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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61화 (61/117)

61화.

“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에이든을 찾은 뒤로 그에게 단 한 번도 에이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를 찾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잘 살고 있겠지, 뭐. 안 그래?”

그러자 데카루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당사자가 생각해도 이상한 변명인데.

듣는 사람은 얼마나 더 이상할까.

엘레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심을 잡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순간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무슨 생각해?”

“아니…. 아무 생각도.”

다른 생각 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은 놈.

엘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내를 살펴보았다.

다들 박자에 맞추어 서로의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었다.

꼭 물에 뜬 종이배처럼 살랑살랑 움직였다.

“신기해.”

“뭐가.”

“그냥. 이런 경험. 이런 건 귀족들만 하는 거잖아. 내 평생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데카루스는 잠시 상념에 빠진 듯 침묵했다.

바이올린과 오보에의 가느다란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연스레 춤을 췄다.

그가 발을 뻗으면 그녀 역시 뒤따라 발을 내밀었다.

백조의 몸짓처럼 아름답고 우아하게 몸을 움직였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눈매 안에 오롯이 박힌 붉은 보석.

캄캄한 밤을 훔친 듯 까만 머리카락.

곧게 뻗은 코와 물감을 머금은 듯한 입술.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까.

마치 신의 현신처럼 온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당신은….”

“위험해.”

푹-

찰나였다.

데카루스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저를 감싸 안았다.

일순간 중심을 잃은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컥…!”

눈앞에 있는 그가 난생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당장이라도 새카만 눈썹이 마주 닿을 것만 같았다.

루비를 닮은 눈동자엔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사랑을 속삭이던 입가에선 새빨간 피가 흐른다.

“카루… 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뺨에 닿은 손가락이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린다.

하지만 결국 침몰하는 배처럼 힘없이 가라앉는다.

털썩-

“꺄아아아악!”

“경비병!!!”

“어서, 전하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다.

등에는 자그마한 칼이 꽂혀있고 망토는 순식간에 피 칠갑이 되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여 그를 들것에 싣는다.

“아, 안 돼…!”

엉금엉금 기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닿기까지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조금만 더 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그가 점점 멀어진다.

“아가씨!”

누군가 팔을 세게 잡아당긴다.

그에게 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그를 봐야 하는데.

“놔… 놔!!!”

팔을 세게 뿌리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무줄기에 묶인 것처럼 단단했다.

그가 점점 시야에서 사라진다.

“놔!!!”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양 뺨에 닿은 손이 따듯했다.

제인은 다급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엘레나 아가씨!!!”

“제인….”

그녀를 보자마자 스위치를 켠 듯 모든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목청껏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닌다.

커다란 연회장 문이 거세게 열고 닫힌다.

“아가씨, 위험해요. 어서, 이리로.”

제인은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멍하니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리를 묻었던 가슴팍엔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카루스… 카루스….”

고장 난 테이프처럼 그의 이름만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제인, 놔… 카루스한테 가야겠어….”

엘레나는 간신히 목소릴 토해냈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는 그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해…?”

“2층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그곳이 가장 빠르니까요.”

엘레나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집무실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저 멀리 집무실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너무 많이 흐릅니다, 단장님. 이대로는!”

“어떻게든 살려! 어떻게든…!!!”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이삭과 의원 그리고 은색 갑옷을 입은 위병들이 서 있었다.

위병들은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가씨.”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순진했던 눈에서 살기를 뿜어 나오자 기사들은 잠시 움찔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키자 저 멀리 데카루스가 보였다.

그의 몸은 물론 침대 시트와 이불까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카루스…!”

한 걸음, 두 걸음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피 칠갑을 한 등엔 칼에 찔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졌다.

구역질이 나와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허억…! 헉…!”

“엘레나.”

하얀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누군지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에이든….”

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진정해.”

익숙한 음성이 마음속을 잠재운다.

등을 토닥이는 따듯한 손길에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어떡해… 카루스가 죽으면 어떡해, 에이든….”

그는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내렸다.

눈물은 그의 하얀 제복을 투명하게 적셨다.

그는 몇 번이고 쓰러질 뻔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가자, 엘레나.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안 돼. 못 가…. 저렇게 놔두고 어떻게 가….”

