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당신 대체 지금 무슨 소릴…!”
깨끗한 이마에 주름이 잔뜩 졌다.
늘 예뻤던 눈동자가 불온하게 흔들리고, 불그스름한 입술 또한 파르르 떨렸다.
“나 괜찮아, 카루스.”
“아니, 절대 못 가.”
“카루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황궁에 간다고 뭐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닐 테고.
또 에이든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엘레나는 위병들의 팔을 뿌리치고 그를 안았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별일 없을 거야.”
“안 돼, 못 가….”
짙은 숨소리에서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깨에 묻은 얼굴이 잘게 움츠러들었다.
바람에 나부대는 데카루스의 검은 머리가 뺨을 간질였다.
“다녀올게.”
엘레나는 싱긋 웃으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최대한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니까.
그에게 다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
“데카루스, 정신 차려!”
이삭은 개처럼 달려들려는 데카루스를 막아섰다.
그는 마치 탈옥이라도 하려는 죄수처럼 몸부림쳤다.
붉은 시선이 그녀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그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눈길을 돌렸다.
멀리서는 울부짖는 비명만이 난무했다.
“출발하지.”
황후의 명령과 함께 말이 우렁차게 울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돌길을 내달렸다.
들썩거리는 리듬에 따라 심장이 빠르게 움직였다.
제국의 제2권력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다니.
엘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일라 양이 이렇게 선뜻 입궁을 택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황후 폐하의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덕분에 이 황후는 기분이 몹시 좋습니다.”
황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긴장감에 침조차 마르는 것 같았다.
“카일라 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 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천애 고아로 살아온 자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대공의 약혼녀라면 분명 작위 높은 귀족일 터.
“카나리아 제국 델피온 공작가의 여식입니다. 스큘러스 공과는 올해 인연을 맺었습니다.”
“올해라….”
기다란 손톱을 매만지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외교 문제로 몇 번 카나리아에 간 적이 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더군요.”
“맞습니다….”
카나리아엔 가본 적도 없다.
아는 거라곤 매일 마시던 칸나티밖에 없는데.
엘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는 척 대답했다.
“우리 에스텔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군요. 워낙 식생활이나 기후가 다르니.”
“아, 아닙니다. 전부 마음에 듭니다, 폐하.”
“그럼 다행이군요.”
마차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건 딱 질색이라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황후가 다시 입을 뗐다.
“스큘러스 공이 우리 카일라 양을 참으로 많이 아끼더군요.”
“아, 네….”
순간 부끄러워 바보같이 얼굴이 확 붉어졌다.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입가에 살짝 진 잔주름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먼 타국에 이렇게 어여쁜 딸을 보낸 부모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요.”
“…….”
“나는 오래전에 딸아이를 잃었어요. 참 착하고 씩씩한 아이였는데.”
황후는 순간 상념에 빠진 듯 말을 잃었다.
창문을 바라보는 시선엔 음울한 슬픔이 가득했다.
“장차 나라를 이끌 황태녀였답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아이였지요.”
“…….”
“한데 그 아이가 모래처럼 제 손에서 빠져나가더군요.”
“무슨….”
“바다에 간 날이었죠. 한눈판 사이 금세 아이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 분명 꿈에서 본 듯한 기분.
바다에서 분홍 머리를 한 여자가 제 딸에게 소리치는 장면.
왜 갑자기 그게 생각나는 거지.
“폐하….”
황후는 순간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엘레나는 허둥지둥 원피스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곤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카일라 양.”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는 가녀려 보였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생경했다.
“아, 카일라 양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황후는 감정을 애써 누르려는 듯 보였다.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낮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서운 호랑이 같았는데 지금은 꼭 여린 사슴 같다.
“아까 무례했던 이 황후를 용서해요. 내 딸이 생각난 나머지 그만….”
그녀를 다시 보니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사나운 겉모습에 여리고 소녀 같은 마음이 가려져 있는 게 아닐까.
“황후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진짜 딸은 아니지만 폐하께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카일라 양.”
황후는 긴 손톱이 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난로처럼 따듯한 손길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식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혹독한 시련이라니.
정말 이 세상에 신은 없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장장 두 시간을 달려 황궁에 도착했다.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기에.
황후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제 일처럼 공감해 주었다.
꼭 오래된 친구처럼 친숙한 기분이었다.
“그럼 카일라 양. 우리 시녀들이 카일라 양이 머물 궁을 안내해줄 겁니다. 루비궁과 가까우니 언제든 놀러 오도록 해요.”
황후는 긴 팔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예, 황후 폐하.”
