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62화 (62/117)

62화.

어젯밤 그의 미친 소리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너무 정상적인, 아니 정상을 넘어선 그의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아픈 사람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어떻게 그렇게 짐승처럼 입술을 비빌 수가 있는지!

“뭐 물론 먼저 한 건 나였지만….”

이제부터 속지 않으리라 다짐한 엘레나는 다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끼익-

집무실에는 어제처럼 의원과 이삭이 있었다.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을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회복 속도가 이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 봅니다.”

“무식하게 건강해서 그렇지. 사실 이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 아니야?”

맞다.

어젯밤 살펴본 결과 아마 걸어 다니는 건 물론이고 뛰어다닐 수도 있을 테다.

엘레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문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엘레나.”

에라이, 저놈은 눈이 몇 개가 달린 거야.

몰래 지켜보고 나가려고 했더니 금세 들켜버렸다.

어쩔 수 없이 문을 활짝 열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이삭, 안녕.”

이삭은 어쩐 일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어제는 정신이 없었던 탓에 온 걸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회복 속도가 빠르다니까.”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은 개뿔, 너무 멀쩡해서 탈이지.

“다만 상처가 아물기까진 오래 걸릴 겁니다. 생각보다 꽤 깊게 찔렸어요. 급소를 피한 것만 해도 천운입니다!”

의원은 제 평생 이런 일은 처음 본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근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그곳에 첩자라곤 들어올 구멍도 없었는데 말야.”

연회장은 신분 확인 없이 들어올 수 없었다.

게다가 경비를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강화했기에 함부로 출입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급소를 가까이 노릴 정도라면 분명 뛰어난 실력자일 테다.

“아직 조사 중이야. 물증이라곤 나올 만한 실마리도 없어. 너무 깨끗해.”

이삭은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하긴 명색이 대공저의 정예 기사단장인데 그가 지키던 주인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을 테다.

“그만 됐고. 이만 나가지 그래. 엘레나와 할 얘기가 있어.”

보다 못한 데카루스가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나는 할 얘기 없어.”

그녀는 당황스러움에 이삭과 데카루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 짐승 같은 놈이랑 단둘이 있다간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엘레나는 제발 가지 말아 달라는 얼굴로 애처로운 텔레파시를 보냈다.

하지만 이삭과 의원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 돼…!”

쾅-

문이 닫히자마자 방 안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처량하게 남겨진 그녀에게 구원자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왠지 모르게 누군가 뜨거운 레이저를 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레나는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몸을 돌렸다.

“어제 왜 도망갔어.”

그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당연한 걸 물어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 같으면 안 도망가겠어?”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랑 대화하고 있어야 한다니.

“당신 아픈 건 다 뻥이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러곤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죽을상을 하고 쳐다보았다.

“당신은 대공이 아니라 연기를 해야 했어. 아무래도 진로 선택이 잘못됐어.”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정말 연기를 했으면 남우주연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얼굴, 몸, 연기까지 되니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떼돈을 벌었을 테다.

“한국에서 태어났어야 했어….”

“뭘 그렇게 중얼거려.”

“됐어.”

그녀의 마지막 말과 함께 집무실 안의 공기는 더욱이 싸늘해졌다.

어색한 공기 속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거슬렸다.

잠시 공상에 잠겨있던 엘레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제 왜 그랬어.”

“뭘.”

“왜 나 대신… 대신 맞아준 거야.”

반쯤 감긴 나른한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커다란 손은 작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손길엔 온기가 가득했다.

“당신을 죽게 놔둘 순 없잖아.”

“그럼 난…!”

엘레나는 벅차오른 듯 짧게 말을 내뱉었다.

버들처럼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꽉 다문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난….”

그는 콧바람을 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웃음 속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별거 아니야. 걱정 마.”

“걱정하는 거 아니야. 난 그냥….”

똑똑-

귓전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형.”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이든이었다.

문틈 사이로 빼꼼 내민 얼굴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들어와.”

“형 괜찮아? 아, 영애도 계셨군요.”

그의 손엔 화려하게 핀 여름 꽃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머리 색처럼 밝은 노란색 꽃이었다.

“웬 꽃이야.”

“형, 빨리 나으라고.”

에이든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이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그는 사뿐히 꽃을 내려놓았다.

