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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69화 (69/117)

69화.

에이든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 갔다.

하긴 스킨십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그럴 수밖에.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얼굴을 붉힌 채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뭘 했길래 그렇게 얼굴이 붉어?”

“별거 아니야. 앉아.”

데카루스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엔 ‘짜증 나서 미치겠으니까 좀 꺼져’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래?”

에이든은 눈을 샐쭉하게 뜨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찍 왔네.”

“응, 근데 별로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네. 형.”

그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해맑던지 주변을 환히 밝혀주는 것만 같았다.

“뭐?”

그에 반해 일순간 어두워진 분위기는 공기조차 싸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엘레나의 머릿속엔 빨간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렸다.

“아, 저기. 답답한데 여기 있지만 말고 나가자. 나 심심해. 오늘 바다도 예쁘던데.”

왜 이 형제들은 만나기만 하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걸까.

그 사이에 껴있는 사람 마음도 생각 좀 해달라고!

“당신 나갈 수 있겠어?”

“응, 나 괜찮아. 나도 나가보고 싶어.”

엘레나는 작은 미소를 내뿜으며 빠르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상황이 자연스레 무마된 것 같았다.

“휴….”

아까 우느라 바다 구경을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나가서 보고 싶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엘레나, 울었어요?”

에이든은 이제야 제대로 얼굴을 본 건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네, 전하.”

“왜….”

탁-

에이든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 한 순간이었다.

데카루스는 독수리처럼 에이든의 손목을 세게 낚아챘다.

“아….”

“이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엘레나도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뻔히 다 보였다.

분명 또 질투가 나서 저리 행동하는 것이겠지.

“나가요, 우리. 나 빨리 바다 구경하고 싶어.”

데카루스는 꼭 잡은 손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는 복도를 걷는데 에이든이 옆에 다가오자 그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왔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자갈밭을 걸을 때도 데카루스는 꼭 붙어있었다.

“카루스, 이거 놔.”

“싫어.”

에이든이 듣지 못하게 소곤소곤 말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황소고집 같으니.

어쩔 수 없이 그를 껌딱지처럼 매달고 다닐 수밖에.

“와…!”

강렬한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푸른 바닷가.

쏴아, 쏴아.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부딪치는 파도.

간지럽게 발에 채는 황금빛 모래까지.

정말 완벽한 해수욕장이었다.

“이게 다 당신 소유야?”

“응. 정확히는 스큘러스 가 소유지. 선대 때부터 내려온.”

그는 별거 아닌 것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머리를 넘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조각 같은 얼굴이 꼭 여름 화보를 찍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를 지키고 있던 집사가 달려와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순식간에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꽤나 봐 줄 만했다.

“잠시 나갔다 올게.”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뭔가 나쁜 일이 생겼나 보다.

그가 곁을 떠난다고 하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마치 분리 불안증에 걸린 강아지처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 다녀와.”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을 막을 순 없기에 최대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마음속에 딱딱한 돌이 얹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에이든이 곁에 있으니까.

“다녀올게.”

그는 잘생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엘레나는 뒤를 돌아 에이든을 쳐다봤다.

다행히 못 본 듯싶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눈으론 데카루스를 보며 욕을 했다.

“이따 봐.”

그는 피식 웃더니 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리고 뒤를 돌았다.

“뭐야….”

엘레나는 그가 훑고 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렸다.

하지만 동그란 볼은 앙증맞게 한껏 치솟아 있었다.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던 에이든을 슬쩍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어디 아파?”

“아, 아니. 전혀. 하나도 안 아파.”

당황한 엘레나는 말을 더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그는 증거를 잡는 탐정처럼 눈을 샐쭉하게 뜨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근데 아까 울었어?”

“아… 응. 갑자기 이상한 꿈을 꿔서.”

“꿈?”

“응….”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다시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큼 끔찍한 꿈이.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응, 알았어.”

에이든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새하얀 벤치로 이끌었다.

커다란 파라솔이 쳐진 벤치는 그늘이 져 시원해 보였다.

“아, 시원해. 우리 바다 진짜 오랜만 아니야?”

“그치, 예전에 2년 전인가. 오르페스 공국이 마지막이었지.”

땅덩이가 넓은 에스텔 제국은 2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를 보기가 꽤 쉽다.

그중 아르데오 공국, 오르페스 공국, 레지옹 이스트 공국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

무려 다섯 개의 공국 중 세 개의 공국에서나 말이다!

“그때 네가 나 바닷물에 빠뜨려서 눈에 물 다 들어가고!”

