽉 깨물던 에이든은 마지못해 소리 내었다.
마음이 유리 조각처럼 잘게 깨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큰 궁궐로 들어서자 수많은 방들이 보였다.
에이든은 뚜벅뚜벅 걸어 그중 가장 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따듯한 온기가 살갗을 스쳤다.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쉴 무렵,
에이든은 갑자기 얼어버린 것처럼 자리에 멈춰 섰다.
“데카… 루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익숙한 이름이었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엔 거짓말처럼 데카루스가 서 있었다.
“카루스…?”
“엘레나.”
그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입가에서 거칠게 쏟아지는 숨이 불안정했다.
새하얀 셔츠는 샤워라도 한 듯 축축이 젖어 있었다.
“엘레나, 대체….”
“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엘레나의 여린 등과 허벅지를 감싼 두꺼운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가라고.”
“에이든, 나….”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서슬 퍼런 눈빛이 데카루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찾아왔어.”
“…….”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형은 대체 뭘 했어.”
“에이든, 그만해. 난 괜찮….”
“죽여버리기 전에 나가. 형은 여기 있을 자격, 없어.”
살벌한 분위기에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옷깃을 잡았다.
“에이든.”
“넌 가만히 있어.”
이대로 가다간 또 둘이 싸우기만 할 것 같았다.
에이든에게 미안했지만 이 상황을 중재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 집에 갈래.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레나….”
에이든은 조금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궁보다 대공저가 안전하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사실.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넋 놓고, 그녀를 보내야 한다는 게 원통할 뿐이었다.
“가자, 카루스.”
데카루스는 손에 든 커다란 망토로 엘레나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하….”
노아는 거칠게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속엔 거센 회오리가 몰아쳤다.
이를 악물어 봤지만 분노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네.”
* * *
달리는 마차 안은 말소리 없이 고요했다.
반딧불의 비행은 어두운 마차를 은은히 비춰주었다.
큰 수건을 든 그의 손이 조심스레 머리를 문질렀다.
덕분에 으슬으슬하고 추웠던 몸이 조금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좀 자, 아직 가려면 한참 남았어.”
“응….”
엘레나는 껌뻑이던 눈꺼풀을 닫고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다.
검은 시야로 조금 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이내 참지 못하고 눈을 뜬 엘레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알려주지 않았어.”
“뭘 말야.”
“내가 황후의 딸이라는 거.”
머리를 감싸던 손이 빠르게 정지했다.
데카루스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비소가 흘렀다.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열기가 끓어올랐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고 그랬어?”
“…….”
“당신은 지금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지.”
“엘레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데카루스는 수건 위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는 허리를 꼭 끌어당겼다.
“그토록 바라왔던 엄마라는 사람이 나보고 죽으래. 내가 쓸모없대.”
“…….”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아. 난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 같아.”
꾹 참았던 눈물이 다시 한번 수위를 넘을 듯 넘실거렸다.
가슴이 까맣게 타버린 것만 같았다.
엘레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왜, 왜 말해주지 않았어. 왜 황후가 내 엄마라고 말해주지 않았어. 차라리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거 아니야.”
“…….”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제발…. 차라리 몰랐다고, 몰랐다고 거짓말이라도 좀 해.”
“…….”
“어떻게 당신이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대체 왜 그랬어. 대체 왜….”
길고 단단한 팔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두꺼운 수건 사이로 맞닿은 온기가 살그머니 살갗을 파고들었다.
데카루스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떨궜다.
“당신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
“…….”
“또다시 악몽을 꾸게 하고 싶지 않았어.”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이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엘레나는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은 이미 흥건히 젖은 드레스를 더욱더 짙게 적셨다.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닦아봐도 소용없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눈가에선 쉴 새 없이 소낙비가 내릴 뿐이었다.
조용하던 마차 안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목을 긁는 쇳소리로 가득 찼다.
“나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돌아가고 싶어.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제야 모든 게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전부 잘 짜인 연극이었다는 것을.
제인도, 데카루스도 그리고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조각난 빙하에 고립된 것처럼 저 혼자만 남겨진 채.
“내가 너무 바보 같아.”
그렇게 많은 실마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채지 못했던 저 자신이 한심했다.
비밀리에 치러진 결혼식과 탄신연회, 제인의 방에서 발견한 엘레나라는 이름이 적힌 하트 목걸이, 지하 서재에 있던 자신의 초상화, ‘엘레나에게’라고 적힌 책, 가끔씩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알 수 없는 말들 등등.
이 모든 게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왜 몰랐을까.
왜.
“아파, 너무 아파….”
그는 말없이 꺽꺽대며 들썩이는 작은 몸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맞잡은 커다란 손은 작게 피어난 불씨처럼 따스했다.
그렇게 마차는 어두컴컴한 밤을 가르며 쉴 새 없이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노란 불로 은은히 밝혀진 대공저가 보였다.
그 앞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20명 남짓한 시종들과 위병들이 서 있었다.
“이리 와.”
마차가 멈추자 그는 힘없는 몸뚱이를 조심히 받쳐 들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서자 눈앞엔 놀란 제인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제인….”
엘레나는 곧장 품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가씨, 꼴이 이게… 대체, 대체 누가….”
제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곧장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에 마음이 한 번 더 울컥했다.
“황후 폐하께서, 그러신 거죠….”
제인은 엘레나를 품에 와락 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하지만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목이 멘 소리가 너무나도 애절했기에.
“어떻게 끝까지…. 우리 아가씨를….”
“난 괜찮아, 제인. 별거 아닌걸.”
엘레나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실없이 웃었다.
눈물을 닦던 제인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제가 용서치 않을 거예요. 아무리 황후 폐하라도. 제가, 제가….”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바람이 차. 제인, 목욕물을 준비해줘. 그리고 당신은 이리 와.”
데카루스는 다시금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아 저택 안으로 향했다.
하도 안기는 바람에 무슨 짐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카루스, 이제 놔도 돼. 나 멀쩡….”
“그렇게 재채기를 하면서 무슨.”
사실 젖은 몸으로 한참을 바깥에 서 있던 탓에 꼭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재채기도 나오고 말이다.
아닌 척 숨기려 했지만 그의 레이더망은 피할 수가 없었다.
“씻고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혼자서 씻을 수 있지?”
꼭 어린아이를 대하는 행동에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 당연하지.”
엘레나는 헐레벌떡 뒤를 돌아 욕실로 뛰쳐 들어갔다.
여전히 화끈 달아오른 볼이 뜨거웠다.
“후….”
따끈한 탕에 몸을 담그자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다리를 쭉 뻗자 욕조 끝에 발이 알맞게 닿았다.
그렇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끔찍한 장면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황후와의 첫 만남, 그녀와의 저녁 식사, 그리고 어두컴컴한 지하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나쁜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정할수록 더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엘레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다시금 쏟아지는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투명한 목욕물에 잔잔한 원을 그렸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지독한 슬픔을 씹어 삼켰다.
아무도 몰래, 그렇게 혼자.
마음속 한구석에 핀 검은 꽃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