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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55화 (55/117)

55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의 말대로 바쁘게 지낸 덕에 에이든은 머리털 하나 보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정말 별짓을 다 했다.

며칠 전 갑자기 웬 남자 한 명이 오더니 이것저것 가르치는 게 아니겠는가.

‘아가씨, 영애들과 대화하실 때는 부채를 잘 쓰셔야 합니다. 부채에도 언어가 있답니다.’

부채를 오른쪽 뺨에 갖다 대면 긍정의 표시고, 부채를 왼쪽 뺨에 갖다 대면 부정의 표시.

또 부채로 눈을 긋고 지나가면 사과의 표시라고 한다.

‘그리고 비꼬는 말과 칭찬의 말을 잘 구분할 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영애께서는 참 건강하시군요.’라고 했을 때,

이 말에는 건강하다는 말만 있는 게 아닌 정말 돼지 같으니 살을 빼라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차를 마실 땐 무작정 입을 대면 안 됩니다. 향부터 먼저 맡으셔야지요!’

그는 생긴 것처럼 깐깐했다.

나무 막대를 가지고 틀릴 때마다 소리 나게 책상을 탁탁 쳐댔다.

그리고 말투가 어찌나 특이하던지 들어주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렇게 컵을 잡는 법, 웃는 법, 먹는 법까지.

예전에 제인한테 배웠던 것보다 더욱 상세했다.

그 덕에 지금 몸이 녹초가 될 것만 같았다.

“아. 제인… 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돼.”

엘레나는 침대 위를 구르며 아이처럼 투정 부렸다.

“아가씨, 나중에 정식으로 대공부인이 되시면 그땐 더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

대공부인 따위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식 얘기만 들으면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됐어, 그만해. 그런 소린 이제 지긋지긋해.”

제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아, 저런 게 귀족 영애라는 거구나.

정말 한 치도 따라잡지 못하겠다.

평생을 이러고 살았는데.

절대 우아의 ‘우’자도 따라잡지 못할 거야.

“근데 데카루스는? 어딨어?”

“아, 지금 황자 전하를 만나 뵈러 가셨어요.”

“뭐?”

아니, 나보곤 만나지 말라면서 치사하게 지는 만나러 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전하와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아가씨.”

“당연하지. 친구야, 친구. 내 하나뿐인 친구….”

엘레나는 말끝을 흐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살이 따사롭게 비쳤다.

지금 자면 안 되는데 자꾸 졸음이 몰려온다.

“아가씨,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제인은 그새 눈을 껌뻑이며 졸던 걸 눈치챘는지 폭신한 이불을 턱 끝까지 덮어주었다.

안 자려고 했는데 이건 제인이 이불을 덮어준 탓에 자는 거다.

“그럼, 좀만 잘게….”

* * *

크리스탈 궁, 노아의 방.

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자 키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차림새를 한 그는 데카루스였다.

“노아.”

“어, 형?”

노아는 그를 밝게 맞이하며 반겼다.

해바라기처럼 온화한 미소가 방 안에 가득 풍겼다.

“여기 앉아.”

노아는 그를 초록빛 소파로 안내한 뒤 시녀를 시켜 차 시중을 들게 했다.

“어떤 차 마실래?”

“칸나티. 있나?”

데카루스는 찻잎이 들어있는 트레이를 슬쩍 흘겼다.

“응, 의외네. 이걸 찾을 줄이야.”

“엘레나가 좋아해.”

그 말은 들은 노아는 놀란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형은 역시 사랑꾼이라니까.”

시종은 그가 말한 칸나티를 꺼내어 찻주전자에 넣었다.

고급스러운 플로럴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그래서, 왜 왔어? 형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을 텐데.”

노아는 기대되는 듯 턱 앞에 두 손을 모았다.

햇빛을 받은 새하얀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곧 엘레나의 생일이야. 탄신 연회에 널 초대하려고.”

“탄신 연회?”

그는 집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래, 6월 6일이 엘레나 생일이거든.”

“아, 그럼 선물을 준비해 가야겠네.”

노아는 싱긋 웃으며 차를 홀짝 들이켰다.

사실 그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엘레나와 붙어있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비밀리에 진행될 거야. 황족은 너만 오니까 입단속 잘해.”

“당연하지,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데카루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달싹였다.

“왜, 또 뭐 할 말이 있어?”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데카루스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노아는 얕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이 분위기. 무슨 일인데?”

“며칠 전 포레 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 근데 그 범인이 황궁 쪽 인물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고. 혹시 뭐 아는 게 없나 싶어서.”

심각성을 깨달은 노아는 잘게 눈썹을 구겼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인 것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뭐? 포레 가라면 누아르 숲 쪽 말하는 거 아니야?”

“맞아. 수사국에선 황궁 최정예병의 솜씨라고 하더군. 근데 아직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어. 황궁에선 수사를 거부하고 있고.”

“최정예병이라…. 미안. 형도 알다시피 내가 황궁엔 영 아는 게 없어서 말야.”

노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역시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기억을 잃기도 했고 그런 쪽과는 영 거리가 머니까.

하지만 음습한 기분이 가시지가 않는다.

