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렇게 된다면 황후께 태후의 자리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꽤나 괜찮은 거래 아닙니까.”
“제 어미를 버리고 내게 태후의 자리를 넘겨준다라…. 내가 여태까지 황자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황후는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송골송골한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그저 물러터진 개새끼인 줄만 알았는데, 이 정도로 당돌할 줄은 몰랐습니다.”
“칭찬이라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황후는 들이켰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래, 좋아요. 황자께 힘을 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거짓이라면 그땐 정말 폐하의 목숨을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원, 무서워서 장난이라도 칠 수 있겠습니까. 황자, 이 황후는 거짓말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들이밀었던 단도를 거두고 그녀의 앞에 다가가 섰다.
검붉은 피가 목을 타고 황후의 드레스를 적셨다.
“황자, 아니 차기 황제와 이 황태후가 만들어 갈 에스텔이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노아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영원의 제국 에스텔에 무한한 영광이 깃들길.”
* * *
대공저, 회의실
엘레나는 지금 큰 고민에 휩싸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행정관들과 마주칠 테다.
상상 속의 그들은 흡사 뿔이라도 달린 도깨비의 모습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빈맥이 올 것만 같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엘레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산모들이 라마즈 호흡을 하듯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할 수 있어. 할 수 있…!”
“아가씨? 거기서 뭐 해. 들어가지 않고.”
“이삭?”
“자, 자. 어서 들어가시죠. 벌써 10시가 지났어!”
“아! 자, 잠깐!!”
이삭은 억지로 등 떠밀며 그녀를 회의장 안으로 욱여넣었다.
끼익-
“안녕하십니까, 헬리오스 영애!”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우렁찬 외침에 엘레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름 아닌 행정관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뿔이 달린 도깨비라고 생각했던 행정관들은 모두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놀란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절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 따위 다 잊어버린 상황이었다.
“아가씨, 이리로.”
“아, 응….”
이삭은 그녀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엘레나는 쭈뼛거리며 게처럼 옆으로 걸었다.
그녀가 안내받은 의자는 다른 의자와는 달리 더 우람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럼 대공 대리께서 오셨으니 회의를 개시해 보도록 하죠.”
조용했던 회의장은 순식간에 열기를 띠었다.
행정관들은 각자 전달받은 회의록을 보며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상대편의 발언에 이의가 있으면 즉시 손을 들고 반박하기도 했다.
“최근 살레 지역에 불법 어선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민들의 피해가 막심하다고요! 이걸 그냥 넘어가자뇨!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하지만 그걸 막았다간 국가적인 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델 경. 어차피 경제적인 부문에서의 손실은 미미합니다.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엘레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각 부문의 행정관들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만 보니 한국에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맞습니다, 지금 당장은 살리코크1)를 못 먹는다는 것 빼고 큰 문제 될 게 있습니까?”
“하…!”
깐깐하게 생긴 행정관의 언사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순식간에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논점이 모두 귀족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평민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저기… 죄송한데요. 그럼 어민들은 뭘 먹고 사나요?”
“예?”
당황한 행정관이 안경을 들었다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당연히 경들은 살리코크 말고도 먹을 게 많으니까 상관없을 텐데. 살레 지역민들에겐 주식이 살리코크예요.”
살레로 여행을 갔을 때 한동안 배 터지게 새우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에이든한테 새우 냄새가 난다고 타박을 준 적도 있었지.
또 살레의 특산품인 살리코크는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제적 도구이기도 하다.
만약 이대로 불법 어선을 방치한다면 살레민들은 쫄쫄 굶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에 타격이 없겠죠. 하지만 살리코크는 살레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에요. 듣기로는 타국에서도 인기가 매우 좋다고 하던데요.”
“그, 그건….”
“이렇게 계속 불법 어선이 죽치고 있으면 수출 길도 막히지 않나요? 더 이상 살레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 아니게 되잖아요.”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만델 경은 옳다구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영애의 말씀도 맞지만…!”
“지금 전 영애가 아니라 대공 대리로 왔어요. 즉, 결정권은 제게 있다는 말이죠. 경께서는 더 이상 발언권이 없습니다.”
반대표를 던지던 행정관들은 당황하며 입을 달싹였다.
덕분에 장내에는 싸한 기운이 퍼졌다.
“만델 경, 그럼 대책을 이야기해 보죠. 생각해 둔 게 있나요?”
그러자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자신 있게 외쳤다.
“예, 영애. 우선은 중앙 정부에 안건을 올려 주 불법 점거국인 카나리아와 외교적 타협을 보는 방법으로 해결할 계획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좋아요. 그럼 부탁해요, 만델 경.”
탕, 탕, 탕-
엘레나는 전방에 놓인 의사봉을 들어 의사봉대를 세 번 쳤다.
사실 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멋있을 것 같아서 쳐봤다.
“그럼 다음 안건을 들어보도록 하죠.”
이윽고 초록색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행정관이 입을 열었다.
“최근 델리트 지역에서 노예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근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델리트의 영주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그 서신 좀 잠시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꾸준히 제국어를 배워온 결과 이제 어려운 단어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서신은 이제 누워서 떡 먹기다.