“그러니까 누가 나한테 흙 던지랬냐.”

쪼잔한 새끼.

그거 장난 한번 쳤다고 사람을 바닷물에 갖다 던지고.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는….”

“뭐? 무식해?”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긴…!”

“아, 나 배고파. 밥 줘.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게 점심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배고프지!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뭐, 황자면 다야?”

그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돌리더니 이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좋아!”

이게 얼마 만의 여행인가!

게다가 에이든이랑 함께 있다니.

예전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아, 초밥 먹으러 가자.”

“초밥? 그게 뭐야?”

“제인이 알려준 음식인데 타국에서 들어왔대. 라메르에 식당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별장의 위병은 멀리서 오는 그들을 보더니 헐레벌떡 문을 열었다.

그러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경례를 하며 예를 차렸다.

“아, 저기. 혹시 초밥이란 거 어디서 파는지 알아?”

그는 이곳 사람이니까 초밥 파는 곳을 알지 않을까.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빳빳이 선 그에게 물었다.

“아! 미루! 라는 식당입니다! 여기서 똑바로 10분 정도 걷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의 말투는 특이했다.

마치 군인처럼 말끝마다 힘을 주어 대답했다.

퍽 웃겼지만 그의 직업 정신을 비웃을 순 없었다.

“고마워.”

우리는 그의 말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쭉 걸었다.

길거리엔 활기가 넘쳤다.

남부 지역답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

거리낌 없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고 화려한 복식.

골목골목에서 풍기는 향신료와 가죽 냄새.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있던 수도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나도 가죽 가방 하나 사야겠다. 너무 예쁜데?”

이곳은 가죽공예로 유명한 곳이라 가죽 공방이 많이 보였다.

또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가죽 제품들을 하나씩 걸치고 있었다.

관광까지 왔으니 가죽 가방 정도는 하나 사줘야지!

“그래, 일단 먹고 하자. 너 안 먹으면 또 짜증 낼 거잖아.”

그는 꼭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배고플 때 그에게 짜증 낸 적은 있지만.

뭐, 그렇게 심하게 내진 않았다.

약간의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맞는 말이기에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대체 어딨는 거야.”

“걷다 보면 나오겠지.”

에이든은 현자라도 된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배고파 죽겠는데 마치 관광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아닌가!

“벌써 30분 째야. 걷기 대회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레나, 넌 마음을 좀 차분히 가져. 그렇게 성격이 급해서 대체 어쩌려고 그래?”

“아, 알았어! 시끄러우니까 그만해!”

매번 이렇게 잔소리를 해대는 에이든 탓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시어머니도 아니고 잔소리로는 세계 1등이다.

“어휴….”

에이든은 답답했는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는 듯 당당히 길을 나섰다.

“어? 저깄다! 초밥!!!”

순간 엘레나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초밥에 대한 열정이랄까.

연어 초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엔돌핀이 돌았다.

“뛰지 마. 뛰면 넘어져.”

“네, 네. 알았네요. 황자님.”

그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를 제지했다.

마치 엄마가 아이 보고 뛰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말이다.

엘레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초밥집 간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좋냐.”

“응, 당연하지. 꼭 먹고 싶었다고!”

가게에 들어가자 마치 일식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리는 맑은 종소리라든지, 연등으로 장식된 조명이라든지, 빨간색으로 칠해 놓은 나무 바닥이라든지.

익숙한 풍경에 순간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았다.

“여기 되게 특이하다. 꼭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아.”

“응.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마치 20년 만에 제 고향을 방문한 기분이랄까.

이곳에서 이런 동양적인 분위기를 볼 수 있을 줄이야.

“어서 오세요. 자, 자. 여기 이쪽으로.”

주인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하얀 두건을 쓴 모습 또한 일식집 주방장 같았다.

그는 메뉴판을 주며 음식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주었다.

“저는 연어 초밥이요!”

무조건 연어 초밥이었다.

다른 건 볼 새도 없었다.

“그럼 우리 남자친구 분께서는?”

“네? 남자친구 아니….”

“저는 새우 초밥으로 주세요.”

에이든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야, 아니라고 해야지.”

주인이 떠나자 엘레나는 입술을 앙다물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래도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은 게 기분이 나빴다.

“왜, 남자친구 아니야? 남자인 친구?”

“그거랑 그거랑 어떻게 같냐!”

에이든은 그제서야 이해한 듯 눈썹을 치켜뜨더니 샐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니면, 지금부터 해 볼까?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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