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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72화 (72/117)

72화.

“무슨 일인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마차를 탄 지 벌써 1시간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문만 바라보고 있다.

“하. 진짜 대체 뭐야….”

답답했다.

싸우면 싸웠다고, 일이 생겼다면 일이 생겼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걸까.

“그래, 나도 말 안 해.”

엘레나는 팔짱을 낀 채 창문을 바라보았다.

입술은 삐죽 튀어나와 제 불만을 토로하는 듯했다.

“…….”

누가누가 더 오랫동안 말 안 하나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저 밖에 있는 새들이 더 말을 많이 할 테다.

오늘따라 짹짹거리는 저 녀석들이 얄미운 이유는 뭘까.

“기대했었는데….”

엘레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까지 여행은 많이 다녀봤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지부터 유명한 관광지까지.

뭐 일상이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이번엔 다른 때와 달리 기대가 되었다.

“당신이라서….”

에이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해서 그런 걸까.

그냥 그와 대공저를 벗어나 새로운 걸 한다는 게 즐거웠다.

바다도 구경하고 물고기도 잡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었는데.

“휴….”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표정으로 창문만 바라보는 그는 꼭 조각상 같았다.

꼭 말 못 하는 석고상이랑 함께 마차를 탄 기분이랄까.

어색한 공기만 맴돌던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뭘?”

엘레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뭘 숨겼다는 것일까.

하여간 질문을 해도 똑바로 하는 법이 없어.

“참나, 뭘 숨….”

“에이든.”

쥐덫에 걸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몸 한구석이 찌릿한 게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목구멍엔 자물쇠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탄식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종이 위에 그의 이름 석 자가 까맣게 번졌다.

“무, 무슨….”

노아가 에이든이란 걸 알아챈 것일까.

대체 어떻게?

설마 아까 얘기하다가 들킨 건가?

아니, 에이든이 제정신이었다면 들킬 리가 없어.

엘레나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입 안은 침이 마를 새가 없었다.

“…….”

그가 찬찬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춘다.

여느 때보다 더 시린 눈빛에 온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바싹바싹 마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당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코끝에서 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 비소가 흘렀다.

잘게 떨리는 입꼬리엔 쓴웃음이 맺혔다.

입술을 달싹이던 엘레나는 어쩔 줄 모른 채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

“나, 난. 그냥. 일부러 그런 건….”

표정 변화 없던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초점 없는 눈빛은 상념에 빠진 사람처럼 희미했다.

“어떻게… 알았어….”

“들었어. 에이든을 찾던 당신 목소리.”

피아노의 맨 왼쪽 건반을 누른 듯 무거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깊은 심연처럼 짙고 어두운 음성이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당신이 노아 품에 안겨 울더군.”

설마 탄신 연회 날을 말하는 것일까.

그때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던 건가.

바보같이.

“아….”

기억이 새벽 너울처럼 휘몰아쳐 온다.

‘에이든….’

‘괜찮아. 진정해.’

‘어떡해. 카루스가 죽으면 어떡해, 에이든….’

공과 사를 구별 못 한 채 정신줄을 놓았던 것이다.

“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

“나도 몰랐어. 에이든이 황자인 줄. 난 그저…. 그저 숨겨야겠다고만 생각해서…! 그래서!”

데카루스는 그저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저를 응시했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입에서는 기계 같은 변명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미안….”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참신한 변명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의 화를 더 돋울 뿐일 테니까.

“미안해, 카루스….”

그렇게 마차 안은 긴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대공저에 다다르기까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는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빼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길은커녕 손조차 대지 않았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어떻게 하루도 안 돼서….”

제인은 데카루스를 힐끔 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모두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응, 일이 좀 생겨서….”

“대체 무슨 일이길래 대공님 분위기가….”

제인은 아연실색하며 조심스레 짐가방을 들었다.

“아니, 아니야. 들어가자.”

머릿속은 온통 걱정과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걸으면서도 이게 구름 위를 걷는 건지 돌바닥을 걷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에게 대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뇌 세포들이 단체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럼 쉬세요.”

“응. 고마워.”

제인은 짐가방을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아있자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캄캄한 밤이 되어버린 하늘엔 별이 무성했다.

끼익-

그때 노크 하나 없이 천천히 문이 열렸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오싹한 소리가 났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뒤이어 옷장이 열리자 사각거리는 셔츠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엘레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핏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나 먼저 씻을게!”

엘레나는 로켓처럼 튀어나가 욕실로 향했다.

바보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

“하….”

욕조에는 따끈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물에서 어지러이 피는 아지랑이가 꼭 제 마음 같았다.

엘레나는 옷을 벗고 탕에 몸을 담갔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본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은 독약일 뿐이다.

