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찬 바닥에 앉아 있던 탓인지 허리가 찌릿찌릿 아팠다.
엘레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털었다.
“후….”
쨍쨍한 해가 하늘을 하얗게 비출 때부터 붉은 노을이 지기까지.
멍한 상태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수많은 생각들이 구름처럼 뇌리에 떠다녔다.
“에이든….”
엘레나는 천천히 창문 쪽으로 향했다.
마차가 없는 걸 보니 금세 돌아간 모양이지.
“무사히 잘 돌아갔을까….”
이 와중에 에이든이 걱정됐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오늘따라 괜스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질투심이 많은 아이도 아니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왜 그랬냐고 꼭 물어봐야겠다.
똑똑-
예상치 못한 소음에 생각 고리가 툭 끊겼다.
시간을 보니 저녁때가 다 되었구나.
“들어와.”
시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가씨,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카루스가?”
의구심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분명 집무실에서 식사할 터인데.
왜 갑자기 부르는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예.”
쾅-
엘레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치맛자락이 조금 구겨지긴 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
엉킨 머리칼은 진주조개로 만든 상아색 빗으로 차분히 빗었다.
“나쁘지 않지?”
그녀는 제 모습에 만족스러운지 거울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가 곧장 2층으로 향했다.
복도는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야?”
고소하고 기름진 향이 풍기는 걸 보니 이건 분명 생선 굽는 냄새였다.
“제발 연어였으면…!”
생선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연어다.
부드럽고 담백한 그 맛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한국이었으면 연어 덮밥을 먹었을 텐데.
“쌀을 어디서 못 구하나….”
고슬고슬한 밥 위에 부드러운 연어가 놓인 상상을 하노라면 천국으로 날아갈 것만 같다.
“연어 초밥도 맛있는데….”
침을 꼴깍꼴깍 넘기며 즐거운 상상을 할 무렵 발걸음은 어느새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엘레나는 조용히 노크하며 문을 열었다.
끼익-
“왜 불렀어?”
고개를 빼꼼 내밀자 침대에는 아까보다 안색이 좋아진 그가 앉아 있었다.
베드 테이블 위엔 가지런히 차려진 음식과 물 한 컵이 놓여 있었다.
“보고 싶어서.”
“참나.”
그는 한 치의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보고 싶다는 말에 왜 심장이 떨리는지.
부정맥이라도 생긴 걸까.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대 옆으로 향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나 배고프니까.”
“나 아직 아파.”
“응, 알아.”
그는 아프다는 말만 남긴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얼굴에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던 엘레나도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창문 밖에서는 애석하게도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게 끝이야? 나 간다?”
“아프다고.”
엘레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보기엔 저보다도 멀쩡해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걸까.
까마귀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크게 울어 젖혔다.
“아파서 먹질 못하겠어.”
“그럼 시녀를….”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행동과 언어에 대한 수천 가지의 빅데이터를 분석하자면.
“설마 먹여 달라는 건 아니지?”
데카루스는 정답이라도 맞춘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
그의 말도 안 되는 생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릇 성인이라면 성숙한 인간으로서 처신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다친 곳이 팔도 아니고 등이다.
“알아서 먹어. 팔은 안 아프잖아.”
“아파.”
“하….”
그와 말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엘레나는 두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분명 머리 아플 때 좋은 혈 자리가 이곳이렷다.
“당신이 애야? 애도 아니고 대체 왜 이래.”
“…….”
그는 돌부처처럼 가만히 앉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사리가 쌓일 것만 같았다.
“아오, 알았어! 먹여주면 되잖아. 먹여주면!”
참다못한 엘레나는 쿵쾅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분명 죽고 나면 극락왕생 할 것이다.
이렇게 덕을 쌓는데 신도 저를 어여삐 여길 테다.
엘레나는 숨을 고르게 가다듬고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고기 수프를 가득 퍼 그의 입 앞에 갔다 댔다.
“먹어.”
그는 군말 없이 입을 벌렸다.
꼭 아기 새에게 먹이를 건네주는 어미 새가 된 것 같았다.
“묻었어.”
뭔 말인가 하고 보니 그의 입술에 수프가 살짝 묻어있었다.
엘레나는 ‘참을 인(忍)’ 자를 가슴속에 새기며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홱 돌리는 게 아니겠는가.
얼토당토않은 그의 행동에 헛바람이 나왔다.
“또 뭐 하자는 거야?”
“그거 말고.”
일순 거센 악력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침대 위 테이블이 덜커덕거리며 흔들렸다.
“아…!”
순식간에 눈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보석을 닮은 듯한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뭐 하는…!”
당황할 새도 없이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입가엔 촉촉한 수프 자국이 찍혔다.
고소하고 달큰한 맛이 입 안으로 퍼졌다.
“이렇게.”
순간 정신이 번뜩 든 엘레나는 손으로 입술을 마구 닦았다.
“미쳤어? 갑자기 이러면…!”
그는 죄책감 따윈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게 아니겠는가.
괘씸함에 거대한 풀떼기를 그의 입 안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그는 그게 뭐 별거냐는 듯 얄밉게 잘도 받아먹었다.
“당신이 먹여주니 더 맛있는 것 같아.”
이런 여유까지 부리면서 말이다.
