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68화 (68/117)

68화.

“아… 죽고 싶다….”

“어머, 아가씨. 그런 말은 장난으로라도 하시면 안 돼요.”

아직 해가 제 모습을 보이지도 않은 꼭두새벽.

캄캄한 밤하늘이 여전한데 지금 이 시간에 눈을 뜨고 있다.

그것도 즉흥 여행을 가러!

즉흥도 이런 즉흥이 없다.

인터넷도 뭣도 없는 곳에서 정보도 없이 갑자기 여행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짐은 다 챙겨놨으니 몸만 가시면 돼요, 아가씨. 남부 별장까지는 마차로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답니다.”

“다섯 시간?”

다섯 시간이나 걸린다니.

아니, 여긴 붙이는 멀미약도 없잖아.

약은커녕 멀미를 막으려면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망했다.

“네, 그렇게 멀진 않을 거예요. 아, 그나저나 부럽네요. 라메르에 가신다니-”

제인은 양손을 겹쳐 모으며 회상이라도 하듯 허공을 바라봤다.

그렇게 잠깐 공상에 빠진 듯싶던 제인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번쩍였다.

“그곳에 가시면 꼭 초밥이라는 걸 드셔보세요. 도화라는 곳에서 들어온 음식인데 맛이 일품이랍니다.”

“초밥? 여기에도 그런 걸 팔아?”

“어머, 이미 아시는군요?”

초밥이라면 전생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초밥덕후라서 일주일 내내 연어 초밥만 먹은 적이 있었지.

근데 그 신성한 음식을 여기서도 맛볼 수 있다니.

아아, 행복이란 게 먼 곳에 있는 게 아니구나.

“나 갑자기 여행이 즐거워지려고 해, 제인.”

“그러니 재밌게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대공저는 저희가 지킬 테니까요!”

“근데 제인이 보고 싶으면 어떡해?”

엘레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인은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다녀와서 마음껏 놀아요, 우리.”

“좋아.”

배시시 웃음 짓는 그녀의 입술이 앙증맞았다.

“그럼 가요.”

“응!”

제인은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방문을 열었다.

시녀장 일을 하면 힘이 무척 세야 하나 보다.

미안한 마음에 도와주겠다며 짐을 달라고 했지만 제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아무래도 데카루스를 닮아 다들 고집이 센 것 같다.

밖을 나가니 저 멀리 큰 마차 두 대가 보였다.

안개가 조금 껴 잘 보이진 않긴 했지만 마차가 워낙 커서 한눈에 들어왔다.

“근데 마차가 왜 두 대야?”

“하나는 짐마차랍니다. 대공님께서 지시하셨어요. 식재료가 잔뜩 들어있어요.”

“식재료?”

겨우 셋이서 가는데 무슨 짐을 저렇게 많이 준비했담.

밥은 가서 사 먹으면 되는 건데.

요리 파티라도 할 건가.

엘레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마차 앞에 섰다.

끼익-

“뭐야….”

문은 마치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다.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했지만 그 안에는 데카루스가 있었다.

“뭐야, 벌써 타고 있었어?”

“그래, 난 당신이 달팽이라도 된 줄 알았어. 하도 뭉그적거려서.”

“뭐?”

그의 장난에 골이 난 엘레나는 세모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그의 손을 잡자마자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마차에 훅, 하고 올라탔다.

순간 넘어질 뻔한 걸 그가 잘 잡아주었다.

“다섯 시간은 걸린다며?”

“응. 꽤 걸릴 거야. 그러니 자도록 해.”

데카루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치며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리 와, 엘레나.”

“싫어. 난 이렇게 가는 게 좋아.”

그러자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한 엘레나는 이내 말을 더듬었다.

“왜, 뭐. 왜.”

“두 번은 말 안 해.”

“어휴….”

고집불통인 그의 말에 결국 져주는 건 그녀뿐이다.

엘레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잘생긴 입매를 들어 올렸다.

“왜 웃어, 웃지 마. 짜증 나니까.”

“당신이 좋아서.”

이른 아침부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철면피를 쓴 게 틀림없다.

“근데 황자님은?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아침부터 에이든을 만날 생각에 그래도 힘이 났는데.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질 않으니.

따로 가는 건가?

“따로 갈 거야. 지금쯤이면 출발했겠네.”

데카루스는 또 시작된 에이든 얘기에 짜증이 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자. 또 잠 못 잤다고 칭얼대지 말고.”

그는 손을 들어 엘레나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딱딱하면서도 푹신한 그의 품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눈을 감자 따듯한 손이 눈 위를 덮었다.

“근데 왜 맨날 눈을 덮어주는 거야?”

“어머니께서 매번 이렇게 해주셨어.”

“어쩐지 효과가 좋더라.”

툴툴대려고 말한 건데 어머니께서 해주셨다니.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어?”

“…응.”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목소리가 더 낮아진 걸 보니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는 걸까.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평생 만날 기회조차 없던 엄마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조금 부러웠다.

“졸리다…. 잘래.”

“그래, 잘자.”

* * *

금사로 베일을 짠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모래.

흰 거품이 잘게 이는 시원한 바다.

적당하게 내리쬐는 태양 볕과 그리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날씨.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

벌써 마차에서 내린 건가.

