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에이든이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홀로 남겨진 텅 빈 방 안은 언제나 쓸쓸하다.
“또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일은 못 온다고 했으니까.
“에휴….”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귓바퀴에 맴돌았다.
벌써 6시를 가리키는 시침이 조금은 반가웠다.
똑똑-
정각에 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저녁을 먹으러 내려오라는 소리일 테지.
“아가씨, 저녁 드시라고 대공님이 전하시네요.”
“뭐야, 같이 먹어?”
“네, 오늘은 대공님께서도 참석하신대요.”
“알았어.”
엘레나는 거울 앞에 서서 잠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오늘 입은 옷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대공님 눈엔 아가씨는 항상 아름다워 보일 거예요.”
“뭐?”
제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엘레나는 기함하듯 손사래 쳤다.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깔끔한 게 좋아서 그래.”
“알았어요, 아가씨. 어서 이리로.”
제인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내했다.
왠지 속을 다 들킨 기분에 민망함이 차올랐다.
“오늘은 뭐 먹어?”
“오늘은 와인에 졸인 닭고기가 나올 거예요. 아까 보니까 꽤 맛있게 생겼던데요?”
“그래?”
와인에 졸인 닭고기라니.
먹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에이든이랑 하도 대화를 많이 한 탓인지 배가 조금 고팠다.
“그럼 아가씨, 맛있게 드시고 내일 봬요.”
“응, 제인도 저녁 맛있게 먹어.”
시종들의 저녁 식사 시간도 이때쯤이라 제인도 식사를 하러 간다.
제인도 함께 식사를 하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마자 삐딱하게 고개를 튼 그의 모습이 보였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와 두 개 정도 풀린 단추가 꼭 미색에 빠진 귀족 같았다.
“왔어.”
“응.”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조금 위압적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는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몸을 끌어당겼다.
찰박 마주 닿은 몸에선 끈적한 기류가 흘렀다.
“응? 나 바로 왔….”
쪽-
순간 이마에 맞닿은 입술에 몸이 움찔거렸다.
농밀한 입맞춤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뭐야….”
엘레나는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피식 잘생긴 입매를 말아 올리는 데카루스는 어느 때보다도 외설적이었다.
“늦었어.”
분명 바로 왔는데 왜 자꾸만 늦었다고 하는 것일까.
예쁘게 난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그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만해.”
다 된 밥 앞에서 민망하게 자꾸 무얼 하는 건지.
엘레나는 귀를 붉히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쉽게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허리를 감싸던 팔이 더 세게 그녀를 옭아맸다.
“카루…!”
입을 떼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먼저 선수를 쳤다.
포근한 꽃잎처럼 살짝 짓눌린 살이 인두처럼 뜨거웠다.
그대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숨결이 차올랐다.
“노아랑 같이 있으니까 좋았어?”
갑자기 생뚱맞게 에이든 얘기는 왜 하는 걸까.
엘레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어미 새처럼 여전히 그녀를 쪼아댔다.
“대답해야지.”
“응. 아…!”
대답을 하자마자 바로 혀를 세게 빠는 바람에 민망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는 싱긋 웃으며 입술을 살살 핥았다.
“좋았어?”
“응… 아!”
그러자 이번엔 핥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프긴 아팠다.
“좋았냐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약간 화가 나 보였다.
오늘따라 붉은 눈이 더욱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파, 왜 이래…!”
엘레나는 가슴팍을 짚었던 손으로 그를 세게 밀쳐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큰 손으로 뒷덜미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말랑거리는 입술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카루… 스…!”
그녀는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온몸 구석구석 그가 닿는 곳마다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내 거야, 당신은.”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녀를 탐하는 몸짓에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이곳저곳 훑는 손짓이 어색했다.
“아무도 못 가져가.”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어린아이의 투정을 들어주듯 그를 살살 달랬다.
저번에 밖에 나가서 또 심술이 나버린 것일까.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자, 이리 와. 여기 앉아.”
엘레나는 그의 등을 쭉 밀며 자리로 안내했다.
사내의 몸을 움직인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의자 앞에 선 데카루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당신이랑 같이 먹을 거야.”
“뭐? 꺄악!”
그는 엘레나의 등과 다리를 받쳐 들더니 그대로 품에 안았다.
놀란 엘레나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뭐, 뭐 하는 거야!”
