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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76화 (76/117)

76화.

“황궁은 이런 곳이구나….”

거대하고 웅장한 석조 건물들의 집합소.

제국의 강대함을 물씬 느낄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입장료라도 내고 구경해야 할 것 같은 규모였다.

“데카루스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직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걱정이다.

그렇게 불안해 하는 모습은 또 처음 봤는데.

자꾸 눈앞에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이거 말고 방법이 없었는걸.”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애꿎은 돌을 발로 찼다.

드레스 차림이라 그런지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굽 높은 구두라니.

이런 건 한국에서도 잘 신지 않던 건데.

걷다가 삐끗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야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발목이 아팠다.

아무래도 벤치에 앉아 구두를 벗고 있는 편이 낫겠다.

“살 것 같네.”

꼭 전족이라도 한 것처럼 발가락이 아팠다.

이래서 하이힐이 건강에 안 좋다는 건가 보다.

이따가 만찬 때는 신발을 벗고 있을 수도 없고 어떡한담.

“몰래 벗고 있을까….”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이든…?”

분명히 에이든이었다.

이 넓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친구는 멀리서도 통하는 건가 보다.

엘레나는 손을 붕붕 흔들며 그를 반겼다.

그러자 그는 경악하며 더 빠르게 뛰어왔다.

“너 대체….”

에이든은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하긴 그는 입궁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엄청 긴데.”

엘레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이든은 마른세수를 하며 그녀를 일으켰다.

“이리 와.”

갑자기 끌고 가는 바람에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걸었다.

뭐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보단 훨씬 편하긴 했지만.

그렇게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에 도착하자 그는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가 대체 왜 여기에 있어?”

“폐하께서 날 딸 같다고 양녀로 들이겠대.”

“뭐?”

에이든은 마치 혀라도 씹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어쩔 수 없었어. 카루스가 죽을 뻔했거든.”

“하, 대체 무슨 소린지 똑바로 말해.”

“아니, 황궁 마차가 지나가길래 난 너인 줄 알고 뚫어져라 쳐다봤지. 근데 황후 폐하셨어. 그래서….”

엘레나는 오늘 있었던 자초지종을 전부 말했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 갔다.

“이럴 때가 아니야. 너, 당장 여길 떠나야 돼. 이리 와.”

“내가 떠나면 카루스 입장만 난처해져. 입궁은 내가 한다고 했어.”

“너 진짜 제정신이야?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에이든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화가 나 보였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엘레나. 제발, 제발 말 좀 들어.”

에이든은 손을 잡고 급하게 그녀를 끌고 갔다.

덕분에 다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것만 같았다.

“아파, 에이든. 살살 좀…!”

“거기.”

그때 저 멀리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고개를 빳빳이 세운 황후가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색깔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 주변엔 시녀들과 호위병이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황자가 이곳엔 어쩐 일로.”

“제,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에이든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황후는 개의치 않는 듯 싱긋 웃으며 부채를 쫙 폈다.

“우리 카일라 양과는 무척 친근한 사인가 봅니다.”

그는 낯선 이름 때문인지 잠시 침묵했다.

맞잡은 손은 전기라도 흐르듯 파르르 떨렸다.

“모르는 자입니다. 단지 침입자로 보여….”

“침입자라뇨. 어엿한 내 양녀인데. 그렇지 않나요, 카일라.”

“아, 네. 네….”

양녀라는 말에 당황한 엘레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황후는 입에 댄 부채를 거두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이만 별궁으로 가지요. 오늘 특별히 카일라 양을 위해 신경을 좀 썼습니다.”

황후는 엘레나의 반대편 손을 잡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황자.”

“못 데려가십니다.”

그는 사슬처럼 손을 꽉 죄었다.

절대 놓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허, 지금 이 황후의 명을 거스르겠다는 뜻입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또 아까처럼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

“무례합니다. 놓으십시오.”

엘레나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에이든마저 잘못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엘레나는 뒤를 돌아 황후의 옆에 섰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다 말해주리라 다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황자가 너무 과민 반응을 했군요.”

황후는 잡은 손을 꽉 쥐며 입을 뗐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손을 통해 흘렀다.

“네, 괜찮습니다. 폐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을 챙기는 것이 어미의 도리 아닙니까. 당연한 일이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황후는 정말 엄마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아까 미처 신지 못한 구두를 직접 손으로 신겨주기도 했다.