엘레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의원이 구부정한 바늘을 들고 살을 꿰매려 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가자.”

* * *

거대한 폭풍이 지나고 평온한 밤이 찾아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밤을 알리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누워있는 걸 보아하니 아까 그렇게 잠이 들었나 보다.

엘레나는 이불을 걷어 가슴께를 만져 보았다.

“옷이….”

피 묻은 드레스 대신 깨끗한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카루스….”

순간 뇌리에 그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의 비명, 핏자국, 의원의 다급한 목소리.

엘레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소름 끼치는 문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아까와는 달리 저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엘레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2층 집무실로 향했다.

“카루스… 카루스….”

아까 봤던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다시 심장이 마구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벽을 짚고 간신히 걸었다.

복도에는 위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카루스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는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카루스…!”

엘레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곤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순간 죽은 줄만 알고 급하게 손목을 잡았다.

다행히 맥박은 천천히 뛰고 있었다.

“하….”

엘레나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

달빛에 비친 허여멀건 피부가 꼭 백설기 같았다.

“죽지 마.”

그의 손을 꽉 붙잡고 이마에 맞댔다.

따듯한 온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죽으면 진짜 그땐 가만 안 둬.”

“…….”

“당신은 끝까지 사람을 짜증 나게 해. 왜 나 대신 그걸 맞아주냐고. 왜.”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엔 눈물이 어렸다.

엘레나는 가느다란 손을 더욱 꽉 죄었다.

“당신이 미워. 미워죽겠는데, 근데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났으면 좋겠어….”

“…….”

“나도 왜 이러는지 몰라. 근데…. 근데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서워.”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미동조차 없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잃을까 무서워. 내 앞에서 사라질까 봐.”

“…….”

“그러니까 죽지 마….”

“안 죽어.”

“…뭐?”

순간 적막을 깨는 짙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엘레나는 그에게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

“안 죽는다고.”

“너…!”

놀라 뒷걸음질 치자 그는 가늘게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방이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보였다.

“시끄러워서 죽을 수가 있어야지.”

순간 그의 앞에서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엘레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기함했다.

“너…! 너!”

“나 좋아해?”

“뭐?”

그녀는 얼어버린 눈사람처럼 제자리에 섰다.

놀라 어버버하던 엘레나는 빠르게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고백한 거 아닌가. 방금.”

“미, 미쳤어? 고백? 내, 내가?”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민망함에 얼굴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님 청혼?”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레나는 그의 팔을 콩콩 때리며 마법이라도 부릴 것처럼 크게 외쳤다.

“죽어! 죽어!”

“아…!”

데카루스는 갑자기 신음을 내며 몸을 웅크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컥컥대는 게 곧 숨을 거둘 것 같았다.

“뭐야…! 왜 이래! 왜 그래, 카루스! 정신차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놀란 엘레나는 울먹거리며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당신 왜 그래, 갑자기….”

그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콕콕 두드렸다.

“응? 뭐라고?”

“당신이 해주면 나아질 것 같아.”

“뭘? 아니… 설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확 달아올랐다.

이 인간 지금 입이라도 맞춰달라고 이러는 건가?

그래서 죽을 사람처럼 연기한 거야?

“아픈 거 뻥이지.”

“윽…!”

그러자 다시 몸을 말며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엘레…나….”

“당신은 진짜….”

에라이, 그래.

이렇게 된 거 눈 꼭 감고 한번 해주자.

우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지막으로 눈을 꼭 감고 혈색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일, 이, 삼.

“다 됐….”

입술을 떼려 한 순간 그의 손이 목덜미를 쥐었다.

“읍…!”

순식간에 입술 사이로 두꺼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그는 어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능수능란하게 혀를 굴렸다.

게다가 고개까지 자유자재로 돌려가며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남자, 아프다는 건 다 뻥이다.

“놔…!”

엘레나는 서둘러 몸을 뒤로 빼 억센 손아귀에서 탈출했다.

“아쉽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련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저 인간 수법에 한 번 더 놀아나면 사람이 아니다, 진짜!

엘레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는 여전히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이제 안 통하니까.”

엘레나는 식식거리며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그러자 그는 교활한 여우처럼 입맛을 다셨다.

“한 번 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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