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투명한 창가로 비치는 햇살이 아름다운 여체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엘레나는 팔을 허공에 띄우고 혼자서 빙글 돌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어제 춤 연습을 못 한 탓에 혼자서 꾸물거리고 있다.
다 그 짐승 같은 놈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내일이 탄신 연회인데 뭐 하자는 건지.
아니, 누가 연습하다 말고 갑자기…!
“크흠….”
엘레나의 두 뺨이 순간 확 달아올랐다.
어제 일만 생각하면 아주 울화통이 치민다.
연습은 10분도 안 한 것 같은데.
갑자기 그렇게 달려들면 어쩌자는 건지.
“다신 그 인간이랑 춤 연습 같은 거 안 해!”
그래서 전서구로 에이든에게 편지를 보냈다.
데카루스 몰래 아침 일찍 보낸 것이니 금방 오겠지.
엘레나는 기쁜 듯 두 팔을 활짝 펴고 빙그르르 돌았다.
사실 춤 연습보다는 밖에 나가고 싶었다.
에이든이랑 단둘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게 놀고 싶었다.
“언제 오려나.”
일단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옷부터 화사한 걸로 입어야겠다.
엘레나는 큰 옷장을 열어 턱에 손을 괴고 고민했다.
“뭘 입나….”
한참 동안 옷장을 뒤적거리던 엘레나는 연노랑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역시 화사한 건 노란색이지.”
환복을 한 그녀는 마치 이제 갓 솜털이 자란 아기 병아리 같았다.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제 모습을 살피던 엘레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병아리 같긴 하지만. 예쁘네.”
그리고 데카루스가 신신당부했던 가발도 꾸역꾸역 썼다.
답답하긴 하지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쁘지만은 않았다.
똑똑-
그때 출입을 알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온 걸 보면 꽤 급한 일인가 보다.
“아가씨, 황자 전하께서…!”
“아! 잠시만!!!”
시종은 급히 달려온 듯 숨을 헐떡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에이든을 부른 탓에 그의 방문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엘레나는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방을 뛰쳐나갔다.
“아! 집은 왜 이렇게 커서!”
계단까지 뛰어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아마 복도에서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를 열어도 됐을 것이다.
엘레나는 치마를 붙잡고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어 내려갔다.
“아악!”
순간 넘어질 뻔했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뛰었다.
3층에서 1층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길다니.
“에이…! 아니, 황자 전하!”
저 멀리서 실크처럼 부드러운 백금발이 보였다.
에이든은 기함하며 입을 쩍 벌렸다.
“여, 영애…!”
“전하!”
급하게 계단을 내려온 엘레나는 그의 앞에 섰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전하.”
“영애. 왜 이렇게….”
주위의 시선 탓에 멋대로 에이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엘레나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일단 나가시죠.”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정원으로 향했다.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엘레나는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야,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 지금 나 힘드니까 말 시키지 마.”
지나가는 시종들이 듣지 않게 소곤소곤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에이든은 그녀를 따라 잠자코 정원으로 향했다.
“하…!”
엘레나는 쓰러지듯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자 그는 그 옆에 앉아 말을 붙였다.
“아니, 뭐가 그리 급해서 전서구까지 보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응. 너… 하…. 내 춤 연습 상대 좀 해줘야겠어.”
“춤, 뭐?”
에이든은 순간 뭐라도 잘못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그는 춤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하지만 황자라면 예전에 배워둔 왈츠 하나쯤은 있을 것 아닌가.
“나 내일 탄신 연회 때 춤춰야 한단 말야. 근데 데카루스 이놈은 위험해서 안 되겠고. 그래서 너로 정했어.”
엘레나는 헐떡거리며 비범하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리고 조금만 하고 놀러 나가자. 나 이제 자유의 몸이잖아.”
엘레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에이든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나랑 춤을 추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괘씸해서 한 마디 더 해주고 싶었다.
“아니, 탄신연회 때 그럼 누구랑 춰?”
“데카루스!”
엘레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그 말고는 딱히 출 사람이 없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랑 춘다고 하면 난리 난리를 피울 게 분명하고.
뭐, 어차피 자동적으로 데카루스가 춤 상대였다.
“아, 그렇지. 하긴….”
에이든은 갑자기 시무룩해 보였다.
“너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일어나. 왈츠 정도는 배웠으니까.”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역시 황자라면 춤 정도는 출 수 있어야지, 암.
엘레나는 그를 잡고 벌떡 일어나 앞에 세웠다.
“잡는 법은 알아.”
어깨를 덥썩 잡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뗐다.
“야, 그렇게 막 잡으면…!”
“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하… 아니, 맞아. 그렇게 하는 거.”
에이든은 한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움직였다.
박자를 맞출 음도, 노랫소리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새들의 지저귐과 꽃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음악이 되어주었다.
“너 좀 추네.”
“나 황자야.”
에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찌그렸다.
큭큭 대며 비웃던 엘레나는 어느새 쨍한 햇살처럼 활짝 미소 지었다.