“쉿, 엘레나.”
그는 문 앞에 위치한 의자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바로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팔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황한 엘레나는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뭐야?”
빙그레 미소 짓던 데카루스를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잘 익은 닭을 썰었다.
그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그때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의 걸 뺏어 먹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이상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그는 입 앞에 조각난 닭고기를 들이댔다.
“먹으라고?”
그는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이러는지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에 따라 한 입 먹어주었다.
“잘 먹네.”
그는 아기 새에게 밥 먹이는 어미 새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다시 고기를 잘라 입 앞에 갖다 대었다.
“나 혼자도 먹을 수 있어. 당신은 당신 거나 먹어.”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치 로봇처럼 썰고 입에 넣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건 뭐 중병 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 여행 간다며. 아까 전하께서 그러셨어.”
데카루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몇 초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엄청나게 큰 토마토를 집어 입에 넣는 게 아닌가.
“이건 너무 크…!”
“앞으로 노아랑 만나지 마.”
그가 억지로 먹인 토마토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입 안에 든 대왕 토마토를 오물오물 먹으며 인상을 구겼다.
“애? 다시이 몽데 망나질 마래?(왜? 당신이 뭔데 만나질 말래?)”
그러자 그는 다시 엄청 큰 풀떼기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아! 이거르 즈며 어뜨해!(야! 이걸 주면 어떡해!)”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 들지가 않아.”
그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엘레나는 짜증이 난 듯 재빠르게 우걱우걱 음식을 씹어 삼켰다.
“밖에도 못 나가게 하면서 친구도 못 만나게 해?”
그녀는 하소연하듯 입을 뾰족 내밀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침묵하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은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노아가 좋아졌어?”
당연한 말을 물으니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엘레나는 당황한 듯 눈을 두어 번 굴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이 답답한 곳에서 처음 생긴 친구라고. 당신은 모르면서.”
왜 그가 자꾸 에이든과 함께 있는 걸 막는지 모르겠다.
밖에 안 나가고 얌전히 고분고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것일까.
엘레나는 한껏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살짝 웃더니 흐드러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 나가도 좋아.”
“…뭐?”
“어디든 나가도 좋다고. 광장이든 당신 친구든. 만나고 와.”
난데없는 충격 발표에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러는 거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이 인간도 죽으려고 그러나?
어디가 아픈가?
순간 지구가 자전하듯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이상하다.
“갑자기 왜 그래?”
엘레나는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기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냥, 선물이야.”
그는 따끈한 빵을 들어 천천히 캐비어를 발랐다.
여유 있는 모습을 보니 큰일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릿속은 유성이 몰아치듯 수만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당신 죽어?”
“뭐?”
“당신 죽냐고.”
그는 순간 고개를 돌려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갑자기 죽을병에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그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내가 왜 죽어. 당신이랑 평생 같이 살 건데.”
평생 같이 살 거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레나는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왜 그래? 갑자기 죽을 사람처럼.”
“당신 눈에 자꾸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비쳐.”
다른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설마 에이든?
아니, 설마 이 인간 지금 질투라도 하는 건가?
“당신…. 설마 질투해?”
입 밖으로 내뱉고도 웃긴 말이었지만 나름 진지했다.
하지만 질투가 아닌 이상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테다.
“…….”
데카루스는 아무 말 없이 눈썹을 찌그렸다.
심각하게 고뇌하는 표정이 퍽 우스웠다.
그는 접시 위에 먹던 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 이 인간 질투하는 거 맞구나.
그런데 자기가 눈치채지 못하는 거였어.
“하… 카루스. 황자님은 그냥 친…!”
“친구도 안 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자도 아닌데 마음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이 문구는 대체 뭘까.
요새 잊고 있었다.
이 인간은 벽이라는 것을.
암만 공을 던져봐도 넘어가지 않고 튕겨내는 벽.
“하아. 그래, 당신 마음은 잘 알겠는데….”
“잘됐네, 그렇게 한 번에 이해할 줄은 몰랐는데.”
“카루스…!”
탁-
나이프를 들고 있던 손이 테이블과 마찰했다.
한참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이내 그녀를 향했다.
“어차피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거야. 당신, 바빠질 예정이거든.”
“뭐?”
밑도 끝도 없는 화법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앞으로 에이든을 왜 못 만나게 되는 건지.
그리고 왜 바빠질 예정인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