“안 아파? 괜찮아 보이네. 난 형이 정말 죽은 줄만 알았어.”

“이 정도로 죽진 않아.”

데카루스는 입매를 비죽 올리며 조심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그래?”

에이든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침대 옆 탁상에 다가가 빈 꽃병을 집어 들었다.

“이따가 시녀를 불러 꽃을 꽂으라고 해야겠어.”

“아, 제가 하겠습니다.”

엘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상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에 못마땅한 데카루스는 팔을 뻗어 조심스레 그녀를 저지했다.

“됐어. 당신이 할 일 아니야. 앉아있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작은 손이 그의 팔을 천천히 잡아뗐다.

귀여운 고집에 그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그는 맞잡은 손등 위에 살며시 키스했다.

당황한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확 내뺐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네.”

에이든은 눈꼬리와 입꼬리가 만날 정도로 활짝 웃었다.

눈부신 태양처럼 환한 미소였다.

“꼭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자린 없는 것 같아.”

그의 발언에 순간 집무실 내부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데카루스와 엘레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밝은 분위기가 가라앉자 에이든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장난이야, 장난. 뭘 그렇게 살벌하게들 봐.”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분위기에 에이든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엔 씁쓸함이 묻었다.

“내가 괜히 분위기만 망친 것 같네. 갈게. 형은 몸 잘 챙기고.”

에이든은 곧바로 뒤를 돌아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황자님…!”

순간 그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나는 곧장 발걸음을 틀어 그를 쫓았다.

하지만 일순 익숙한 손길이 팔목에 감겼다.

“엘레나.”

“잠깐, 잠깐이면 돼.”

엘레나는 잡힌 팔을 털어내고 곧바로 에이든을 따라갔다.

쾅-

“전하…!”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에 에이든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있었다.

“영애?”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팔목을 잡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

끼익-

마침 2층 복도 맨 끝 방이 비어있었다.

손님방이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조용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엘레나는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왜 그래?”

“뭐가?”

“아까 그 소리 뭐 하자는 거야. 하마터면 분위기 정말 이상해질 뻔했어.”

엘레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는 이제야 이해가 갔는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그게 왜? 뭐가 잘못됐어?”

“…뭐?”

“맞는 말이잖아.”

그의 얼굴과 말투엔 반항심이 가득했다.

따지듯이 말하는 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사춘기 소년을 대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엘레나는 불만을 토로하는 그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에이든, 잘 들어. 데카루스 눈치가 얼마나 좋은데. 하마터면 또 의심받을 뻔했잖아.”

“또 형 편이야?”

“뭐?”

“또 데카루스 편이냐고.”

에이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레나의 머릿속도 비상이 걸렸다.

“난 자꾸 형한테 너를 빼앗기는 기분이야.”

“에이든, 그건 또 무슨 소리…!”

“네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찬 것 같다고.”

대담한 언변에 할 말을 잃었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듯한 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엘레나는 입을 달싹이며 차분히 그의 두 팔을 잡았다.

“오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의 입꼬리엔 비소가 걸렸다.

불투명한 진노랑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다운 게 뭔데.”

“에이든…!”

탁-

“이런 거?”

그의 긴 팔이 순식간에 그녀를 가두었다.

벽과 닿은 몸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에이든, 너…!”

엘레나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남자가 돼버린 그의 몸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뜨거운 호흡만이 감돌았다.

“더 이상 순진한 척, 괜찮은 척. 난 못 하겠어.”

“…….”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널 빼앗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그의 손끝이 동그란 뺨을 스쳤다.

사선을 타고 내려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는 가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엘레나, 넌….”

“그만…! 그만해.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엘레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곤 방을 뛰쳐나왔다.

심장이 터질 만큼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엘레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숨을 몰아쉬던 엘레나는 이내 방문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대체 뭐야….”

엘레나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따끈따끈한 두 뺨이 차가운 손을 데워주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하…….”

그 눈빛, 말투, 행동.

전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다운 게 뭔데.’

‘더 이상 순진한 척, 괜찮은 척. 난 못 하겠어.’

‘엘레나, 넌….’

두근거리는 가슴이 잠재워지지 않는다.

검은 소용돌이가 뇌를 강타한 기분이었다.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혼란스러움만 가중되었다.

“에이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