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순간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그의 손이 알맞게 끼워졌다.
화들짝 놀란 엘레나는 의자를 밀며 뒤로 물러났다.
“야! 너 뭐 하는 거….”
“왜, 당황스러워?”
에이든은 꼭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해 보였다.
입술을 꾹 누르며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모습이 괘씸했다.
“미쳤어? 네가 무슨 남자친구야. 이 손 당장 빼.”
엘레나는 깍지를 풀어내기 위해 손을 연신 당겼다.
하지만 수갑처럼 죄는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난 하면 안 돼? 형이랑은 다른 것도 하잖아.”
“뭐?”
엘레나는 팔짝 뛰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식당에 있는 손님들이 전부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속삭였다.
“하긴 뭘 해. 나 아무것도 안 했….”
“와, 나보고 거짓말하지 말라던 사람이… 참나.”
에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건…!”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매를 올렸다.
마치 혀를 날름거리며 똬리를 튼 교활한 뱀 같았다.
“하, 됐어. 말을 말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와 그렇고 저런 짓을 한 것도 맞고, 지금 얼굴이 빨개진 것도 맞고, 거짓말을 한 것도 맞다.
엘레나는 민망한 듯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나 소원권 지금 쓸래.”
“소원권? 그게 뭐….”
설마 저번에 소원 들어달라고 한 그걸 말하는 건가?
‘정말로 미안해야 하는 건 나야. 그리고 이렇게 널 찾았잖아. 난 그거면 돼.’
‘그래도….’
‘그럼 나 나중에 소원 들어줘.’
엘레나는 눈썹을 한껏 찡그리며 입을 달싹였다.
“뭔데, 무슨 소원인데.”
“예전부터 꼭 해 보고 싶었던 거.”
“너 설마….”
순간 안 좋은 생각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 에이든도 생각이란 걸 하는 사람이니까.
설마, 정말 오늘 하루 남자친구 하고 싶다는 그럴 일은….
“오늘 하루 동안 남자친구 하기.”
아아, 신이시여.
왜 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것입니까.
왜 항상 저에게 시련만 주시는 것입니까.
“하. 에이든, 그건….”
“응, 말해 봐. 설마 잊었다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지.”
그는 입매를 예쁘게 올리며 눈꼬리를 시원하게 접었다.
이놈도 데카루스랑 똑같은 놈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이야.
아들 두 명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정말 기가 빠진다.
“소원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좀 실용적인 걸….”
“이렇게 실용적일 수가 없어.”
“아니, 솔직히 말이 안….”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하, 그래…. 그래. 알았어. 맘대로 해.”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벌레 보듯 한 표정을 짓자 그는 잘 익은 풋사과처럼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이미 한 약속을 물릴 수도 없고.
또 싫다고 하면 하루 종일 삐져 있을 게 분명하니까.
“자, 여기 연어 초밥, 새우 초밥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렇게 한차례 전쟁이 끝나자 드디어 초밥이 나왔다.
마음속에 돌덩이가 들어차 조금 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은혜로운 초밥님을 안 먹을 순 없었다.
“먹여줘.”
“…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엘레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먹여달라고, 우리 오늘 1일이잖아. 젓가락질도 어렵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먹여달라고?
지금 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맞나?
아님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볼을 꼬집어 보니 아픈 게 확실히 현실이다.
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거야!
“야, 작작 해라.”
엘레나는 활짝 웃으며 눈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배배 꼬며 뭐라 중얼댔다.
“와, 형이랑은….”
“하, 알았어. 먹여줄게. 먹여주면 되잖아.”
소원대로 초밥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술 더 떴다.
“여자친구는 그렇게 안 웃어.”
“하하….”
엘레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곤 젓가락으로 새우 초밥을 집어 그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대체 지금 십년지기 친구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에이든은 여우 꼬리처럼 살랑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기…?”
“응, 자기. 아님 여보라고 할까?”
미쳤나?
진짜 미친 건가?
‘우리 결혼했어요’도 아니고 자기? 여보?
나 몰래 약이라도 먹고 온 건가?
“하하. 빨리 먹기나 하지? 제발…?”
엘레나는 눈과 입에 최대한 힘을 주며 억지로 웃었다.
빨리 이 우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에이든은 초밥을 왕, 하고 물며 초승달처럼 예쁘게 눈매를 접었다.
그렇게 지옥의 초밥집 투어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레나. 이거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하나도 안 어울릴 것 같아. 집에 가자, 어서.”
닭살 돋는 그의 행동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불도저처럼 미친 듯이 직진했다.