그는 마치 휴양지에라도 놀러 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남의 속은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당신 표정이 안 좋아.”
“당신 같으면 좋겠어?”
“응.”
인내심 측정기가 고장이 난 것 같다.
마음속에 몰아치는 소용돌이가 수위를 넘어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린다.
안 그래도 에이든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이 남자까지 왜 이러는 걸까.
“내 팔자야….”
“당신 팔자가 왜.”
“아니야. 먹어….”
이번엔 빛깔 좋은 연어구이를 작게 썰어 그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칼질을 할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근데 아깐 무슨 얘기 한 거야.”
“얘기?”
“응, 노아랑. 기다려도 안 오길래.”
“아….”
갑자기 그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간 가슴속은 물먹은 솜이라도 들어찬 것처럼 답답해졌다.
“별 얘기 안 했어. 그리고 피곤해서 올라가서 좀 잤어. 어제 잠을 못 자서.”
엘레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 없었다.
데카루스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지켜봤다.
“왜, 왜.”
“그냥.”
눈가를 간질이던 그의 시선은 금세 거두어졌다.
엘레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연어를 잘게 잘랐다.
하지만 자꾸 에이든과 있었던 일들이 신경을 거슬렀다.
고장 난 오디오처럼 정지 버튼을 눌러도 또다시 재생되었다.
“아, 그리고 내일부터 당신이 나 대신 회의에 들어가게 될 거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생각들이 잠시 멈추었다.
딴생각하느라 잘못 들은 건가.
방금 회의라고 한 거야?
엘레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의?”
“응. 내가 아침마다 참석했던 신단 회의. 내가 다 나을 때까지 당신이 맡아.”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회의에 들어가라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 회의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
“내가 왜?”
순수한 의도의 반문이었다.
불평 따위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순수한 질문.
“대공 부인이니까.”
그는 당연한 소릴 왜 하냐는 듯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대공 부인이라고?
“나 당신 부인 아닌데?”
“그럼 ‘예비’라고 해두지.”
엘레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당연시 여겨지는 이 상황에 혼자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잖아. 왜 하필 나….”
“대공 부인 역시 이 아르데오의 주인이야. 그 누가 감히 내 공석을 채우겠어.”
그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갑자기 다른 귀족을 불러다 세워 놓고 회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공 비가 대공 대리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일 테다.
“아니, 근데 나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여기 역사나 경제도 제대로 모르고….”
부끄럽게도 이곳에서는 배운 게 없다.
한국에서야 공부를 곧잘 하고 이름깨나 있는 학교에 다녔다고 하지만 이곳 사정까지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지 않아.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잖아.”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겨우 춤추고 노래하던 집시 주제에 고위 귀족들이 참석하는 회의에 들어간다니.
가서 입만 벙긋거리며 병풍 노릇이나 할 게 뻔하다.
“이삭이 옆에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삭이 옆에 있는다고 해도 전부 모르는 사람들일 텐데.
또 평소 그를 보면 빈둥빈둥 놀러 다니는 게 딱히 회의에 도움을 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 동의한 사항이야. 다들 당신을 신뢰한다는 의미지.”
그는 안심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손을 꼭 잡았다.
맞닿은 손등 위로 따듯한 입술 도장이 진하게 찍혔다.
“후… 알았어. 해 볼게.”
한숨을 푹 쉬던 엘레나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뭐든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
가서 뭐든 배워 온다고 생각하고 부딪쳐 보자.
경험은 금화보다도 값진 것이니.
“그럼 회의에 필요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 알려줘.”
엘레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굳은 의지를 표했다.
그녀의 눈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를 응시하던 데카루스는 이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 * *
황궁, 루비궁.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주홍빛 등이 어두컴컴한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춘다.
그 사이를 어둡게 메우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미동조차 없다.
“그래서… 실패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자.”
“급소를 노렸습니다만 아쉽게도 빗나가고 말했습니다.”
귀를 짓이기는 높은 콧소리가 전방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긴 손톱을 가다듬으며 조소를 지었다.
“일부러 놓치신 건 아닌지요.”
“아닙니다, 폐하. 그럴 일은….”
“고개를 들어요, 황자.”
황후는 우아하게 숨을 내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잘해 왔지 않습니까. 그의 어미도, 엘레나도. 한데 뭐가 그리 어려워 망설이시는 겁니까.”
노아는 비소를 흘리며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래, 그의 어머니까지 전부 이 손으로 죽였다.
핏덩이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 따위 이제 두렵지 않다.
하지만.
“폐하께선 여전히 제가 아이로만 보이십니까.”
“그게 무슨… 윽…!”
노아는 빠르게 날아들어 황후의 목에 단도를 들이밀었다.
시종과 병사들을 모두 물린 탓에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엇갈린 실루엣이 황궁 안을 가득 메웠다.
“제가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황후는 배가 찢어져라 호탕하게 웃었다.
목에 칼이 박힐 만한 위험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당당했다.
“이런, 이런. 하룻강아지인 줄만 알았더니 내가 범 새끼를 키우고 있었군요.”
황후는 눈을 흘겨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실로 완벽한 살인귀 같았다.
태양을 담은 듯한 금안에서는 한 치의 떨림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그래서, 황자께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 나라 최고 권력자, 황제의 자리를 제게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