아름답게 제 빛깔을 뿜어내는 꽃과 녹음이 우거진 나무는 그들을 더욱더 찬란하게 빛내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에게 몸을 맡기던 둘은 잠시 몸짓을 멈추었다.
“나 이제 완벽한 것 같아.”
“너 타고났다니까.”
집시 시절에도 어디서 춤을 배워서 춘 게 아니다.
그냥 음악에 몸을 실어 움직였을 뿐인데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무희처럼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며 돈을 벌었다.
그녀에게 춤은 누워서 떡 먹기인 셈이다.
“이제 나가자. 나 사실 너랑 나가 놀려고 불렀어.”
“그래서 머리가 이런 거야?”
에이든은 연갈색 가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응. 데카루스가 나갈 땐 꼭 쓰라고 해서. 어때, 다른 사람 같아?”
“어, 뭐. 응….”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게 괘씸했다.
그래서 주먹으로 한 대 박아버렸다.
“아!!!”
“표정 관리 잘해라.”
“이런 무뢰배 같으니….”
“뭐? 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주먹질을 하려 손을 번쩍 든 순간 에이든이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 너 이거 뭐야?”
그는 눈을 찡그리며 엘레나의 목 주변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설마 어젯밤에 그가 남긴 흔적인가.
엘레나는 당황한 듯 목소릴 떨었다.
“아, 아니. 이거 그냥 벌레 물린 거야.”
“벌레? 벌레가 이렇게 커?”
“응, 요새 벌레가 크더라고? 아무튼! 나가자!”
* * *
루비궁.
베로니카 황후의 궁이자 제2의 권력 중심지인 루비궁.
궁 바깥부터 금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에스텔 제국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듯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은 눈부실 정도로 빛났다.
또 황후를 상징하는 금장미 문양이 궁 안 이곳저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황후의 방 안에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있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크고 동그란 눈, 백옥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연분홍빛 머리칼은 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표독스러운 눈빛과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녀와 정반대였다.
꼭 마귀 같은 표정을 지은 황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래, 카루스…. 아니, 이제 공이라 불러야 할까?”
빨갛게 물들인 기다란 손톱은 팔걸이를 두드리며 딱딱 소리를 내었다.
“황후 폐하께서 불러주시는 이름이라면 그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데카루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싸늘한 공기가 그를 압박했다.
“가증스럽군.”
그녀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는 여전히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후는 그의 무덤덤한 자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그래, 공이 날 찾아온 이유는 잘 알고 있어. 최근 일어난 살인 사건이 황궁과 관련이 있다지.”
그녀의 긴 손톱이 새하얀 볼에 맞닿아 천천히 움직였다.
“예, 황후 폐하.”
“그래서 공이 원하는 게 황궁의 수사권인가.”
황후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그녀는 기가 찬 듯 비소를 흘렸다.
하긴 황후가 독점하고 있는 수사권을 감히 넘겨달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한데 이를 어쩌나. 난 공이 원하는 건 주지 못할 것 같은데.”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치맛자락을 스치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손아귀가 그의 턱을 휘어잡았다.
먹이를 탐하는 표범처럼 사나운 안광이 번쩍하고 빛났다.
“이 얼굴을 낭비하고 싶진 않은데 말야.”
황후는 맛있는 디저트를 앞에 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천천히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 내가 황제가 되면 내 첩이 될 생각은 없나?”
황후는 목구멍을 긁어대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목청껏 웃어대는 그녀의 목소리는 돌고래처럼 시끄러웠다.
또 뾰족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흡사 마녀와 같았다.
“그럼 수사권을 넘겨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야.”
하지만 데카루스는 그 꼴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말을 이어 나갔다.
“공이 날 싫어하는 것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
아무런 대답이 없자 황후는 조소를 지으며 다시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건 모두 그 애 탓이겠지?”
한참을 미동조차 없던 그가 눈꺼풀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황후는 기다란 손톱이 난 손을 들어 말간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 공께서는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을까. 쥐새끼처럼 말야.”
황후는 큰 눈을 시퍼렇게 뜨며 그와 마주했다.
“살아있니?”
“…….”
“아니지, 살아있으면 이 내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그녀는 날카로워 보이는 손톱을 입가에 대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황제께서는 아직도 엘레나를 찾아. 황태녀가 사라진 지 10년은 더 됐는데도 말야. 차기 황태자를 생산해야 하는데 나와 합궁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더군.”
“…….”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거야, 카루스.”
뾰족한 손톱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 목울대를 찔렀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살며시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그 노망난 할아범은 그만 두고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떤가.”
탁-
데카루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을 쳐냈다.
황후는 비참하게 떨궈진 손을 보며 재밌는 듯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노망난 생각 머린 여전하시군요, 폐하.”
입꼬리를 들썩이던 황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폭소했다.
그녀가 웃자 얼굴엔 자글자글한 주름이 팼다.
시끄러운 웃음소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
“이래서 더 탐이 나는 거야. 카루스, 네가.”
황후는 꼬리치는 여우처럼 그의 주변을 알랑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한 치의 변화 없이 평온했다.
“기억해 둬. 다 죽어가는 노인네보단 내 밑으로 기어들어 와 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는 게 공에겐 더 좋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