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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65화 (65/117)

65화.

엘레나는 티테이블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깃펜을 마구 움직여가며 삐뚤빼뚤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간다.

“이 정도면 되겠지?”

허공에 쪽지를 든 엘레나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자, 어서 가서 에이든에게 전달해줘.”

엘레나는 전서구의 발목에 종이를 매달아 묶어 창문으로 날려 보냈다.

어제 그렇게 가버린 게 영 찝찝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밥은 먹었는지.

안부라도 전달받고 싶었다.

“그럼 이젠 휴식을 즐겨볼까!”

아침부터 긴장한 탓에 온몸 마디마디가 아프다.

근육이 놀란 건지 뭔지 아무튼 침대에 눕고 싶었다.

엘레나는 다이빙하듯 침대에 뛰어들었다.

“아, 이게 행복이지.”

폭신폭신한 침대가 솜사탕처럼 부드럽다.

얼굴을 막 비비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양털처럼 몽글몽글한 게 꼭 침대 광고라도 찍는 것 같다.

“행복해….”

엘레나는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에 흠칫 놀랐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행복하다고 말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하….”

엘레나는 돌아누우며 천장화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손을 들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행복해 보이는 천사들이 하늘을 부유하고 있다.

“행복해 보여….”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자신을 늘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는 행복을 찾으려 애썼다.

슬퍼도 밝은 체하고 어려워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이상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에이든과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

포근하고 아늑한, 제 집을 찾은 기분.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엘레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하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따스한 햇살도 시원한 바람도, 모든 게 완벽해.

그래, 이제 이렇게 잠에 푹 빠지면….

똑똑-

“하….”

고요한 방을 울리는 노크소리에 흠칫 놀라 깨버렸다.

감히 이 엘레나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마침 잠이 들 뻔했는데!

“들어와.”

엘레나는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휴식을 방해한 게 불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끼익-

“아가씨, 급하게 회의가 잡혔습니다. 다시 회의실로…!”

“뭐?”

* * *

대공저, 회의실.

“자,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엘레나는 비몽사몽한 채로 회의실에 입장했다.

내부엔 모두 식곤증에 걸린 듯한 행정관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예, 그,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이걸 꼭 여기까지 와서 말해야 하는 건가.

무릇 치안국의 국장이라면 치안국에서 해결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데카루스는 이런 자들을 데리고 대체 공국 운영을 어떻게 한 걸까.

그게 왜 매일 서류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그건 치안국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조금 짜증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왜 매번 팀장이 회의에서 신경이 날카로웠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그것이… 일로트1) 측에서 대공 전하를 불러오지 않으면 폭동을 멈추지 않겠다고….”“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사장 불러와’인가.

영주, 국장을 넘어 대공을 부를 배짱이라니.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전하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신 상탭니다. 그러니 브레오 경이 대신….”

“그래서 영애께서 대공 대리로서 델리트 지역에 한번 방문하심이….”

“예?”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며 대번 놀랐다.

아니, 회의 참석은 그렇다 쳐도 업무를 직접 맡으라는 소린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출장이라니!

“저는 그럴 능력이 없는데요. 이건 경께서….”

“아닙니다, 영애. 영애께서는 이미 저희만큼, 아니, 저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이건 저 말고 다른 행정관들도 이미 동의한 사항입니다. 영애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삭을 포함한 다른 행정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당황한 엘레나는 큰 눈을 껌뻑이며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자, 그럼 결정된 걸로? 아가씨는 채비하고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삭은 지루한 듯 기지개를 쭉 펴며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행정관들도 묵례를 하며 유유히 자리를 떴다.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은 엘레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열린 문만 바라보았다.

“하….”

* * *

“아가씨!”

저 멀리서 이삭이 손을 들고 인사를 한다.

하지만 지금 영 인사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엘레나는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가씨, 근데 머리색이 바뀌었네?”

“응. 카루스가 외출 시 꼭 가발을 쓰래서.”

그녀의 얼굴엔 꼭 우환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걸 지켜보던 이삭은 이내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니, 아가씨 얼굴이 왜 이래! 기운 좀 내!”

“너 같으면 기운이 나겠어? 난 지금 졸려 죽겠는데 일하러 가야 한다고! 그것도 내 일도 아닌데!”

“아이, 이제 시작인데 뭘. 왜 카루스 눈 밑이 매일 그렇게 까맸는지 알겠지?”

“그래! 알게 해 줘서 참 고맙다!!!”

