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렇게 대공 대리로 생활한 지 어언 이 주일.
데카루스는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했고 덕분에 이제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행복한 나날들인가!”
엘레나는 피겨 선수처럼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다니.
자유란 정말 행복한 것이야.
“뭐, 데카루스는 고생깨나 하겠지만.”
그동안 이리저리 잦은 출장 덕분에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무슨 해결사도 아니고 뭐 이리 해결할 일들이 많은지.
또 영지 시찰을 주기적으로 나가 봐야 해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새삼 데카루스가 얼마나 고생하고 다니는지를 알게 되었다.
“휴….”
엘레나는 티테이블로 돌아가 쌓인 편지들을 쭉 훑어보았다.
모두 에이든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2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어서 답장을 보내야지.”
우선 쌓인 편지 중 가장 최근의 것을 골라 들었다.
황가의 문양이 찍힌 실링은 금빛으로 반짝 빛났다.
「엘레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답장이 없어서 걱정돼.
저번에 그렇게 대한 건 정말 미안해.
나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단지 그냥 잠시 화가 났을 뿐이야.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꼭 회신해 줘.」
“어쩐 일로 반성이란 걸 해. 다 컸네.”
엘레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편지를 읽어보았다.
「엘레나,
내일 1시경에 방문하도록 할게.
형에게 서신을 보내도 아무 답장도 없고.
걱정돼서 죽겠어.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엥, 어제 온 편지니까 오늘 온다는 거야?”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곧이잖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냥 친구면 상관없는데 그 친구가 황자라 문제다.
지금 응접실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
게다가 시녀들도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자를 푸대접했다고 황가에 소문이 나기라도 하면!
“안 돼!”
엘레나는 문을 박차고 내려가 1층으로 향했다.
그러곤 남아있는 시녀들을 불러 황자가 온다는 걸 언질하고 응접실에 들어갔다.
“차, 차와 쿠키….”
꼭 알바생이라도 된 것처럼 서둘러 테이블을 꾸몄다.
시녀는 헐레벌떡 케이크를 가지고 뛰어왔다.
어느새 그럴싸하게 꾸며진 응접실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할 일은 황자를 맞이하는 일.
여느 때처럼 에이든은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왔을 테니 긴장을 풀어도 된다.
엘레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마차가 오는지 지켜봤다.
“어, 왔다!”
저 멀리서 보이는 누런 금빛 마차가 제 위용을 드러내며 힘차게 달려왔다.
오랜만에 그를 볼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최근에 바빴던 탓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정말 오랜만이었다.
엘레나는 정문으로 뛰어가 그를 맞이했다.
“전하.”
“영애, 오랜만입니다.”
그는 황자다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난 에이든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뭐야, 머리 잘랐어?”
엘레나는 주위를 살펴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길었던 머리카락이 조금 짧아진 느낌이었다.
“응, 어때. 더 잘생겨진 것 같지 않아?”
“어떻긴 뭐가 어때. 똑같지.”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사실 어색하면 어떡하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역시 우리 같은 사이에서 통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법.
“아, 그리고 미안해.”
표정을 보니 진짜 미안하긴 했나 보다.
여전히 마음만 여려가지고!
“야,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거 가지고 사과하냐. 됐어.”
이렇게 쿨한 친구는 없을 테다.
엘레나는 뒤끝 없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턱을 바짝 세웠다.
“근데 그 말은 유효해.”
“무슨 말?”
“다신 널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거.”
그는 싱긋 웃으며 엘레나의 긴 머리칼을 지분댔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표정을 짓자 에이든은 이내 말을 돌렸다.
“너 분위기가 좀 변한 것 같아. 뭐지?”
“내 얼굴? 다크서클 보여? 나 요새 바빴어. 들어가서 얘기해 줄게. 내 영웅담을 들려주지.”
엘레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즐거워했다.
멋진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뭐, 에이든이 칭찬 따위를 해줄 성격은 아니지만.
“들어와.”
나간 후에도 시녀가 신경을 썼나 보다.
아까보다 테이블이 더 화려해져 있었다.
“무슨 케이크가 이렇게 많아.”
“다 황자가 온대서 이렇게 준비한 거 아니야. 반성해.”
에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뭐가 그렇게 바빴어? 답장도 없이.”
“데카루스가 아프잖아. 그래서 내가 대공 대리로 멋들어지게 일 좀 했지.”
“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엘레나는 다리를 꼬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마치 연설이라도 하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들어 봐, 이 누나가 말야. 델리트에 가서 일로트들을 도와주고, 또 길거리에 있는 고아들을….”
그렇게 엘레나는 한참 동안 자신의 영웅담을 뽐냈다.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그는 잔말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 에이든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타고났나 봐. 역시.”
“응?”
“좋은 혈통은 어딜 가지 않는구나.”