“레나, 이것 봐. 우리 이거 반지 맞출까?”
“아니, 돈 아까워. 에이든! 집에 가자니까!”
“왜, 집에 가면 뭐 하려고? 설마 이상한 상상 하는 건 아닐 테고….”
“에이든 밀러!!!”
이 정도면 데카루스를 뛰어넘는 철면피다.
목청껏 소리 지르자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봤다.
하긴 팔짱 끼고 저런 이상한 말을 하는데 안 쳐다볼 리가.
“어? 우리 저거 하자.”
그의 손끝엔 풍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가 보였다.
저건 분명 다트를 던져서 맞추면 선물을 주는 게임인 것 같은데.
하다 하다 진짜 저런 것까지 하게 되다니.
“그래…. 다 해라. 다 해.”
엘레나는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보였다.
누가 툭 치고 지나가면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든은 신이 난 듯 가게 앞으로 가 곧장 다트를 집었다.
펑-
“…뭐야?”
첫발에 가장 가운데에 있는 작은 풍선을 맞추다니.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주변에 있는 가장 큰 상품이 걸린 풍선까지 전부 다 맞춰버렸다.
주인 아저씨를 보니 오늘 장사는 다 했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잘해?”
“껌이지.”
에이든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곰 인형을 건넸다.
“선물.”
“인형….”
어릴 때 늘 인형을 가진 여자애들을 보며 부러워하곤 했다.
한 손에는 인형 그리고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근데 이렇게 예쁜 곰 인형을 지금 품에 안고 있다니.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얼굴엔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고마워….”
“고맙긴.”
에이든은 싱긋 웃으며 오른손에 깍지를 꼈다.
“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응? 어딜….”
그의 손에 이끌려 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
구불구불한 길에 높은 언덕 그리고 발에 채는 돌까지.
등산로보다 더 험준한 탓에 꼭 등산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헐떡대자 에이든은 잠시 멈춰 섰다.
“발 아파?”
“응, 조금.”
“이리 와.”
그는 그녀의 허벅지와 등에 손을 받쳐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엘레나는 그의 가슴을 치며 소릴 질렀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왜, 남자친구잖아.”
“그래… 맘대로 해라….”
그의 당당함에 완전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포기한 듯 한숨을 크게 쉬자 에이든은 콧바람을 내며 미소 지었다.
땀이 날 법도 한데 그의 피부는 보송했다.
또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매끈한 모발에 긴 속눈썹.
반짝이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금빛 눈동자.
미끄러질 듯 곧게 뻗은 콧날에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꼭 동화 속에나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그냥 새삼 잘생겼다 싶어서. 평생 여자가 안 생기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네가 있는데 누굴 사귀어.”
“아니, 현실에서 말야. 여자가 네 주변에 한 명도 없잖아.”
“네가 있잖아.”
에이든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의 뜨거운 눈 맞춤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 바다…!”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자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가 보였다.
엘레나는 곧장 그의 품에서 내려 절벽 쪽으로 뛰어갔다.
“레나, 위험해. 뛰지 마.”
절벽에서 본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형색색의 집들.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 보이는 광활한 바다.
반짝이는 햇빛을 받아 잘게 부서지는 파도.
저 멀리 넘실대는 수평선에 뜬 하얀색 함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다 향기까지.
“너무 예뻐.”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에이든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런 데는 어떻게 찾은 거야?”
“아주 어렸을 때 한 번 왔었어. 어린 황녀님과 함께.”
“아….”
가끔씩 황녀님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친했나 보다.
문득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어떤 분이셨어?”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입매를 예쁘게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예쁘고 귀여우셨지. 말괄량이였지만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아셨고.”
“아….”
그는 바닷바람에 지저분해진 엘레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키 차이 탓인지 그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어.”
그는 싱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파도처럼 흐르는 손가락 사이로 따듯함이 엉겼다.
“갖고 싶을 만큼.”
“황녀님을 좋아했어?”
애틋한 눈빛 속에 그녀가 담겼다.
햇살처럼 따스한 금빛 눈동자가 푸른 눈동자를 비추었다.
“응. 지금도.”
그의 말에서 해답을 찾았다.
아직도 죽은 황녀님을 좋아하니까 여자친구를 안 사귀고 있었던 것이다.
“너 진짜 해바라기구나.”
“그렇지. 난 한 사람만 보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한 눈빛이었다.
거짓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눈빛.
에이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향했다.
한참 동안 상념에 빠졌던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뗐다.
“황제가 될 거야, 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