이상한 건 분명 놀랄 만한 일인데 시녀와 호위병들은 꼭 나무 인형처럼 계속 표정을 굳히고만 있었다.

기묘한 느낌이 엄습해 왔지만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다.

“와….”

도착한 별궁은 무척 아름다웠다.

밖이 훤히 보이는 기다란 창에선 햇빛이 따사롭게 들어왔고, 마치 식물원에 온 듯 아기자기한 푸른 식물들이 궁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또 새하얀 식탁과 의자 그리고 화분이 깔끔함을 더해 오밀조밀 예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양쪽에 배치된 거울은 금테로 둘러싸여 고급스러움을 더해주었다.

“작은 정원같아요….”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이 황후가 직접 꾸민 곳이에요. 우리 딸도 매우 좋아하던 장소였지요.”

황후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살짝 웃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엘레나는 입을 벌리며 천천히 걸었다.

“구경하도록 해요. 아직 음식이 다 준비되지 않은 것 같으니.”

“네….”

엘레나는 간단히 대답을 마친 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창문으로 향했다.

언덕에 위치한 별궁에서 본 외부는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뻥 뚫린 창덕에 아름다운 궁전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커다란 정원과 호수가 길게 늘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게다가 지평선 밑으로 내리는 붉은 태양은 하얀 궁전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더욱 아름다웠다.

“마음에 들어 하니 이 황후도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오도록 하지요.”

엘레나는 고개를 사뿐히 끄덕인 뒤 기다란 식탁으로 향했다.

새하얀 식탁 위엔 작은 화분들과 빈티지한 촛대가 여럿 놓여있었고 그 사이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즐비했다.

“우리 카일라 양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만 준비했어요.”

“가, 감사합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연어 요리가 메인 디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햄과 다진 버섯을 채운 아티초크라니.

한눈에 봐도 정말 먹음직스러운 요리었다.

“저 연어 진짜 좋아하는데….”

엘레나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흐뭇한 얼굴로 얕게 미소 지었다.

연어뿐만 아니라 조갯살을 넣고 끓인 수프와 구운 랍스터와 전복, 블랙올리브가 곁들여진 파스타까지.

해산물의 나라답게 전부 해산물로 이루어진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들어요.”

엘레나는 예절 선생과 제인에게 배운 대로 기품 있게 칼질을 했다.

한자리에서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다니.

이것만큼 떨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리 딸은 연어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카일라 양도 연어를 좋아한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군요.”

황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따님과 공통점이 많은 게 신기하네요. 꼭 진짜 딸인 것처럼….”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스푼을 내려놓았다.

일순간 안색이 흐려져 무언가 잘못했나 싶었다.

불안한 마음에 엘레나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황후 폐하,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황후는 침울한 표정으로 손등을 들어 입을 막았다.

“폐하….”

“한 번만,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나요.”

“네?”

당황한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지금 엄마라고 불러달라고 말씀하신 건가?

“아니, 아니에요.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아, 아닙니다……. 엄마….”

황후는 기쁜 듯 눈물을 흘리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맑은 미소였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이날을 기념해서 잔을 들지요. 카일라 양, 술은 좀 하는지요.”

“네, 네.”

황후는 앞에 놓인 와인 병을 들며 일어났다.

순간 데카루스 앞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날이 떠올랐다.

말은 이렇게 하고 또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자, 그럼.”

황후는 와인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순간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무릇 법도에 따르면 나이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술을 따라야 하는 법.

그것도 황후인데!

“제, 제가 따르겠습니다. 폐하.”

“아니에요. 이 황후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답니다. 염려치 말아요.”

“아, 네….”

엘레나는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자리를 지켰다.

검붉은 포도주가 투명한 와인잔에 깊게 채워졌다.

이러고 있으니 꼭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만 같았다.

황후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자, 그럼 우리의 첫날을 기념하며.”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엘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잔을 높이 들었다.

황후는 그에 답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잔을 마주 들었다.

“이 황후의 딸이 되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네, 그럼.”

허공에 잔을 부딪친 뒤 천천히 와인을 음미했다.

포도 주스와는 달리 쓰고 단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와인이 굉장히 맛이 좋네요.”

“당연하지. 약을 탔으니 맛이 좋을 수밖에.”

“…네?”

엘레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약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일까.

황후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멍청한 것.”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닌 악마의 것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표정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황후는 우아하게 턱을 괴며 입매를 초승달처럼 올렸다.

“잘 자렴, 엘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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