에이든은 입꼬리를 올리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혈통은 무슨.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고안데. 아무튼 간에…!”
그녀는 다시 입에 모터를 단 듯 말을 이었다.
질리지도 않는 듯 신나게 말하는 모습이 귀여운 햄스터 같았다.
“하….”
엘레나는 지쳤는지 쓰러지듯이 소파에 누웠다.
“내 평생 네가 이렇게 말 오래 하는 건 처음 본다. 고막 나가는 줄 알았어.”
“시끄러….”
녹초처럼 쓰러진 그녀는 테이블에 있는 쿠키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그러자 에이든은 쿠키를 빼앗으며 선생님처럼 손가락을 들었다.
“누워서 먹으면 소 된다. 일어나.”
“아, 싫어. 내 마음이야. 내놔.”
엘레나는 물고기가 된 듯 쿠키를 잡기 위해 파닥거렸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이씨!”
끼익-
“둘이 뭐 해.”
쿠키를 잡으려 몸을 벌떡 일으킨 순간 문이 열렸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서슬 퍼런 눈빛을 한 데카루스가 보였다.
그 자세로 굳어버린 엘레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 좀 쳤어. 웬일이야?”
데카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엘레나의 옆으로 와 앉았다.
“노아가 왔다길래. 어쩐 일인가 해서.”
“형 보고 싶어서 왔어. 걱정되기도 하고. 이제 몸은 괜찮아?”
“진짜 걱정됐으면 그 전에 찾아왔을 텐데.”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차가운 말투에 응접실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찬바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 왜 그래. 걱정된다고 찾아온 사람한테….”
엘레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를 쿡쿡 찔렀다.
분위기 좀 파악하자는 신호였다.
“형이 크게 실망했나 보다. 미안. 미리 찾아오지 못해서.”
사람 좋은 에이든은 내색하지 않고 넌지시 사과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엉망진창이 되어 엘레나가 중재에 나섰다.
“자, 자. 그건 그렇고 뭐 하다가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왜, 더 늦게 와주길 바란 건가.”
그는 딱 봐도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엘레나의 손과 발이 바빠졌다.
“하하, 하하하…. 자, 당신 이거 먹어.”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 안에 쿠키 두 개를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입을 막아버려야지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당신이 날 이 정도로 사랑할 줄은….”
“자, 자! 더 먹어.”
이번엔 작게 잘린 조각 케이크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말을 못 하게 입을 콱 막아버렸다.
덕분에 조금 조용해진 응접실엔 적막이 감돌았다.
“자,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엘레나는 머쓱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어쩐지 에이든의 표정도 어두워진 것 같았다.
머릿속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자, 자…. 아! 우리 여행가는 건 언제 가?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데카루스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번 주는 안 돼. 일이 많이 쌓였….”
“그럼 둘이 다녀올게. 형이 그렇게 바쁘다면.”
“아니, 그냥 일을 미루지. 내일이라도 괜찮아.”
“그래, 그럼 내일 가자.”
두 남자는 랩이라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왠지 모를 두 사람의 신경전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저기. 내일은 너무 이른….”
“아니.”
두 남자는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며 합창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시종을 시켜 짐을 준비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나도 궁에 돌아가 떠날 채비를 해야겠어. 시간은 충분해.”
단호한 그들의 말투에 엘레나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아, 그래… 그럼….”
“이만 나가지.”
데카루스는 엘레나의 손에 깍지를 끼고 일어나 앞장섰다.
덕분에 엘레나는 보따리처럼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일순 에이든에게 인사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고개를 돌려 입 모양으로 내일 보자는 말을 전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노아는 내가 배웅할 테니.”
“아, 응….”
엘레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계단을 올랐다.
“휴….”
분명 우애 좋은 형과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친동생처럼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왜 요새 들어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한지 모르겠다.
“나 몰래 어디서 싸우기라도 했나….”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쁜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방으로 가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끼익-
“제인, 와 있었네?”
“아, 네. 방 청소 좀 하느라.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힘들어 보이세요.”
“아….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할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꿀꺽 삼켜버렸다.
해 봤자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하리라.
엘레나는 이내 싱긋 웃으며 옷장을 열었다.
“제인, 나 내일 여행 가는데 준비하는 거 도와줄래?”
“어머, 여행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라메르!”
“어머나!”
제인은 본인이 여행 가는 것처럼 신이 나 보였다.
콧노래를 부르더니 이윽고 옷장 위에서 커다란 짐 가방을 꺼내 들었다.
“뭐부터 챙길까요? 옷?”
“응, 사실 옷 빼고 챙길 것도 없어.”
어차피 나머지는 데카루스가 다 준비할 테니까.
이 얼마나 호화스러운 여행인가.
원래 여행이라 하면 터질 것 같은 캐리어 때문에 개고생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몸만 가면 되니까!
“자, 그럼 예쁜 옷을 골라드릴게요. 아가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