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
온몸이 뻐근하고 찌뿌둥한 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피곤해 눈조차 떠지지 않았다.
따듯한 걸 보니 아마 여전히 그의 품이겠지.
“또 대체 무슨 정신으로….”
왜 자꾸 그를 받아들이는지 이젠 도저히 모르겠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지.
“하….”
엘레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미쳤다고 생각하면 편한가.
그토록 싫어했던 인간과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어젯밤을 생각하니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깊게 잠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손가락 사이로 살그머니 눈을 뜨자 그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허여멀건한 피부엔 다크서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손가락을 붙였다.
“뭐 하는 거야.”
“몰라.”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당신은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무슨 소리야.”
“아니야….”
엘레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돌아누웠다.
하지만 곧장 그의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판판한 가슴과 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엉덩이 사이엔 단단한 무언가가 지그시 눌렸다.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 봐.”
“싫어.”
“봐.”
단호한 어조에 결국 다시 뒤를 돌았다.
손가락을 살짝 펴 보니 그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손은 뭐야.”
“나 지금 엉망이야.”
그는 피식 웃더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뒤로 쭈뼛쭈뼛 몸을 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손 떼.”
“왜, 왜.”
“확 먹어버리기 전에 어서.”
먹어버린다니 뭘 먹는단 말이야.
응큼한 자식.
하지만 손을 뗄 순 없었다.
지금 이 상태를 들킨다면 또 놀림감이 될 게 분명했기에.
“안 되겠네.”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확 안아 들었다.
흘러내린 이불 위로 새하얀 여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악!”
엘레나는 기함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애써 얼굴을 가리던 손을 놓아버린 채.
“이런 얼굴이었어?”
그는 뱀처럼 교활한 눈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곤 손에 쥔 이불을 끌어 내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 뭐 하는…!”
그는 양손으로 발그레한 뺨을 맞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손으로 몸을 밀쳐봤지만 움직이긴커녕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팔은 탄탄한 밧줄처럼 그녀를 세게 옥죄었다.
그의 입술이 거친 파도처럼 몰아쳤다.
야릇한 살 맞춤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야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응?”
“내가 무슨…!”
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지나 뺨과 눈꺼풀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의 키스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던 엘레나는 팔로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이제 그만…!”
“그만이란 건 없어.”
그의 입술이 얼굴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을 타고 내려왔다.
“카루스, 아침이라고!”
“응, 알고 있어.”
그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비며 온몸을 간질였다.
“이제 진짜 그만…!”
엘레나는 그를 세게 밀쳐내었다.
온몸이 타액으로 축축이 젖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숨을 헐떡거리던 엘레나는 억울한 듯 그를 노려봤다.
“당신은 진짜 변태야.”
데카루스는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더니 다시금 천천히 다가왔다.
사자 같은 몸짓에 엘레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싫어?”
그의 말에 온몸에 확 열기가 돌았다.
오늘 하루만 대체 얼굴이 몇 번이나 빨개지는 건지.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소리도 하지 마.”
데카루스는 작은 몸을 살포시 안으며 귓바퀴를 핥았다.
“그럼 이제 나갈까?”
엘레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를 흘낏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데카루스는 뺨과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맞추었다.
“가자.”
두 사람은 씻고 식사를 한 뒤 드레스 샵에 갈 준비를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체할 뻔했다.
왜 갈수록 저렇게 능글맞아지는 건지.
“가실까요.”
그는 정중히 왼쪽 손을 내밀며 지그시 시선을 맞추었다.
맞닿은 손엔 따끈따끈하게 열이 올랐다.
저 멀리 정문 앞에는 화려한 마차가 제 위용을 드러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나 마차 처음 타 봐.”
뭐든 신기한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마차를 훑어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색 마차엔 하얀 말 네 마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마차의 겉면은 작은 사자를 닮은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했다.
“신기해?”
데카루스는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응, 완전. 나 저런 건 처음 타 봐.”
“앞으로 많이 타게 될 거야.”
처음으로 몰래 탈출하는 외출이 아니라니.
정식으로 그와 함께 밖에 나가는 건 상상도 못 해 봤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자유라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일 줄이야.
“이리 와.”
데카루스는 손을 뻗어 먼저 마차에 오르게 해 주었다.
마차 내부는 더욱더 아늑했다.
빨간 시트로 된 폭신한 소파와 밖이 보이는 널찍한 창문까지.
이래서 다들 마차를 타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가지.”
그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마차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탑승감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뭐 물론 엉덩이가 들썩이긴 하지만 여기서 자동차를 바랄 수 없으니까.