근데 왜 나 혼자 바다에 있는 거지?

데카루스는?

“어마마마, 어마마마!”

“가! 어서 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어마마마!”

누구야, 뭔데 애를 저렇게 거칠게 다뤄.

가서 말리기라도 해야… 어?

꿈인가? 왜 뛰는 느낌이 안 들지?

“어마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어마마마!”

“당장 가! 더 이상… 더 이상 오지 마….”

분홍 머리를 한 작은 소녀와 그 어미로 보이는 듯한 젊은 여자.

차림새와 말투를 보아하니 황족인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애를 막 대하는 거야.

가서 말릴 수도 없고.

“왜 이러는지 그 이유만 알려주세요…. 어마마마, 엄마…. 제발요….”

“이유? 이유! 이유!!!”

짝-

“어마마마…. 대체 왜….”

“네가… 네가 날 잡아먹을 거라고 하더구나, 엘레나. 쓸모없는 것…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제발!!! 죽어!!!”

* * *

(뉴토끼_지나가던 행인 직작_뉴토끼 이외에서 받았다면 유출된거)

“허…! 허억. 허억…!”

엘레나는 눈을 뜨자마자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그녀는 고개를 잘게 떨었다.

“엘레나.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달리는 마차 바퀴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놀란 듯한 데카루스의 음성.

그래, 분명 꿈이었다.

꿈인데 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하지?

꼭 직접 겪었던 일처럼.

게다가 엘레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이상한, 이상한 꿈을 꿨어. 바다에서 어떤 여자가 막 자기 딸을 막 죽이려고…!”

“…….”

“근데… 근데 이상해. 둘 다 머리카락도 분홍색이고 눈도…. 눈도 파란색이었어. 꼭 나처럼. 또 이름도….”

“엘레나.”

그는 긴 팔을 뻗어 순식간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른 품에 안긴 엘레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나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심장이 찢어질 것 같지?”

“엘레나, 괜찮아. 진정해.”

“나…. 나 마음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아. 누가 칼로 날 베어버린 것 같아. 카루스.”

슬프지도 않은데, 아니 오히려 두려운데 눈물이 막 나온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누군가 심장을 난도질해 놓은 듯한 기분이다.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 나처럼 버려졌어….”

“엘레나, 그만. 신경 쓰지 마.”

“죽으래. 당장 사라지래, 카루스… 대체 어떻게 그래? 어떻게 엄마가 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

분명 직접 겪은 일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동정심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야, 이건 마치 예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해.

꼭 꿈이 아닌 것 같아.

“엘레나, 나 봐.”

“나 너무 무서워…. 그 앤 내가 아닌데 꼭 나 같았어. 나 대체 왜 이러지?”

“절대 아니야. 아니야, 엘레나. 괜찮아.”

따듯한 손길이 머리카락에 뒤엉켰다.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던 파도가 그의 손에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나기처럼 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그의 셔츠를 촉촉이 적셨다.

“대공 전하, 도착했습니다!”

그때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말들도 놀랐는지 크게 울었다.

“일단 방에 들어가자. 가서 진정해.”

“응… 응….”

데카루스는 새하얀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를 머리 위에 푹 씌워주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그가 그녀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카루스, 이거 내려…!”

“이따가 내려줄게.”

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버둥거리던 엘레나는 결국 품에 폭삭 안겨 별장 내부로 향했다.

눈이 긴 챙에 가려 별장을 구경하긴커녕 바다 내음조차 제대로 맡지 못했다.

넓은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하얀 침대가 놓여있었다.

오래된 듯 퀴퀴한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관리를 잘한 덕인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데카루스는 방을 빙 돌아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리 와, 엘레나.”

그는 옆자리에 앉아 긴 팔을 뻗었다.

조금 멈칫거리던 엘레나는 천천히 그에 품에 다가가 안겼다.

“카루스….”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길에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버렸다.

별장이 떠나가라 우는 소리가 방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꿈이 생각나 슬프기도 했지만 그의 품이 너무나도 따듯해 눈물이 났다.

진심으로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데카루스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조금 더 진정시켜주었다.

위아래로 들썩이는 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버려졌을까.”

엘레나는 물먹은 솜이 낀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야.”

확신에 찬 그의 대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뗀 엘레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어떻게 알아. 그런지 안 그런지.”

그는 아무 감정 없는 눈빛으로 한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눈물범벅이 된 두 뺨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엘레나는 코흘리개처럼 훌쩍거리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 더 할까?”

자꾸 눈에 채는 붉은 입술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카루스는 예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그의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했다.

달달한 초콜릿을 먹는 듯한 기분에 중독될 것만 같았다.

날을 세운 하얀 이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아….”

목덜미를 감싸 쥔 큰 손은 그녀를 지그시 눌렀다.

그가 거칠게 입 안을 침범할수록 두 뺨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바싹 밀착된 몸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흘렀다.

똑똑-

그때 정적을 깨는 노크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농익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구야.”

데카루스는 조금 짜증 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향한 채로 말이다.

“형?”

끼익-

문이 열리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햇빛에 살짝 빛나는 백금발 머리에 보석을 박은 듯한 금안.

에이든이었다.

“노아…?”

“누가 우는 것 같길래 와봤어. 근데 둘이 뭐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