사실을 고하고 용서를 받는 게 가장 옳은 방법이다.

하지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입을 뗄 용기가 없었다.

“그래…!”

순간 뇌리에 박히듯 무언가가 번쩍 떠올랐다.

엘레나는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몸을 씻고 나왔다.

그러곤 옷을 갖춰 입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지하실로 향했다.

밤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여깄다…!”

[와인 저장실]

밝은 달빛이 문에 적힌 팻말을 환하게 비추었다.

환희에 찬 엘레나는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동굴 같은 내부는 외부보다 더욱 캄캄했다.

“그래서 준비해왔지.”

엘레나는 성냥을 꺼내 랜턴에 불을 붙였다.

불을 켜자 석굴암처럼 거대한 저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가 다 씻고 나올 때까지 어서 와인을 찾아야 한다.

“제일 센 거. 먹으면 죽을 만큼 센 거….”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엘레나는 그중 가장 묵직해 보이는 와인병을 들었다.

라벨에는 스큘러스가의 문양과 생산 연도가 진하게 쓰여 있었다.

도수 따위 적혀있지 않은 탓에 뭐가 가장 센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일 비싸 보이는 놈으로 들고 가자.”

엘레나는 작정한 듯 와인 두 병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다람쥐처럼 날쌘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질 뻔도 했다.

끼익-

“하… 아직 안 왔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갔다 오는데 10분도 안 걸린 것 같으니까.

엘레나는 침대를 빙 둘러 티테이블로 이동했다.

“근데 와인잔이 없네.”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두 개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찻잔에 마시는 와인이라니, 퍽 웃겼다.

엘레나는 양초에 불을 붙여 창가 주위와 테이블을 밝혔다.

은은한 노란 불빛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띄웠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나름 완벽한 세팅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진실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털이 곤두섰다.

“괜찮아, 괜찮아…. 좋은 것만 생각하자. 좋은 것만.”

엘레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무슨 사랑 고백을 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이 떨릴 줄이야.

역시 사람이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끼익-

“카루스?”

소리가 나자마자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 끝에는 검은 가운을 입은 그가 젖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방 분위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리 와.”

엘레나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다행히도 그는 군말 없이 졸졸 따라왔다.

어깨에 매단 단단한 팔이 꽤 무거웠다.

“자, 앉아.”

의자를 끌어 끙끙거리며 거대한 몸뚱이를 앉혔다.

그러곤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와인잔이 없어서 찻잔에….”

엘레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따랐다.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며 슬쩍 그의 표정을 훔쳐봤다.

아무래도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같았다.

“그게… 할 말이 있어서.”

엘레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와인 원샷을 때렸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걸 보니 제대로 골랐나 보다.

“미안해!!!”

눈을 질끈 감고 전방에 대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대충 상상이 간다.

분명 돌부처처럼 아무 반응도 없겠지!

“미안해!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 결혼식 날 처음 만났어. 나도 몰랐어! 나도 피해자라고!”

“허….”

조용히 들려오는 탄식 소리에 눈을 살짝 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쩜, 부작용이 생긴 것 같다.

표정이 돌부처를 뛰어넘어 굉장히 좋지 않다.

“정말 미안해!!!”

더 화가 난 걸까.

그는 와인을 들이켜더니 눈썹을 맞붙이며 기침을 토해냈다.

“당신, 대체…!”

어, 근데 갑자기 이상하다.

온 세상이 다 뒤집힌 것처럼 거꾸로 보인다.

몸이 지렁이처럼 흐물흐물하고 눈앞에 별이 막 떠다닌다.

그의 얼굴이 피사의 사탑처럼 점점 기울어진다.

“엘레나!”

탁-

데카루스는 옆으로 쓰러지는 그녀를 간신히 붙잡았다.

덕분에 찻잔이 엎어져 바닥엔 와인이 뚝뚝 떨어졌다.

“하….”

그는 아연한 기색으로 한숨을 푹 쉬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도대체 어쩌자고….”

병을 보니 저건 와인이 아니라 브랜디다.

그것도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 중 도수가 가장 높은.

그걸 단숨에 삼켰으니 쓰러질 수밖에.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 셈이야.”

그는 바람에 살랑이는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마치 잘 짜여진 실크라도 만지듯 부드러웠다.

“화는 당신에게 난 게 아니야.”

그는 손갗이 패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날 만큼 힘을 주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방관한 나 자신.”

“…….”

“스스로가 끔찍해.”

제 부모조차도 지키지 못한 병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또 한 번 소중한 것을 잃을 뻔하다니.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이전의 과오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칼날이 목전에 닿는다 해도.

“당신을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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