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황궁, 크리스탈 궁.
“좋아한다라….”
검은색 가운을 입은 남자는 테이블 위에 이마를 괸 채 비틀거린다.
떨리는 손이 독한 브랜디를 흘러넘칠 만큼 따랐다. 거칠게 술병을 놓은 남자는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그의 눈빛은 독을 품은 뱀처럼 독살스러웠다.
“그래, 좋아할 수 있지….”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다가 이내 단번에 들이켰다.
독한 술의 목 넘김은 마약처럼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입매를 떨며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형이면 안 되지….”
쾅-
“죽여 버릴 수가 없잖아.”
꼭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져 제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난 형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그는 술에 취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어떻게 엘레나를 빼앗아 가….”
겨우, 겨우 9살 남짓한 나이였다.
엘레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건.
“절대 빼앗길 수 없어….”
* * *
사람들에겐 한 번쯤은 암흑기가 있다.
보통 인생의 중반쯤에 그 시기가 오곤 하는데,
그는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름 모를 친어머니에게 버려져 길거리를 떠돌았고, 황자가 되어서는 된 이후로는 황궁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살아왔다.
약한 어머니를 향한 화살은 결국 그에게 돌아왔다.
황후는 어머니를 빌미로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네 어미를 죽일 것이냐 아니면 네 어미와 함께 황궁의 최고 권력자가 될 것이냐.’
결국 황후의 명령과 함께 비밀리에 시작된, 훈련을 가장한 황제 독살 임무.
그저 힘없는 어머니를 살리고, 이 넓은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그 족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점점 더 조여왔다.
“내 딸을 죽이거라, 노아.”
“예?”
처음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죽은 딸을 죽이라니.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라는 말인가.
“하, 그래. 다들 엘레나가 죽은 줄로만 알겠지.”
“…….”
“한데 아니더군. 목숨이 질긴 건지 잘도 살아남았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후 폐하….”
그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는 걸까.
또 엘레나를, 자신의 딸을 죽이라고?
“아아, 황자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엘레나는 사라진 게 아니랍니다. 이 황후가 갖다 버렸지요.”
황후는 고개를 쳐들며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그 모습은 가히 악마의 형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탁이 왔답니다. 내 딸이 나를 죽일 거라는 신탁. 이 황후는 무서워서 잠조차 잘 수가 없더군요.”
“…….”
“매일매일이 지옥이더군요. 죽음으로 점철된 삶이라니. 너무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황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에 선 핏줄이 그녀의 광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
“그렇게 내 딸이 점점 괴물처럼 느껴지더군요.”
자글자글 주름진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피에로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데.”
“…….”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엘레나를 죽이기로.”
설마 엘레나가 사라진 이유가 저 황후 때문이란 말인가.
황후가 제 손으로 제 딸을 직접 죽였다고?
“하지만 어미가 어찌 제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겠습니까. 그래서 먼 바다로 보내버렸지요. 한데 우리 따님께서 아직도 살아있다더군요?”
황후는 미친 사람처럼 눈을 희번덕대며 말을 이었다.
“그때 마침 황자가 생각나더군요. 애초에 황제를 죽이기 위해 키웠지만 이번엔 아닙니다.”
“…….”
“내 딸을 찾아 죽여. 다신 찾아오지 못하도록.”
“저, 전… 전 못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전….”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엘레나를 죽이란 말인가.
절대, 절대 그녀의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아, 황자.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폐하….”
“네 어미를 죽인다고 해도 과연 그럴까.”
“폐하…!”
“너와 네 어미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황후의 덕이지. 네 덕이 아니야, 노아.”
그녀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듯 그를 조종했다.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는 개처럼 그는 황궁의 개가 되었다.
“폐하, 한 번만… 한 번만 자비를 베푸소서. 폐하….”
그렇게 아홉 살이란 나이에 엘레나를 죽이라는 황명을 받았다.
그녀는 아르데오의 한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버려진 충격인지 그녀에겐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기에.
“안녕, 엘레나.”
그렇게 매일같이 그녀를 죽일 방법을 모색했다.
목을 조를까, 칼로 찌를까.
아니면 절벽에서 밀어버릴까.
그것도 아니라면 불에 태워 모두를 죽일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감히 이 손으로 저 작은 생명을 죽일 수가 없었다.
분명 많은 개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는데도.
그녀를 해한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에이든!”
이곳에서의 이름은 에이든이었다.
에이든 밀러.
처음에는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 작고 어여쁜 입술에서 나오는 에이든이란 단어가 좋았다.
조그마한 몸짓으로 살랑거리는 그녀가 좋았다.
