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3년 전.
“엄마, 엄마….”
바다에서 발견된 기억을 잃은 소녀.
아는 거라곤 제 이름밖에 없던 불쌍한 아이.
엄마에게 버려진 건지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병상에서 늘 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니?”
소녀는 실어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을 하지 못했고, 의사는 버려진 충격으로 기억을 전부 잃은 것이라 진단했다.
그렇게 소녀는 작은 바다 마을의 보육원에 입소하게 된다.
“6월 6일. 네가 태어난 날인가 보구나. 그렇지?”
소녀의 손에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작은 편지가 있었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있었다.
“엘레나는 네 이름인가 보다. 예쁜 이름이네.”
그렇게 소녀는 그날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엘레나 헬리오스.
편지에 성 따위 적혀있지 않아 신의 이름을 따 그 뒤에 덧붙였다.
“엘레나 헬리오스, 어때. 마음에 드니?”
병원을 떠나고부터는 늘 혼자였다.
소녀는 예쁜 인형처럼 늘 구석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도, 그렇다고 밥을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야, 말병신.”
“…….”
“얼굴은 예쁜데 왜 말을 못 해? 야, 말 좀 해봐.”
아이들의 멸시에도 소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괴롭힘은 가중되었고 소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넌 왜 울지도 웃지도 않는 거지?”
라르사라는 이름을 가진 원장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그녀의 손엔 늘 매가 들려있었고 늘 아이들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소녀는 감정 없는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라르사는 더욱이 분노하여 소녀를 괴롭혔다.
“말해! 말! 말을 하라고!”
끝없는 매질에 소녀의 몸엔 피멍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소녀를 구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끈질긴 년.”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소녀는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입조차 벙긋 안 하던 아이가 어른처럼 말을 하고 이상한 단어를 쓰기도 했다.
“경찰서에 신고해 버릴 거야, 이 미친년. 내 핸드폰 어딨어!”
“뭐, 뭐? 미친년?”
처음엔 소녀가 모두 미쳤다고 생각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말을 내뱉질 않나.
성격이 괴팍해져 원장의 머리통을 쥐어뜯질 않나.
게다가 아이들을 사로잡아 우두머리 행세까지 하고 다니니,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예전엔 당했지만 이제는 당하지 않아.”
소녀의 메마른 눈엔 어느새 생기가 서려 총명해졌다.
예전처럼 고분고분 당하고 있는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당당하고 똑똑한 아이, 엘레나 헬리오스.
* * *
코를 찌르는 냉습한 냄새.
몸이 떨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
여긴 대체 어디지.
“으음….”
엘레나는 낮게 신음하며 휘청거렸다.
단단한 무언가가 움직이지 못하게 손목을 죄었다.
차디찬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여기가 어디…?”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구나.”
“황후 폐하….”
주변이 온통 까만색이었다.
빛이라곤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공간이었다.
쾨쾨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직 몽롱한 탓에 사리분별이 안 됐다.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쇠고리가 달린 수갑에 손목이 묶인 엘레나는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양옆엔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녀를 잡고 있었다.
“아, 놀랄 것 없어. 우린 잠시 대화를 나누러 온 거란다.”
그녀의 앞엔 물이 가득 담긴 욕조가 있었다.
투명한 물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 비쳤다.
“놔주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짓…!”
“쉿, 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황후는 듣기 싫은지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자 엘레나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놔, 놔!!! 이거 놔!!!”
“몸부림쳐도 소용없는 걸 알잖니. 응?”
“놔!!!”
“하, 말로만 해선 안 되겠군.”
황후가 허공에 손을 들자 병사들은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갖다 댔다.
“뭐 하는… 읍…!”
순간 강한 압력에 의해 머리가 욕조로 기울었다.
투명한 물이 얼굴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눈을 뜰 수조차,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아찔할 정도로 차가운 온도에 피부가 얼 것 같았다.
“푸하…! 콜록! 콜록!!”
살기 위해 몸부림치자 물속으로 짓누르던 악력이 풀렸다.
엘레나는 죽을 듯이 기침을 하며 마셨던 물을 토해냈다.
그러곤 이내 입을 쩍 벌려 숨을 헐떡였다.
침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물이 잔뜩 묻은 머리카락은 드레스를 축축하게 적셨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대체, 대체 왜 이러십니까, 황후 폐하….”
두려웠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춥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궁금한가?”
간신히 눈을 뜨자 황후의 표독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기뻐 보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아주 재밌는 놀이를 할 거야.”
