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
이렇게 완벽한 하루가 있을까.
“제인, 나 머리 따줘!”
“어머, 아가씨께서 웬일이세요? 머리를 다 따달라고 하시고.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그런 게 있어!”
오늘은 에이든이 오기로 한 날이다.
이렇게 매일같이 에이든을 볼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은 하루하루다.
“음, 음-”
엘레나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앞에 앉았다.
새하얀 피부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잘게 빛났다.
“제인이 머리 따줄 때가 가장 좋아.”
“저도 아가씨가 즐거워할 때면 정말 좋아요.”
제인은 신이 난 엘레나가 귀여운지 피식 웃었다.
팔짝거리는 모습이 꼭 토끼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세요? 엊그제 비를 많이 맞으셨다면서요.”
“응, 나 튼튼하잖아. 괜찮아. 걱정 마, 제인.”
“튼튼하시긴. 예전에도 쓰러져 놓으시고선….”
엘레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에이든의 생각밖에 없었다.
오면 정원 산책이나 하자고 할까.
그리고 유리 온실에서 멋들어지게 티타임을 갖는 거지.
“흐흐흐….”
“자, 다 되었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고마워, 제인!”
그렇게 예쁘게 머리를 한 엘레나는 곧장 대공저 정문으로 향했다.
부리나케 뛰어간 탓에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아. 하아….”
아직 그의 마차는 오지 않았는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상심하긴 했지만 나무 그늘에 기대고 앉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 오려나….”
심심했던 탓인지 애꿎은 흙만 잔뜩 파냈다.
덕분에 땅속에 있던 지렁이를 마주하고 소리를 왕창 질렀지만 말이다.
“아오, 깜짝이야.”
평소에 벌레의 벌자만 들어도 기겁하는 엘레나에겐 지렁이는 천적이다.
“죽이지 않은 거에 감사해라, 지렁이야.”
물론 바퀴벌레 같으면 무조건 바로 죽였을 테지만.
“어?”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에이든일 거라 확신한 엘레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창살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아, 아가씨…!”
“어, 안녕?”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위병들은 화들짝 놀라며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듯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저깄다!”
저 멀리서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빛 마차가 힘차게 굴러왔다.
“에이든이다…!”
그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창문 쪽을 내다봤다.
꿀을 발라놓은 듯한 금발에 우유처럼 말간 피부는 에이든밖에 없다.
“에이든!”
엘레나는 목청껏 소리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차 내부에서도 소리가 들린 것일까.
고개를 돌린 에이든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쩍 벌렸다.
“네가 무슨 죄수야! 빨리 얼굴 빼!”
창문을 연 그는 기함하며 크게 외쳤다.
아무래도 쇠창살에 머리를 집어넣은 탓에 놀란 듯했다.
“괜찮으니까 빨리 오기나 해!”
이윽고 마차는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서둘러 내린 에이든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다가왔다.
“이거 얼굴 빠지긴 하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바보냐?”
엘레나는 창살에서 얼굴을 빼 보이며 말했다.
바보도 아니고 그런 걸 모르고 집어넣었을 리가.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그의 등장과 함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귀를 막고 서 있자 에이든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겹쳐주었다.
“이제 됐어. 가자.”
“응, 근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난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엘레나는 고개를 쳐들고 저보다 두 뼘은 큰 그를 바라보았다.
“새벽부터 달려왔어. 아침도 거르고.”
“그래서 눈 밑이 이렇게 또 까맣구나?”
“그래, 진짜 세상에 이런 친구가 어딨냐.”
“너 말고 없지.”
엘레나는 기쁜 듯 팔짱을 끼며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에이든은 화들짝 놀라며 뭐에 물린 사람처럼 팔을 떼어냈다.
“왜, 이제 내가 손대는 것도 싫냐? 어?”
심술이 난 엘레나는 너른 어깨를 마구 때렸다.