엘레나는 입술을 댓 발 내밀며 마차에 올라탔다.

구시렁거리는 모습이 꼭 저주를 퍼붓는 듯했다.

“아무튼 조금만 가면 돼.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잠을 자든가 밖을 구경하든가 해.”

새하얀 말 위에 탄 이삭은 창문에 대고 말했다.

한량 같던 그가 오늘은 썩 기사단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빛 건틀릿에 아머, 그리브까지 전부 착용한 그는 꽤 낯설었다.

“그래, 알았어….”

창밖을 구경할 새가 어딨나.

이 졸린 눈 좀 붙여야 망할 영주 놈 멱살을 붙잡을 힘이라도 나겠지.

엘레나는 창문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럼, 출발하지.”

이삭의 함성에 따라 마차와 호위가 함께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요람처럼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비싼 마차라 그런지 흔들림이 적었다.

뭐 이곳에서 버스나 기차 같은 걸 기대하면 안 되니까.

“에휴….”

그렇게 엘레나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살짝 훑고 지나갔다.

숲을 지나는 동안은 푸르른 녹음의 향이 진하게 났다.

새들의 아름다운 합창과 개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누군가 몸을 살살 흔들었다.

“…가씨.”

“…….”

“아가씨!”

“어…?”

눈을 뜨자마자 투구를 올려 쓴 이삭의 얼굴이 보였다.

엘레나는 아직 눈도 못 뜬 아기 고양이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벌써?”

“응, 영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꼴이 꽤 웃겨. 나와서 봐봐.”

영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엘레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 뒤 졸린 눈을 비비고 밖으로 나섰다.

“아이고, 영애. 이제야 오셨습니까.”

놀랍게도 마차를 나서자마자 영주처럼 보이는 작자가 빌빌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기세였다.

그 모습에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치레는 그만하고 일단 문제 되는 장소로 안내해 주시죠.”

“예, 예!”

키 작은 영주는 울먹거리며 그녀 앞에 섰다.

움직이는 꼴이 꼭 작은 쥐 같은 게 귀여웠다.

“일로트 놈들이 어찌나 난폭하던지. 농장을 다 때려 부수고 있습니다! 저희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는 일로트의 악행을 묘사하려는 듯 짧은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

그 모습이 퍽 웃겼지만 입술을 눌러 꾹 참았다.

그렇게 영주의 연극을 보며 일로트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세상에….”

상황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했다.

농장에 있는 포도나무는 모두 불타 황무지가 되었고 건물들은 전부 부서져 벽돌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자국은 물론이거니와 타고 남은 잿더미와 코를 찌르는 탄내가 이곳저곳에 가득했다.

인기척이 들리자 폐허에서 웬 키 큰 청년이 나왔다.

“뭐야? 이번엔 또 계집이야? 내가 대공 아니면 협상 같은 건 없다고 그랬지!”

계집이라는 말에 신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감히 남녀 평등한 시대에 계집이라는 단어를 써?

“이분은 대공 대리로 오신 행정관님이시다. 예를 갖추도록 해!”

영주는 그녀를 행정관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래도 약혼녀라는 사실은 비밀에 붙여져 있으니 모를 수밖에.

엘레나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 말씀은 잘 알아들었으니 일단 자리부터 옮겨서….”

“우리 대공 나리께선 무서워서 숨으셨나? 어디서 놀다 먹은 계집을 보낸 거 아냐?”

예절 선생님께 배운 것 중 하나는 ‘귀족은 절대로 겉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였다.

항상 우아하고 품위 있게 미소를 유지하라고 하셨다.

그래, 이 멀대같은 놈이 뭐라 하든 웃어야지.

“흥분하지 마시고 일단 대화란 걸….”

“꺼져! 어디서 배워먹지도 못한 게…!”

승무원들이 이래서 힘들다는 거였어.

이런 미친 진상 놈들 앞에서도 항상 웃어야 한다니.

엘레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뒤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그러곤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사내는 얼굴이 시퍼레지더니 폭주 기관차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이, 이 미친년이…!”

그가 소리를 지르자 무리로 보이는 자들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주위에 있던 위병들은 위험을 감지한 듯 그녀를 둘러쌌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

“대공을 부르라고 했더니 어디서 저런 계집이 와서…!”

“계집?”

그때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껄렁껄렁하게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이삭은 곧바로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어 그를 위협했다.

“신분을 밝혀라. 이 이상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리안드로. 천박한 노예라 성은 없고. 내가 여기 우두머리다.”

1) 일로트 : 노예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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