「친애하는 치안국 브레오 경께.
안녕하십니까. 브레오 경.
최근 노예 폭동 사건으로 이렇게 서신을 보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일로트2)들이 단체로 파업을 하고 나섰습니다.
델리트에 있는 공장들을 전부 때려 부수고 불법 점거하며 거기서 일하던 평민들까지 인질로 사로잡은 상황입니다…….」
“이건 좀 심각한 상황 아닌가요? 영주는 대체 뭘 한 거죠?”
“…….”
무릇 영주라면 영지를 다스리기 위한 기본 소양이 필요하다.
한데 이 일을 초장에 잡지 못하고 질질 끌어 본회의까지 끌고 오다니.
아무래도 자질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브레오 경은 당장 델리트에 사람을 보내세요. 가서 상황 파악하고 정리해서 내일 신단 회의 때 보고 하도록 하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행정관은 고개를 바짝 숙이며 즉답했다.
경제국부터 치안국까지 전부 안건을 들어봤으니 오늘은 회의가 끝인 셈이다.
“오늘 안건은 다 끝난 거죠? 그럼 이쯤에서 마치도록 할게요. 모두 수고하셨어요.”
엘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행정관들은 전부 따라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이를 본 이삭은 재빨리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아가씨!”
“이삭?”
이삭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가씨, 대단한데? 첫 회의부터 이렇게 압도할 줄이야. 카루스보다 나은 것 같아.”
“이게 다 짬밥이라는 거야.”
오랜만에 받아보는 칭찬에 콧대가 한껏 올라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 너무 멋있었던 것 같다.
떨지도 않고 행정관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회의를 이끌어 가다니!
뭐, 전생에서 하도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얻은 내공이긴 하지만 말이다.
엘레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다잡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멋있었어. 놀랄 만큼.”
이삭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세게 비볐다.
덕분에 예쁘게 땋은 머리가 새집이 되었다.
“이삭! 뭐 하는…!”
“그럼 내일 또 봐. 멋진 아가씨.”
엘레나는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멋있었다고….”
* * *
대공저, 집무실.
“카루스?”
엘레나는 회의가 끝나고 곧장 그를 보러 집무실로 향했다.
회의실과 집무실은 가까운 거리기에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엘레나.”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늘은 좀 더 나아졌는지 웬일로 침대에 일어나 있었다.
“좀 나아졌나 봐? 그렇게 몸을 일으킬 정도면.”
“응. 덕분에.”
“뭐야….”
그가 덕분에, 라는 말을 하는 건 처음 들어봤다.
아프더니 사람이 순해진 건가.
엘레나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훑어봤다.
“이리 와.”
데카루스는 거기 서서 뭐 하냐는 얼굴로 침대 맡을 툭툭 쳤다.
“아냐, 어차피 나갈 거야. 곧 점심이잖아.”
“이리 와, 엘레나.”
저 아집은 아파도 고쳐지지 않는구나.
아주 사람 말을 한 번에 들은 적이 있어야지.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됐지.”
“응.”
데카루스는 그녀를 번쩍 들어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순간 공중부양을 하는 듯한 느낌에 비명이 터졌다.
“미쳤어? 그러다 상처 부위라도 벌어지면!”
“상관없어.”
어깨를 타고 내려온 기다란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끈적한 그의 목소리에 얼굴엔 살짝 열기가 올랐다.
“당신은 나 안 보고 싶었어?”
그는 찬찬히 손을 내려 치맛자락을 어루만졌다.
허벅지에 닿은 손가락이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회, 회의 잘 끝냈어!”
엘레나는 말을 돌리며 허벅지에 있는 손을 쥐어 잡았다.
피식, 하는 콧바람이 귓전을 맴돌았다.
앙큼한 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치마 속을 파고 들어갔다.
“잘 끝냈어?”
“응….”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고막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온몸에 있는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귀, 관자놀이 그리고 뺨을 타고 내려와 목에 닿았다.
“이, 이삭이 칭찬해 줬어…. 회의장을 내가 압도했다고. 그리고 안건도 내가 멋들어지게 처리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도 내리고, 또….”
모터를 단 것처럼 입이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자랑을 하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마구 설레었다.
꼭 부모님께 전교 1등 했다고 자랑하는 기분이랄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잘했네, 기특해.”
데카루스는 목에 진하게 키스를 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응?”
“잘했다고.”
참으려 해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그녀의 두 뺨에 예쁘게 보조개가 팼다.
무언가를 잘해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도 원장님은 늘 당연하게 여기셨으니까.
공부든 일이든, 뭐든 잘하는 게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에 나가서도 아득바득 노력했지만 결국 인정받는 건 자신이 아닌 껍데기뿐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빛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응달에 머물러 있던 존재였다.
열심히, 뭐든 잘하는 ‘나’만이 양달에 놓여있을 뿐.
“잘했어, 엘레나.”
1) 살리코크 : 붉은 새우의 일종
2) 일로트 : 노예를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