너무 많이 맞아 어깨가 곤죽이 된 에이든은 울먹이며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라.”
“악마….”
“뭐?”
“아니, 아니. 나 잠시 형 좀 만나고 올게. 넌 방에 올라가 있어. 잠깐이면 돼.”
엘레나는 세모 눈을 하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에이든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사라졌다.
뭐, 그를 먼저 만난다고 해서 서운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제 하루 종일 에이든을 볼 수 있으니까.
* * *
대공저, 집무실
똑똑-
“들어와.”
“형.”
노아는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미소 지었다.
오늘도 역시 서류들에 어지러이 둘러싸인 데카루스가 보였다.
“노아? 또 무슨 일이야.”
“그냥, 형 보고 싶어서?”
노아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사실 시종에게 전멸한 첩자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노아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친동생같이 소중한 가족이지만 의심쩍은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확한 물증 없이 그를 몰아세울 수 없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고.
분명 그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다.
“형, 표정이 안 좋아. 어디 아파?”
“아니,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럼 내가 안마해줄게.”
노아는 소파를 빙 돌아 그의 뒤에 섰다.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덧 다 큰 사내가 되었다니.
아이를 키운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엘레나와 아이를 키운다는 상상을 한 데카루스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좋아? 귀는 왜 빨개”
“어. 좋네.”
“그럼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소원?”
노아는 잠시 고민하듯 입을 달싹였다.
대체 무슨 소원인지 들어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노아는 이내 말을 이었다.
“우리 여행 가자.”
“여행?”
여행이라니.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도 없다.
데카루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노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래, 여행. 엘레나도 바람 좀 쐬어야 하지 않겠어? 듣자 하니 여기 두 달째 박혀있다던데.”
박혀있긴.
다람쥐처럼 몰래몰래 잘만 나돌아다니는데.
“근데 너도 알잖아. 그러다가 황족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형은 너무 과잉보호야.”
노아는 소파에 어깨를 축 늘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과잉보호라니.
이건 그저 엘레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황궁 사람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기에.
“과잉보호. 변장만 살짝 해도 아무도 못 알아볼걸?”
“…….”
“그리고 황족들은 연례행사 때나 가끔 나오잖아. 마주칠 일이 없다고.”
노아의 말은 일리가 있다.
황족들은 국장, 탄신일, 국경일 같은 날만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위험해, 노아.”
“형은 너무 고리타분해.”
“노아.”
“애가 하루하루 말라가잖아. 응? 너무 안쓰러워서 그래.”
“생각해 볼….”
“생각이고 자시고, 형. 그러다 엘레나 누가 채간다?”
데카루스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눈을 치켜떴다.
이곳에서 그녀를 데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데려갈 수조차 없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절대 살아서 나갈 순 없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여긴 나밖에 없는데 감히 누가.”
“왜 형밖에 없어?”
“뭐?”
“내가 있잖아.”
노아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카루스는 눈썹을 구기며 입매에 비소를 머금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엔 묘하게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너 대체 무슨 소리야.”
그는 이를 까득 깨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눈동자는 곧 사냥을 시작할 늑대처럼 사납게 빛났다.
“나처럼 잘생긴 사람이 어디 흔해? 게다가 권력과 지위까지. 이러다가 엘레나가 나한테 반하기라도….”
“…….”
“와. 장난이야, 장난. 표정 좀 풀어. 살벌하다, 진짜.”
쾅-
그는 불만이라도 표하듯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 반동에 찻물이 차 받침대와 책상 여기저기에 흘러내렸다.
“그런 소린 장난으로라도 하지 마.”
살짝 놀란 노아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설마 형 엘레나한테 진심이야?”
데카루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감정 표현에 서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진심이다.
노아는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그럴 줄은 몰랐네. 어쩐지 저번부터 손을 꽉 잡고 있더라.”
“…….”
