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시체다…. 나는 죽었다….”
어제 밤새도록 그에게 시달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허벅지 사이가 아리고 가슴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배에는 장미처럼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일어나야지.”
눈을 뜨자 탁상에는 따끈한 수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놓고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마웠다.
엘레나는 뜨거운 수프를 호호 불며 야금야금 먹었다.
창문 밖엔 햇볕이 쨍쨍한 게 놀러 나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나갈까….”
온종일 누워만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 산책을 좀 하면서 몸을 풀어야겠다.
“으챠.”
골골거리는 몸뚱어리를 간신히 일으켰다.
아직 몸이 으슬으슬했지만 걸어 다닐 순 있었다.
“누워만 있으면 뭐 하나. 움직여야지.”
목과 허리를 쭉 뻗으며 스트레칭하자 뻐근한 감각이 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하품을 쩌억, 하며 옷장 앞으로 갔다.
“무얼 입나….”
날이 더우니 연하늘색 원피스가 좋겠다.
소재도 시원하고 색깔도 푸른 하늘과도 어울리니.
그렇게 낑낑대며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향했다.
“거, 날씨 한번 참 좋네.”
햇빛이 너무 좋아 피부가 탈 것만 같았다.
미리 챙 넓은 모자를 챙겨오길 잘했지.
엘레나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모자를 머리 위에 눌러썼다.
연보라색 리본이 바람에 나풀거려 어여뻤다.
“음, 음-”
엘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산책하듯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길가에 핀 노란 해바라기가 꼭 저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
“근데 벌이 왜 이렇게 많아.”
꽃 위에는 꿀벌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윙윙 꽃밭을 날아다니는 소리가 조금 무서웠다.
엘레나는 멀찍이 떨어져 해바라기를 구경했다.
“골골거리는 나보단 너희들이 낫구나.”
열심히 일하는 벌들과 비교하니 스스로가 무지렁이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대공 대리가 끝난 이후부터 이러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자괴감이 드는 것 같다.
“그 자문 위원이란 거 한번 해 봐…?”
어제 데카루스와 식사를 하며 자문 위원에 대한 말이 나왔다.
처음엔 절대 싫다며 징징거렸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좀 끌렸다.
행정관들이 이 엘레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준 게 아닌가.
“음하하.”
엘레나는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듯 깡총거리며 걸었다.
그녀의 주변엔 마치 음표가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정문 앞에 다다랐다.
저택 밖은 별 볼일 없이 평온해 보였다.
“이만 돌아갈….”
그때 저 멀리서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빛 마차가 힘차게 굴러왔다.
엘레나는 손차양을 하고 눈을 찌푸렸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황궁의 마차인데.
설마 에이든이 온 것일까.
“뭐지?”
엘레나는 창살 사이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봤다.
전서구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로 찾아온 걸까.
데카루스와 화해라도 하러 온 것일까.
호기심에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마차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
하지만 창문에 비친 실루엣은 건장한 남성이 아닌 머리를 높게 올린 여자였다.
“아니잖아….”
엘레나는 실망한 듯 풀이 죽어 입을 빼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 창문 너머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응…?”
표독스러운 안광이 맹수처럼 번쩍하고 빛났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듯한 짐승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대공저를 지나던 마차가 빠르게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여러 대의 마차들도 일제히 줄지어 멈췄다.
“뭐, 뭐야?”
기분이 묘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잔데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엘레나는 고개를 빼고 조심스레 밖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지나가던 귀족들은 모두 기겁하며 재빨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대체 누군데….”
“황후폐하 납시오!!!”
특이한 복장을 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황후…?”
겹겹이 레이스와 작은 보석으로 장식된 풍성한 붉은 드레스.
한껏 치켜올린 분홍빛 머리카락.
사나운 맹수를 닮은 독살스러운 푸른 눈.
그리고 그와 대비되어 붉게 빛나는 금장 루비 귀걸이는 보는 사람을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도망가자.
힘없는 동물의 본능이란 게 이런 걸까.
생각할 새도 없이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거기.”
순간 온 주변를 장악하는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음성을 듣자마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무조건 도망가라는 무언의 신호가 들렸다.
“잡아 와.”
“예, 폐하.”
털썩-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린 엘레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피가 빠진 것처럼 힘이 없었다.
팔과 다리, 입술까지 한겨울 추위에 내던져진 것처럼 달달 떨렸다.
끼익-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팔을 다리 삼아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객기일 뿐이었다.
단숨에 잡힌 엘레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거부했다.
“뭐 하는 거야! 놔!!!”
세게 잡힌 팔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강제로 옮겨졌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봤지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탁-
위병들은 그녀를 짐짝 취급하듯 땅바닥에 내던졌다.
덕분에 돌부리에 치인 무릎이 아려왔다.