엘레나는 신기한 듯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바깥을 구경했다.
걸어서 보는 것과 마차에서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푸른 하늘, 도시의 풍경.
이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신기해.”
“응. 너무 너무….”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Boutique Luxe]
“어? 여기 파비에르가 하는…!”
“맞아.”
그의 앙증맞은 콧수염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딸랑-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부산스럽게 나왔다.
“어머, 엘레나 아가씨와 스큘러스 대공 전하.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역시나 파비에르는 긴 콧수염을 튕겨 가며 두 사람을 반겼다.
“한데 엘레나 아가씨의 머리색이 바뀌었습니다?”
외출할 때 그와 약속한 것이 한 가지가 있다.
무조건 가발을 쓰고 나갈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발 하나 쓰는 건 어렵지 않기에 알겠다고 했다.
“이젠 갈색 머리가 되었지요.”
엘레나는 활짝 웃으며 연갈색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파비에르는 신이 난 듯 2층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자, 자. 그럼 어서 2층으로 올라가시죠. 새로운 드레스가 아주 많답니다.”
매끈한 원목으로 된 계단을 오르자 수십여 개의 드레스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디자인한 몸에 딱 붙는 드레스는 물론 기장이 짧은 드레스, 펑퍼짐한 벨 드레스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아직 놀라시기엔 이릅니다. 3층에 더 많은 드레스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2층이 가장 최신이기 때문에 2층만 둘러보셔도 괜찮습니다. 자, 그럼 둘러보시고 저를 불러주세요. 그럼 이만.”
파비에르는 예를 갖춰 허리를 푹 숙인 뒤 재빠르게 사라졌다.
엘레나는 뭐가 그리 웃긴지 코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파비에르 너무 귀여워. 작은 다람쥐 같아. 그렇지 않아?”
“…….”
아무 말도 없는 그가 이상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워?”
“응? 아니, 그렇잖아. 그냥 작고 귀엽….”
그는 허리를 숙여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서리가 낀 듯 찬기가 돌았다.
“왜, 왜 그래….”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말야.”
엘레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파비에르가 귀엽다는 게 나쁜 말인가.
그저 칭찬을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거야.
“아, 안 귀여워.”
이번엔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는 얕게 미소를 띠며 차분히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레나는 작게 구시렁거리곤 재빨리 뒤를 돌아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우선 색깔부터 정해야 했다.
“나 무슨 색으로 하지? 분홍색? 하늘색?”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럼 어떤 모양으로 하지? 벨? 머메이드? 엠파이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순간 짜증이 확 났다.
이럴 거면 대체 왜 같이 온 거야.
엘레나는 세모 눈을 뜨고 그를 째려보았다.
“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실까.”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데카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럴 거면 대체 왜 따라왔어?”
엘레나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냈다.
그를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뭘 입어도 예쁘니까.”
그는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빛에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뭐, 뭐. 그래. 그럼 알았어.”
당황한 엘레나는 새침하게 대답한 뒤 바로 돌아섰다.
갑자기 저런 말을, 저런 표정으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진짜 오글거리는 말은 잘도 해….”
“뭘 그렇게 구시렁대.”
“아, 아니야!”
그렇게 심사숙고한 끝에 연하늘색 벨 드레스를 골랐다.
저번에 머메이드를 입었으니 이번엔 다른 모양도 나쁘지 않겠지.
풍성한 오간자 원단에 라운드 넥으로 훅 파인 예쁜 공주님 같은 드레스였다.
이번엔 화려한 보석을 빼고 최대한 심플한 느낌으로 가고 싶었다.
“어때?”
엘레나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와 예쁘게 빙 돌며 그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굴을 붉히며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니겠는가.
“뭐야! 야! 어디 가!”
엘레나는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은 뒤 그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가면 어떡해!”
“…….”
“하…. 진짜 왜 이래. 그렇게 별로였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차를 출발시켰다.
엘레나는 대답이 없는 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됐어. 말을 말자.”
그녀는 입술을 쭉 내밀곤 창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화난 사람처럼 왜 얼굴은 붉히는지.
또 사람을 그렇게 남겨두고 홀로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리는지.
아직까지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거 입지 마.”
“뭐?”
아니, 아까는 아무거나 입으라면서 갑자기 또 왜 변덕일까.
엘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그렇게 이상해?”
“그래.”
“하….”
이 어린애 같은 남자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이제 지친다.
절대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 제멋대로 해 버릴 테니 두고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