“난 그냥 형이 그저 아끼는 여동생을 지키려는 줄만 알았지. 미안, 내가 장난이 심했어.”
“됐어. 우리끼리 사과는.”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차 받침대에 흐른 물을 바라보았다.
“이만 가볼게. 아, 여행은 가는 거 맞지? 나 기대한다?”
“…그래.”
데카루스는 그의 적극적인 공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노아는 그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가 앉았다.
“역시, 우리 형. 사랑해.”
놀랄 새도 없이 노아가 데카루스를 꽉 껴안았다.
당황한 데카루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노아 너…!”
“나 간다!”
쾅-
거대한 굉음이 저택 한가운데를 크게 울렸다.
어쩐지 노아의 표정은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데카루스의 온기가 남은 옷을 마구 털어냈다.
“아, 옷이 더러워졌네.”
그는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저 멀리 엘레나의 방문이 보이자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혹시라도 흐트러진 곳이 없나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했다.
“우리 공주님, 기다리시겠다.”
노아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이토록 떨리는 순간이 있을까.
똑똑-
“들어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높은 목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작은 새처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엘레나가 이 방 안에 있다.
그녀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주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됐다.
“레나.”
사근사근 뛰어오는 모습이 요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원피스 끝자락조차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왔냐?”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 발그레 붉어진 두 볼.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너.
품에 안고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살짝 쥐어도 부서질 것 같은데 감히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한 번에 머금으면 사라질 것 같아.
“왜 이렇게 늦었어? 하여간 느려터져 가지곤. 이리 와. 내가 차 끓여줄게.”
해맑은 웃음을 품은 입술마저 갖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까.
찻잔을 잡은 작은 손짓마저 갖고 싶다면 그건 탐욕일까.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이리 오라니까.”
물감이 번지듯 맞닿은 온기가 서서히 퍼진다.
“자, 여기 앉아.”
어깨에 닿은 손가락을 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만지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기에.
“무슨 차야?”
“카나리아 제국에서 온 칸나티야. 요새 이것만 마셔. 향이 아주 좋아.”
작은 쥐처럼 귀엽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근데 무슨 얘기 하고 왔어?”
“아, 좋은 소식이 있지. 우리 여행 갈 거야.”
“여행?”
안 그래도 큰 눈을 크게 뜬 엘레나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비쳤다.
“응, 여행.”
“아니, 카루스가 허락했어?”
“당연하지. 이게 다- 내 덕 아니겠어?”
탁-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으로 다가왔다.
울먹거리는 표정이 꽤나 귀여웠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무섭게.”
“에이든!!!”
순간 작은 몸이 그에게 돌진했다.
가는 팔로 얼싸안은 목이 살짝 조여왔다.
엘레나에게선 향긋한 복숭아 향이 났다.
순식간에 매료되어 저도 모르게 안아버릴 뻔했다.
“야, 너 그렇게 아무나 막 안아버리면….”
“너 진짜 내가 여행 가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아서!”
순진무구하게 웃는 널 보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만 같아.
“역시 최고의 친구!”
꽉 조이는 그녀의 팔에 숨이 막혔다.
뭐, 이대로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근데 어디로 가는데?”
엘레나는 무척이나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였다.
“남부 별장으로 갈 거야. 바다가 있는 곳.”
“바다라니!”
두 손을 맞잡은 엘레나는 허공에 대고 눈을 반짝였다.
“우리 그럼 조개도 구워 먹고 그러는 건가?”
“넌 벌써 먹을 생각부터 하냐?”
“왜, 불만이라도 있어?”
그녀는 심술이 난 듯 세모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순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그날 입을 옷을 골라놔야겠어.”
“살쪄서 안 맞을 것 같은데.”
“야!!!”
“아!!! 때리지 마!”
이렇게 좋아하는 널 보면 점점 더 욕심이 나.
닿으면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너도 사라질까 봐 무서워.
이런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널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엘레나.
나의 천사.
그저 이대로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