그렇게 조금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려두자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달빛이 어린 동그랗던 눈이 말했다.
살려달라고.
여기서 도저히 살아나갈 수가 없다고.
“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에이든.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
엘레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몸도 마음도 전부 녹슬어 있었다.
그 어린 소녀가 목이 쉬도록 울어댔다.
마음 같아선 보육원 원장과 아이들을 전부 죽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우리는 도망쳤다.
부엉이가 조용히 자장가를 불러주던 밤.
별님이 예쁘게 하늘을 수놓은 밤.
작은 엘레나와 함께.
“에이든, 네가 정말 좋아.”
작은 입술로 그 더러운 이름을 불러주던 너.
따듯한 손으로 머리를 매만져 주던 너.
호수를 닮은 눈으로 예쁘게 웃어주던 너.
네 전부가 다 좋았다.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린 아르데오를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더워도 그녀와 함께라면 상관없었다.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해도, 얼음길을 걷는다고 해도.
“에이든, 난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
“부모도 돈도 없는 내게 넌 이 세상의 전부거든.”
엘레나는 가끔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마치 이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의젓한 면이 있었다.
분명 예전엔 마냥 어리기만 했었는데 말이다.
황후에게 버려진 이후로 충격을 많이 받은 것일까.
“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 * *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옛 생각에 빠져있던 노아는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를 만나러 가볼까.”
바닥에 이리저리 어질러진 술병들이 발에 챘다.
그는 거울 앞으로 가 머리를 몇 번 매만지곤 향수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의 알현인데 술 냄새를 풍길 순 없으니.”
황후전에 들기까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과연 황후가 돌아온 그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아쉬워할까 아니면 또 죽이려 들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까.”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 그따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감히 황제를 저버리고 황후의 개가 되어 목줄이 묶인 꼴이란.
참으로 우스웠다.
“8황자가 왔다고 황후께 전해.”
“예.”
“8황자 노아 폰 제네우스 전하께서 드십니다!”
끼익-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곧 문이 열렸다.
제 키보다 세 뼘은 더 큰 거대한 문이 열리자 베일 너머로 황후의 실루엣이 비쳤다.
방 곳곳에는 황후를 뜻하는 금색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길을 따라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를 맞이했다.
“8황자 노아 폰 제네우스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게 누구십니까. 노아. 이리로. 가까이 와요.”
시녀들이 금실로 짜인 베일을 걷자 황금빛 부채를 손에 쥔 황후가 보였다.
한층 높아진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황후 폐하.”
그는 무릎을 꿇고 최대한의 예를 표했다.
이내 황후는 그만두라는 손짓을 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황후는 황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답니다. 어서 고개를 들어요.”
황후는 금실로 수놓아진 부채로 입을 가렸다.
저를 향해 쏘아대는 뱀눈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낯선 그녀의 말투에 온몸은 한겨울 바람을 맞은 듯 소름이 돋았다.
“그 곱던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황자.”
“…….”
그의 침묵에 황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대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십 년 넘게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송구하옵나이다, 황후 폐하.”
“이 황후가 무엇을 가장 듣고 싶어 하는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황자.”
그녀는 거북이처럼 목을 주욱 늘여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황후 폐하.”
“어허, 황궁의 개가 그 정도 눈치도 없어서야.”
황후는 금빛 부채를 탁 접으며 호통하듯 소리쳤다.
“혹 임무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소름 끼치게 미소 지었다.
“엘레나.”
“…….”
“우리 엘레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표독스러운 안광에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황후를 보면 생각이 전부 다 읽히는 기분이었다.
“엘레나, 우리 따님께서 살아계신다면 황자의 목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갈 겁니다.”
“분부하신 명에 따라 황태녀를 죽였습니다, 폐하.”
황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황자는 왜 이리 오랜 세월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걸까… 심히 궁금하군요.”
“황태녀를 죽인 뒤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황후는 이가 보일 정도로 대소했다.
귀를 찌를 듯한 웃음소리가 방 내부를 가득 울렸다.
“황자께서 퍽 재밌어지셨습니다.”
“황송하옵니다, 황후 폐하.”
“약속대로 황비는 무사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아쉬운 듯 머리를 매만지며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한데 이번엔 데카루스가 문제군요, 황자.”
“송구하옵니다만 황후 폐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데카루스가 제1계승권자가 된 지 오랩니다, 노아.”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기에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까.
노아는 이해하지 못한 척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는 이가 있어야 되겠습니까.”
“폐하. 설마….”
“그러니 이번엔 스큘러스 대공을 죽여야겠습니다. 시간은 전처럼 오래 걸리지 않겠지요. 황궁 최고의 첩자이시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