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이삭, 물러서. 내가 해결할게.”
병사들에 둘러싸여 보호만 받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꿀잠을 자야 하기에.
엘레나는 위병들을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뭐지.”
“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얼굴도 반반한데 머리까지 좋아.”
사내는 싱긋 웃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엘레나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무엄…!”
“이삭.”
엘레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여기서 달려든다면 무력 진압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자리를 옮기실까요, 레이디?”
리안드로는 우스꽝스럽게 귀족 흉내를 내며 예를 표했다.
이삭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런 도발은 겨우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했다.
“단, 레이디 혼자서만.”
리안드로는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혼자서는 너무 위험…!”
“됐어, 다녀올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일을 처리하고 말 테다.
감히 단잠을 방해한 결과가 어떨지 똑똑히 알려주지.
엘레나는 이를 파득 깨물며 그를 따라 다 부서진 농가로 향했다.
“꽤 아늑하다고.”
“퍽이나.”
리안드로란 자는 이 상황에도 조금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앞서가던 리안드로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한 번만 웃어주면 안 될까? 웃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난 당신이랑 노닥거리러 온 게 아니야. 협상 조건이나 말해.”
“까칠하셔라.”
농가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나무로 만든 집은 전부 불에 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또 집 근처엔 불에 그을린 냄새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앉아.”
리안드로는 새카맣게 변한 의자를 내주었다.
원래부터 키작은 의자였던 건지 불에 타 작아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말해.”
“난 레이디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말해.”
남자는 질렸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일순간 표정을 굳혔다.
“난 동생을 잃었어.”
“…뭐?”
잃었다면 동생이 죽었다는 말일까.
엘레나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일로트들은 아마 한 명씩 다 제 가족을 잃었을 거야.”
그는 고개를 떨구며 이를 악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델리트. 이곳은 지옥이야. 엿 같은 법은 개나 주라지. 여기 일로트들은 매일 매를 맞고 살아.”
사내는 소매를 걷어 시퍼렇게 든 멍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의 몸엔 멍뿐만이 아니라 검붉은 피딱지들도 보였다.
“이게 무슨….”
에스텔의 노예 제도는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
일로트, 즉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로 그 의무를 다하며 주인 또한 일로트에게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폭행을 가하거나 과로를 시킨다면 그건 제국법상 불법이다.
“귀하신 황제 나리께선 이 사실조차 모르시겠지.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으니 말야. 영주도 한통속이야. 그 새끼 밑에서 죽어난 노예만 해도 손으로 꼽을 수도 없어.”
리안드로의 말에 엘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매를 맞는 노예라니.
이곳에 오래 살면서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심지어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도 태어나자마자 노예는 아니었어. 평범한 농부였지. 하지만 바테일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고 동생과 이곳으로 건너왔어.”
“바테일 왕국….”
어느 날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바테일 전쟁이라면 꽤 많은 사상자를 배출한 전쟁이다.
핸드 캐논의 도입으로 역사상 가장 연쇄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엔 모두가 잘해줬어. 불쌍하다고 여겼는지 밥도 잘 챙겨주고 깨끗한 숙소도 제공해주더군. 하지만 그건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였어.”
“…….”
“그 이후론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었어. 일을 못 하면 매를 맞았어. 죽을 때까지. 본보기라며 그렇게 내 여동생이 죽어갔지.”
“어떻게 그럴 수가….”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델리트에 있는 농장을 전부 불태웠지. 이 억울함을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가족 그리고 일로트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폭동이라.
아니, 이것은 폭동이 아닌 혁명이다.
단순히 지방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국가적으로 알려야 할 사항일 테다.
분명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을 테니.
“전부… 사실이야?”
“그래, 나도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고. 젠장.”
그는 마지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튜닉 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팔이 나뭇가지처럼 떨려왔다.
마음이 저렸다.
가족을 잃은 슬픔 따위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모습은 한없이 가여웠다.
“일어나. 영주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엘레나는 울고 있는 리안드로의 손을 끌고 폐가를 나섰다.
저 멀리서 이삭과 위병들 그리고 영주의 모습이 보였다.
영주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행, 행정관님. 이게 대체 무슨….”
그는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봤다.
“네 입으로 말해, 리안드로.”
“영주는… 일로트에게 폭행이 가해지는 걸 방관했습니다. 우리 일로트는 단지 이 끔찍한 악행을 세상 밖에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희는, 저희는 억울합니다.”
