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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59화 (59/117)

59화.

“뭐…?”

“너 내 거라고.”

“…….”

“내 친군데 내가 지켜야 하지 않겠어? 저 망할 제프론 놈 꼴사나워서 보기 싫어.”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결혼한다는 소릴 그렇게 막 내뱉으면 쓰나!

“다음부턴 그러지 마, 에이든.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

“좋은 말이네.”

“너…!”

엘레나는 양손을 들어 가슴팍을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그러자 에이든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아 세웠다.

“하나도 안 아파. 이리 와. 데려다줄 테니까.”

* * *

검은 장막이 온 세상을 덮기 전 에이든은 그녀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마차를 타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울컥했지만 내일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괘념치 않았다.

“후….”

엘레나는 빨랫줄에 널린 마른오징어처럼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오늘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체력 소모가 많이 된 모양이다.

“괜히 점집 같은 델 가 가지고….”

후회스러웠다.

괜스레 에이든 기분만 상하게 한 것 같다.

또 다른 세계에서 왔다느니, 얼굴에서 황제가 보인다느니.

순 엉터리 같은 말만 늘어놓고.

“소문내야지.”

엘레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저택 내부로 향했다.

아까 에이든이 뭘 잔뜩 샀는지 커다란 주머니를 건네주고 갔다.

아무래도 방에 가서 열어봐야겠다.

“엘레나.”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이건 도망가라는 신호일 테다.

엘레나는 못 들은 척을 하며 빠르게 걸었다.

“엘레나, 거기 서.”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도망치자 저 뒤에서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마치 작은 토끼를 쫓는 사자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탁-

망했다.

결국 단숨에 붙잡힌 어깨는 초라하게 돌려 세워졌다.

허여멀건 그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귀먹은 건 아닐 테고.”

“어? 안녕?”

엘레나는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손을 들며 밝게 인사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한숨을 쉬며 손에 깍지를 꼈다.

“이건 뭐야.”

그는 손에 쥔 자루를 보며 물었다.

에이든이 줬다고 하면 또 난리를 칠 테지.

“아니, 그냥 좀 샀어. 오늘 밖에 나갔다 왔거든.”

그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대신 쥐며 앞서 걸었다.

“어…!”

그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흘겨보더니 이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꺄악!”

오늘 대체 몇 번을 소리 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식당에서 두 번이나 지르고 저택 안에서도 지르고.

덕분에 이쪽엔 관심도 없던 시종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봤다.

“어머, 대공님이랑 아가씨랑….”

소곤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럴 거면 그냥 크게 말하세요!

민망해진 엘레나는 그의 어깨를 쾅쾅 치며 버둥거렸다.

“미쳤어? 놔!”

“응, 알았어.”

아니, 알았다면서 계속 안 놓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는 짐짝처럼 그녀를 안아 들고 3층으로 향했다.

발버둥 쳐봤지만 그는 마치 거대한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끼익-

결국 그대로 방 안에 도착한 엘레나는 조심스레 바닥에 놓였다.

“줘, 그거.”

엘레나는 묵직한 자루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순순히 자루를 돌려주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풀어 봐.”

“뭐?”

역시 순순히 돌려준 덴 이유가 다 있었다.

이 악마 같은 놈.

“싫어.”

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그녀를 내려 봤다.

성에가 낀 듯 차가운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내 거야.”

그는 제자리에 서 딱딱거리며 구둣발 소리를 내었다.

한참을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이내 피식, 하고 웃었다.

“당신은 누구 건데?”

그는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

누구 거냐니.

당연히 자신은 자기 것이 아닌가.

엘레나는 허공을 보며 고심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내 거지. 그럼 누구 거야!”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건 왜일까.

그의 앞에만 서면 작은 토끼가 되는 기분이다.

엘레나는 그를 흘겨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럴 리가.”

탁-

결국 막다른 곳에 부딪친 엘레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꼼짝없이 갇혀 어디로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데카루스는 팔로 벽을 가로막아 작은 몸을 몰아세웠다.

“당신은 내 거야.”

엘레나는 동그랗게 뜬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그의 손이 긴 머리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무도 못 가져가.”

뺨을 타고 내려온 간지러운 손길에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빠르게 맞닿았다.

“아…!”

놀라서 눈을 뜨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반쯤 감긴 나른한 눈빛이 그녀를 찬찬히 훑어 올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위압적인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압 프레스에 완전히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던 두 사람 사이엔 고요한 적막이 흘러 지나갔다.

“놔…!”

마지못한 엘레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그의 팔을 쳐냈다.

와르르.

그 순간 한 손에 쥐고 있던 자루가 힘없이 쏟아져 내렸다.

“아…!”

바닥은 보물섬에라도 온 듯 온갖 보석들로 반짝였다.

루비, 에메랄드, 아쿠아마린 등 형형색색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즐비했다.

“이건….”

당황한 엘레나는 요리조리 눈을 굴렸다.

그는 마치 수사관이라도 된 듯 한쪽 눈썹을 구기며 바닥을 노려보았다.

“누구야?”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눈동자엔 한기가 돌았다.