황후가 사라지자 시녀들이 그녀를 궁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처음보는 황궁이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고 익숙했다.
꼭 예전에 와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거 아닐 거야.”
엘레나는 개의치 않고 궁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궁전은 대공저보다 더 화려했다.
높다랗게 뻗은 기둥엔 세로로 홈이 파여 울퉁불퉁했고, 그 위 네모난 공간에는 나뭇잎이 조각되어 입체감을 주었다.
또 지붕처럼 크게 뻗은 페디먼트에는 날개 달린 아기 천사들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무슨 박물관도 아니고….”
꼭 유럽 여행에서 봤던 궁전을 옮겨다 놓은 것만 같았다.
그 화려함에 입이 쩍 벌어져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카일라님, 도착하셨습니다.”
방 안은 아이보리색 벽지에 연한 핑크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고 그 주위는 모두 금테로 둘러져 있었다.
연분홍색 커튼은 꼭 제 머리카락 색처럼 어여뻤다.
물론 침대와 캐노피, 책장 같은 가구들은 전부 하얀색이었다.
“근데 이곳에 다른 분은 안 계신 거야? 조용하네.”
“이곳은 카일라님 전용 궁입니다. 황족을 제외하고 카일라님 허락 없이 아무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아….”
이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궁에서 혼자 산다니.
꼭 진짜 공주님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걸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들이 낯설지 않다.
“나 변했네….”
겨우 길거리를 떠돌던 집시가 이런 귀한 대접이라니.
잠시 괴리감이 느껴져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괜히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따가 황후 폐하와의 저녁 만찬이 있습니다. 먼저 옷을 갈아입으시죠.”
“옷?”
옷이 금세 더러워진 건가?
하긴 아까 흙바닥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내가 알아서 입을게. 신경 쓰지 마.”
대공저에서도 처음에 시녀들이 옷을 입혀준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다 큰 성인인데 이런 것쯤이야 혼자 할 수 있다고.
“그 옷은 황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분의 드레스가 있으니 그 옷으로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드레스?”
“예.”
생각해 보니 아까 황후의 복식도 화려한 드레스였지.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
그냥 도망갈까.
“그, 그건 이따가 입을게. 지금은 쉬고 싶어.”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카일라님. 편히 쉬십시오.”
“응, 고마워.”
* * *
대공저, 집무실.
복도에는 남자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단단히 잠긴 문밖까지 들릴 만큼 그 소리가 우렁찼다.
“놔. 이거 당장 놔, 이삭!!!”
데카루스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죄수 같았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이대로는 못 놔.”
“명령이야. 명령이라고. 이삭 에이브런….”
붉은 눈엔 공허함이 가득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초점이 흐렸다.
“넌 진짜 친구 잘 둔 줄 알아. 나 아니었음 너 이미 맞았어.”
“엘레나, 엘레나가 위험해. 당장 마차를….”
그는 꼭 자동응답 인형처럼 그녀의 이름만 중얼거렸다.
진절머리가 난 이삭은 참다못해 그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 좀 해!!!”
“…….”
“너 진짜 미쳤어? 잘못하면 네가 죽을 뻔했어. 엘레나를 지키긴커녕 둘 다 죽을 뻔했다고.”
하지만 데카루스는 그에 개의치 않은 듯 입술을 꽉 물었다.
“그딴 건 상관없어…. 죽어도 차라리 내가 죽어.”
“너 진짜…!”
“황후가 또 엘레나를 죽이려 들 거야….”
이삭은 답답한 듯 깊게 들이켠 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마치 강의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무슨 권리로 대공의 약혼녀를 죽여. 만약 그런다 해도 황후 역시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어. 이건 파벌 간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그럼 전쟁이야.”
“…….”
“잘 들어. 황후는 똑똑해. 타국에서 온 이름 모를 귀족 영애를 함부로 죽일 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국가적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으니까.”
이삭은 반응 없는 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엘레나도 눈치 빠르고 똑똑하니까 잘 처신했을 거야.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려.”
“…….”
“하, 일단 회의를 소집할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와. 엘레나를 그 악마의 소굴에서 꺼내려면.”
쾅-
말을 마친 이삭은 세차게 문을 닫으며 밖으로 향했다.
결국 소파 위에 혼자 남은 데카루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엘레나….”
이삭의 말대로 황후는 똑똑하고 교활하다.
그래서 아무리 이름과 출신을 속인다고 할지라도 이미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엘레나를 입궁시킨 것이다.
황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인물이니까.
“하….”
이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일인 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사전에 대비해 놨을 텐데.
멍청하게도 일을 그르치다니.
“이대로는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