“네,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영주는 기함하며 리안드로에게 손을 올렸다.
탁-
엘레나는 영주의 손을 쳐내며 비소를 흘렸다.
“원래 손버릇이 나오는군요, 영주.”
“무,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그냥 저 일로트 놈이…! 네 놈, 어디서 거짓을 고해!”
“거짓이 아닙니다. 오랑쥬 숲에 가면 사람들의 사체와 계약서가 함께 묻혀있을 겁니다.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쇼.”
리안드로는 커다란 눈물방울을 툭툭 떨구었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삭, 이자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고 영주를 체포해. 나머지는 대공저로 돌아가서 의논하지.”
“분부대로.”
그녀의 말이 끝나자 위병들은 영주를 둘러쌌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랑쥬 나무 밑을 파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정관님….”
리안드로는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일어나, 리안드로. 너도 해야 할 일이 있어. 넌 이 소식을 알리고 무리를 해산시켜. 반발하는 자도 있겠지만 그것도 우두머리인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겠지. 널 믿어.”
“예,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허리를 숙이며 굽실거렸다.
“여기! 시체가 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엘레나는 오랑쥬 나무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이상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실상은 더 끔찍했다.
새카맣게 변해버린 피와 아직 썩지 않은 머리카락과 살점이 시체에 엉겨 붙어있었다.
“윽….”
처음 보는 참혹한 광경에 구역질이 나왔다.
“아가씨, 물러나 있어.”
이삭의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난 엘레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체들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영주를 체포할 거야. 이제 곧 돌아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응….”
이삭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곤 마차를 빠져나갔다.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 번에 뭉쳐졌다.
이렇게 암암리에 일어나는 참혹한 일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사각지대에 놓인 자들의 인권은 대체 누가 책임져 주는가.
“하아….”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
밖에서는 영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마치 돼지 멱이라도 따는 것처럼 끔찍한 울음이었다.
“아가씨, 괜찮아?”
“응, 응. 괜찮아….”
언제 들어왔는지 이삭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자. 집으로.”
* * *
대공저, 집무실.
일이 끝나자마자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데카루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몸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그냥 갈까….”
문 앞에서 망설이던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쉰 뒤 손을 들었다.
똑똑-
“들어와.”
짙고 어둡지만 따듯한 목소리.
들으면 잠에 푹 빠져들 것 같은 목소리.
엘레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카루스, 나 왔어.”
“늦었네.”
데카루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 맡을 두드렸다.
이리로 오라는 신호겠지.
엘레나는 쏟아지는 미소를 참으며 그에게로 향했다.
“이리로 와.”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은 그녀가 언짢은 듯 표정을 구겼다.
“나 씻지도 않았어. 바깥 먼지를 잔뜩….”
“괜찮아. 이리 와. 안고 싶어.”
엘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목에 두른 얇은 케이프를 벗어낸 뒤 침대 위로 올라갔다.
“됐어?”
“응.”
그는 곧바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따끈따끈한 이불과 그의 몸에 몸을 맡기자 고단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 너무 힘들었어.”
“힘들었어?”
“응.”
그는 이마에 입술을 진하게 맞추었다.
그리고 눈과 코, 뺨을 천천히 타고 흘렀다.
“고생했어.”
그의 말에 엘레나는 배시시 웃었다.
가족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전생에서는 항상 일이 끝나면 집에 아무도 없었는데.
위로받을 친구도 반려동물도.
근데 지금은 마음속을 채워주는 무언가가 생긴 기분이다.
“하, 일로트들이 어찌나….”
“일 얘긴 나중에 해.”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간지러움에 눈을 꼭 감자 그는 조금 더 깊이 들어왔다.
두터운 살이 치열 사이사이와 입천장을 끈적하게 훑었다.
그의 타액이 입가 주위를 빠르게 적셨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자 그는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겼다.
마주 닿은 단단한 가슴 사이로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얇은 슈미즈를 어깨 밑으로 끌어당겼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쇄골에 찬 기운이 돌았다.
“하….”
그는 슈미즈 뒤에 달린 단추를 천천히 풀어 내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제 그만해. 당신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시끄러웠는지 다시 입을 막으며 원피스를 걷어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얀 살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만, 카루스. 정말 안 돼.”
엘레나는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다 낫기만 하면. 그땐 정말 각오해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