그는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는 입을 달싹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죽어도 에이든을 만났다고는 말을 못 하겠다.

그러면 정말 그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 같았기에.

“나 혼자 나갔어. 다 내가 산 거야.”

거짓말을 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입에 침이라도 바를걸.

엘레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장신구를 주워 담았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들킨 건 아닐까.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잘했네.”

응? 뭐라고?

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당황한 엘레나는 고개를 퍼뜩 곧추세웠다.

“…뭐?”

“잘했다고. 예쁘네.”

이 남자가 약을 먹었나.

분명히 의심할 줄 알았는데.

대체 뭐지?

게다가, 이번엔 같이 쭈그려 앉아 장신구를 주워 주는 게 아닌가.

“아, 어….”

묘한 미시감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적응이 안 됐다.

엘레나는 눈을 굴려 가며 그를 흘겨보았다.

“다 됐네. 이만 가지? 곧 식사 시간이야.”

“…응.”

그는 손에 깍지를 끼고 그녀를 이끌었다.

식당을 가는 내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기분 탓일까.

끼익-

식당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의자를 꺼내 그녀를 앉혀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내일이 탄신 연회인 건 알고 있지?”

“응.”

엘레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앞에 놓인 고기를 잘게 썰었다.

“어제 못 한 건 이따가 마저 하도록 할까.”

“응….”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는 힐끗거리던 그녀가 거슬렸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설마 들킨 걸까.

들킬 줄은 몰랐는데 언제부터 안 거지.

엘레나는 눈알을 둥그렇게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냥. 아니야. 식사 마저 해.”

그래, 착각이겠지.

그가 에이든과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고.

게다가 그 큰 광장에서 우리를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해.

괜한 걱정이야.

엘레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걱정을 삼켰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 * *

“전하, 말씀하신 대로 아가씨께선 8황자 전하와 함께 계셨던 게 맞습니다. 하지만 무얼 하는지는 정확히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

“원체 예민하신 건지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살기를 띤다고….”

“그래, 수고했어.”

“예, 그럼.”

끼익-

엘레나가 노아와 만날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못 만나게 한다고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노아에 대한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정말 그가 범인이라면 엘레나도 안전하지 못할 터.

그 상황에 대비해서 첩자를 심어둔 건데.

“소용없겠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변했다.

그렇게 순진했던 아이가 신경에 거슬리는 것도 그렇고, 엘레나를 보는 시선 또한 예전과 같지 않다.

또 훈련이라곤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첩자를 알아차리는 것 또한 불가능할 터.

“하….”

이젠 그가 하는 말이 전부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동안 몇 번 넘어가 주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따윈.

“하지만….”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

황궁에서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다.

단순하게 판단해선 안 될 문제야.

무언가 베일에 가려져 있어.

똑똑-

“들어와.”

“춤 연습 안 해? 여기서 뭐 해. 씻지도 않고. 한참 기다렸단 말야.”

“아니, 갈게. 올라가 있어.”

문 사이로 눈만 빼꼼 내놓고 있던 엘레나는 이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싫어. 같이 올라갈래. 심심하단 말야.”

“그래, 그럼.”

엘레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소파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아무래도 정말 심심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녀가 세모 눈을 뜨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뻐서.”

순간 앙증맞은 그녀의 볼이 사과처럼 확 달아올랐다.

그러곤 민망한 듯 목을 가다듬으며 책장을 넘겼다.

여전히 시선은 여기를 보고 있으면서.

“다른 여자한테도 그랬어?”

“다른 여자?”

“나 말고 다른 여자도 만났을 거 아니야.”

다른 여자는 만나본 적조차 없다.

사적으로 말을 섞어본 적 또한 없고.

관심도 없었고 만날 이유도 없었다.

“없어. 그런 거.”

엘레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자미처럼 뜬 눈이 퍽 귀여웠다.

“거짓말은 청산유수야.”

“정말이야.”

“생각해 봐. 당신 같은 남자를 누가 가만히 두겠어. 여자가 떼로 몰려들었을 것 같은….”

순간 엘레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흠칫 놀랐다.

“왜, 말을 하다 말고.”

데카루스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아니야. 잘못 말했어.”

잘못 말했다면서 허벅지를 꼬집는 건 왜일까.

데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듣고 싶은데. 당신 질투하는 거.”

“뭐?”

엘레나는 화들짝 놀라며 책을 덮었다.

그러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지, 질투? 내가? 하!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응, 당신에게 미쳤지.”

그가 소파에 앉자 엘레나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왜, 뭐. 갑자기 왜 오는데.”

“당신이 질투하는 거 더 듣고 싶어.”

“오지 마, 오지 마! 오면…!”

그녀는 손가락질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데카루스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접으며 그녀의 뒷덜미를 감싸 안았다.

“오면?”

“오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진 하얀 피부.

보석을 담은 듯한 큰 눈.

앵두처럼 앙다문 동그란 입술까지.

이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귀중품처럼 꽁꽁 숨겨서 어두운 구석에 가둬놓을 수만 있다면.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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