“무슨….”
“가엽게도 기억을 잃었더구나.”
“그걸, 어떻게….”
황후는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구두 소리가 공포심을 더했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네가 기억을 하면 살려주지, 하지만 기억을 못 하면 널 죽일 거야. 어때, 재밌을 것 같지?”
“폐하, 대체 무슨 소린지….”
황후는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화려한 성에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어여쁜 딸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
“그 아이는 곱슬거리는 분홍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엘레나 폰 에스티나.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 에스텔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녀였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온몸에 작은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미는 딸을 아주 아꼈어요. 만지면 부서질까, 바람에 날아갈까.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죠.”
“…….”
“하지만 어느 날이었어요. 황후에게는 무시무시한 신탁이 날아왔답니다. 그 신탁의 내용은 딸이 어미를 죽일 거라는. 그러니까 황태녀가 황후를 잡아먹는다는 내용이었지요.”
“…….”
“그때부터 황후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답니다. 금지옥엽 키운 예쁜 딸을 죽일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황후는 무서웠죠. 어떻게 여기 이 황후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아직 죽을 수가 없었어요.”
황후는 눈을 희번덕 뒤집어 까며 허공에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은 꼭 악마를 부르는 흑마법사 제사장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죠. 아이를 저 멀리 바다에 보내자. 죽든 살든 그것은 아이의 운명일 테니.”
“…….”
“그래서 황후는 저 멀리 바다에 아이를 버렸답니다. 슬펐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처음에는 아이를 바다에서 잃었다고 했었다.
근데 자기가 아이를 버린 거라고?
“그러면 여기서 문제. 이 황후와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
황후는 눈꼬리를 환하게 접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엘레나의 턱을 쥐어 잡았다.
“말해.”
“저, 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가엾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 따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다.
“담가.”
“읍…!”
순간 머리는 다시 욕조에 처박혔다.
풍덩. 차가운 물에 담가진 얼굴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번엔 타이밍을 놓쳐 코와 입으로 물이 다 들어왔다.
기도를 넘어 폐에 물이 차는 것 같았다.
“푸흐… 콜록! 콜록!”
기침을 하자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엘레나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짐승처럼 헉헉거렸다.
“왜, 왜.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해줘도 모를까, 응? 네 아비를 닮아 이리도 멍청한 것이냐, 엘레나!!!”
황후는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섬뜩한 안광이 눈꺼풀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네, 어미란 말이다. 엘레나.”
독을 품은 뱀처럼 악스러운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며 복화술이라도 하듯 목소릴 내었다.
스타카토처럼 툭툭 끊어진 음성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혀 꺽꺽대던 엘레나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니 기억해, 엘레나. 기억하라고!!! 내가 네 어미란 말이다!!!”
황후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마치 제 새끼를 잃은 어미 곰처럼 크게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엘레나는 꺽꺽거리며 소낙비 같은 눈물을 흘렸다.
머릿속은 아노미 상태에 이른 것처럼 무질서했다.
원심 분리기에 뇌를 넣고 빠른 속도로 빙빙 돌리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지 그랬니. 응? 왜 자꾸, 왜, 무엇 때문에.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냔 말이다!!!”
황후는 구겨진 종이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목을 긁는 소리가 시끄럽게 귓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살려줘, 살려….”
끼이익-
그때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둔탁한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
누군가 온 것이다.
이윽고 기사들은 재빨리 몸을 틀어 날카로운 검을 꺼냈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황후 폐하.”
일순간 방 안을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화가 난 듯해 보이지만 그 온화한 음성의 주인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에이든….”
“황자께서 여긴 어떻게.”
황후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악독한 마녀처럼 섬뜩했다.
“우리의 추억이 많이 담긴 곳 아닙니까.”
에이든은 비소를 흘리며 칼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무시무시한 두 기사를 앞에 두고도 괘념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했는데 이런 짓까지 하고 계실 줄이야.”
그가 칼을 몇 번 휘두르자 기사들은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순간 욕조에 담긴 물은 새빨갛게 변했다.
“역겹습니다.”
에이든은 쇠고랑을 부숴 엘레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품에 폭삭 안긴 몸은 여전히 잘게 떨렸다.
“그 손 놓으시지요.”
황후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화가 난 듯 이를 악문 모습이 독살스러웠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황자.”
에이든은 귀라도 먹은 듯 황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를 둘러업고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노아, 지금 네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황후는 이를 으드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무서운 표정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