하지만 고통 따위 느낄 새조차 없었다.
너무 두려워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고개를 들어.”
“…….”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제 기능을 못 했다.
근육을 사용하는 법조차 잊어 버렸다.
“넌 누구지?”
“아….”
거대한 사자 앞에 선 지렁이가 된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꼭 혀가 잘린 사람처럼 혀뿌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엄하다! 황후 폐하께 즉시 답하라!”
그 옆에 선 남자가 호통을 치자 여자는 그를 저지했다.
황후는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보듯 그녀를 구경했다.
“넌 대체….”
“황후 폐하!”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굳었던 몸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데카루스 드 스큘러스가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그는 단거리 달리기라도 한 듯 호흡이 거칠었다.
무릎을 꿇은 데카루스는 바닥에 놓인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호오, 스큘러스 공 아니신가.”
“황후 폐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재밌는 게 눈에 띄어서 말야.”
황후는 허리를 숙여 부채로 엘레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꽤 흥미로운 듯 눈을 위아래로 흘겼다.
“이건 뭐지?”
“…….”
“이건 뭐냐고 물었습니다, 스큘러스 대공.”
“제 약혼녀입니다.”
“약혼녀라….”
황후는 소리 나게 비소를 흘렸다.
입가에 핀 야릇한 미소가 꼭 벌을 유혹하는 꽃 같았다.
“공의 취향은 한결같습니다.”
목을 긁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황후는 목에 들이댔던 부채를 쫙 피며 제 입을 가렸다.
“이전에도 제 딸을 졸졸 쫓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참 귀여웠는데.”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주변을 쭉 둘러보던 황후는 이내 엘레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 딸과 많이 닮았구나.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지.”
“엘….”
“카일라. 카일라 델피온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물은 것이 아닌데.”
입을 떼려는 순간 데카루스가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을 댔다.
그러곤 손을 세게 꽉 잡으며 신호를 주었다.
“카일라 델피온입니다, 황후 폐하.”
엘레나는 떨지 않고 또박또박 제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아무래도 정답을 잘 말한 것 같다.
드디어 한 고개를 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일라라… 참 예쁜 이름이군요. 우리 엘레나처럼.”
익숙한 이름에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엘레나라니.
“그게… 무슨….”
“아, 카일라. 그대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죽은 내 딸 이름이 엘레나랍니다.”
황후는 살갑게 웃으며 손바닥에 부채를 내리쳤다.
잘 접힌 부채는 엘레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관찰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그녀의 얼굴을 구경하던 황후는 이내 말을 이었다.
“나와 같은 머리색과 눈동자라니. 제 양녀로 삼고 싶을 정도입니다. 카일라 양. 그대를 보니 죽은 딸이 무척이나 보고 싶군요.”
“감사합….”
“이미 먼 타국에 부모님이 계십니다. 양녀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후 폐하.”
데카루스는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할 때마다 적당히 말을 잘라주었다.
왜 황후에게 거짓을 고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얌전히 있었다.
“공께선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하십니다. 꼭 뭐라도 들킨 사람처럼.”
황후는 쭉 째진 입꼬리를 들어 올려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엘레나는 힐끔거리며 그녀를 훔쳐보았다.
정말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빼다 박아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얼핏 보니 생김새도 비슷한 것 같았다.
“아….”
너무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나 보다.
순간 눈이 마주쳐 당황한 엘레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야한 거라도 보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황후는 피식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 황후는 그대가 참으로 마음에 드는데.”
“…….”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카일라 양.”
“소, 송구하오나….”
황후와 가는 건 죽어도 싫었다.
왠지 모르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예쁜 인형이 되는 것이 싫었다.
또 데카루스와 떨어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황후는 부채를 활짝 펴며 뒤로 돌아섰다.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본디 황족이라면 자기 멋대로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지금 당장 입궁시켜.”
“황후 폐하!!!”
착각이었다.
황족은 정말 제멋대로였다.
데카루스는 목울대가 터져라 소리쳤다.
이렇게 격정적인 모습은 처음 봤다.
아, 이거 정말 큰일 난 거구나.
“황후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건 말도 안 되는…!”
“내 하늘 아래 말이 안 되는 건 없어, 스큘러스 공.”
그녀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위병들이 다가왔다.
그들이 팔을 잡으려 하자 데카루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절대, 절대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그러자 뒤늦게 이삭과 은색 갑옷을 입은 위병들이 줄지어 섰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치 상황에 황후는 코웃음 쳤다.
“지금 이 황후에게 도전하는 겁니까.”
“그녀를 놔주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황족에 대한 도전, 그것도 황후에 대한 도전이라니.
그것도 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 일이 커져 버리다니.
이대로는 오히려 데카루스가 황궁에 끌려갈 판이다.
또 저번 탄신 연회처럼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입궁하겠습니다, 황후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