꼭 그가 진짜 범인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만 더. 그럼 그날, 비가 오는 날. 뭐 했어?”

“허….”

노아는 순간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없다는 듯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설마 형, 나를 의심하는 거야?”

그는 비소를 흘리며 미간을 좁혔다.

곧게 올라간 입꼬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노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는 거잖아. 지금. 나를.”

“노아.”

쾅-

그는 차 받침대가 깨질 만큼 세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겨우 이런 얘기 하려고 온 거야?”

화가 날 만했다.

물증도 없는 사람에게 대놓고 이런 걸 물어보다니.

“노아.”

데카루스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의심하는 게 아니야. 단지 숨을 거둔 자 중 한 명이 널 언급했다고 해서….”

“그래도 그렇지…!”

노아는 원망 어린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꽤 실망한 건지 한숨을 쉬더니 창가 앞으로 가 섰다.

“그만 나가줘. 형이랑 말하고 싶지 않다.”

“노아.”

“나가. 형, 부탁이야.”

그는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데카루스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게. 탄신 연회 때 꼭 와. 엘레나가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는 마지막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종을 따라 그의 방을 나섰다.

쾅-

“…….”

방 안은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만 가득했다.

노아는 테이블로 가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숨통을 확실히 끊어놨어야 했는데….”

저답지 않은 실수였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는데 이렇게 의심을 살 줄이야.

“멍청하게….”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 입술을 뜯었다.

검붉은 피가 맺힌 입술 사이로 얕은 신음이 흘렀다.

그는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게 입을 닦아냈다. 손등에는 어느 살인 현장처럼 붉게 피가 번졌다.

“한나.”

그는 여느 때처럼 시녀를 시켜 술을 가져오게 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술병에 괴물 같은 얼굴이 비쳤다.

노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투명한 크리스탈 술잔에 산호빛 술이 채워져 갔다.

“난 형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이 숨겨둔 검은 그림자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형을 죽이고 싶지도 않아.”

노아는 잔에 가득 찬 술을 단숨에 넘겨버렸다.

알싸한 술 냄새가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런데 왜 자꾸, 자꾸만….”

한 잔, 두 잔, 넘어가는 술잔에 온몸에 점점 열기가 더해갔다.

손으로 감싸 쥔 머리는 테이블에 맞닿았다. 그는 고뇌하듯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꾸만 날 건드려….”

불투명한 눈빛이 허공에 향했다. 목적 없이 떠도는 나그네처럼 불온했다.

“자꾸만 날 화나게 해….”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손에 얼굴을 묻은 노아는 조금씩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날 의심해….”

눈가를 타고 내리던 눈물이 손바닥에 맺혔다. 어느새 축축해진 얼굴은 습기로 가득 찼다.

“어떻게 내 자릴 빼앗아….”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며 울었다. 마치 곧 침몰할 것 같은 배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난 진짜 형을 오래 보고 싶단 말야.”

뜨거운 눈물이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표정은 망가진 피에로처럼 구겨졌다.

“내가 형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데.”

그는 입을 벌린 채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제 그러지 못하겠어.”

그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떨리는 팔을 허공에 갖다 댔다.

손톱 자국이 날 만큼 꽉 쥔 주먹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죽여 버릴 거야….”

* * *

형을 처음 본 건 일곱 살 때쯤이었다.

그는 줄곧 키가 작은 소녀와 함께 다녔다.

늘 괴롭힘만 당했기에 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들이 자주 나타나는 장소에 가서 기다렸다.

그렇게 하면 단연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안녕?”

“무엄하다. 어디 황녀 전하 앞에서.”

늘 그렇듯 첫 만남은 좋지 않았다.

작은 소녀가 황태녀일 줄이야.

애지중지 여겨지는 그녀를 황궁에서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어디 황궁의 법도도 모르는 것이…!”

“됐어, 카루스. 얘, 너 며칠 전에 온 황자지?”

조그만 소녀는 햇살을 가리며 올려다봤다.

호수를 담은 눈동자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황후를 똑 닮았다.

“예, 전하….”

“그럼 우리 같이 놀자. 카루스, 햇빛.”

그는 마치 그녀의 검은 개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양산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쫄병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삭막한 황궁에서는 이것만이 낙이었다.

덕분에 황후와 어머니의 사이도 좋아지신 것 같았다.

또 그들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살려줘…!”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를 시샘한 황자들이 그를 몰래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넘어뜨리기 일쑤였고 개미를 옷 속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은 강가에 서 있던 그를 밀어버렸다.

“살려줘! 제발…!”

그때였다.

형이 영웅처럼 물속으로 뛰어든 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수로 몸을 내던졌다.

마치 전장으로 뛰어드는 멋진 기사 같았다.

“콜록! 콜록…!”

“하아… 하… 괜찮아?”

“콜록…! 응… 콜록…!”

뒤늦게 따라온 엘레나는 황자들에게 벌을 주었다.

그리고 형은 젖은 몸을 품에 꼭 안아 괜찮다고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따듯한 품은 어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꾹 참았다.

형이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기에.

그때부터 결심했다.

형만큼 멋진 사람이 되어 엘레나와 형을 지켜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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