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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49화 (49/117)

49화.

“소원? 무슨 소원?”

엘레나는 길 잃은 아기 고양이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식, 웃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건 나중에.”

“뭐야, 진짜.”

엘레나는 잘 익은 풋사과처럼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네 얘기 해줘.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카루스 형이 잘 해줘?”

“뭐? 아니! 그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면 그에게 걱정만 끼칠 게 뻔했다.

더 이상은 에이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뭐, 응… 잘해줘.”

엘레나는 풀이 죽은 토끼처럼 고개를 수그리며 답했다.

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 놓고 스스로 거짓을 고하는 꼴이라니.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정말 잘해주는 거 맞아?”

“응, 진짜라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에이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에게 토로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게.”

엘레나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떠들썩했던 방안엔 어느새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용히 케이크를 바라보던 에이든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

“형 좋아해?”

“뭐???”

엘레나는 뒤집어질 듯이 놀라며 눈을 크게 부풀렸다.

지금까지 살면서 들은 가장 어이없는 말 중 하나였다.

완전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아닌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흠칫 놀랐다.

“누가 누굴 좋아해?”

에이든은 멀뚱멀뚱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그를?”

엘레나는 손으로 가슴팍을 빠르게 짚으며 얼굴을 팍 구겼다.

“대체 왜???”

“결혼.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 아니었어?”

“자, 친구야. 잘 들어 봐.”

엘레나는 머리가 아픈 듯 혈 자리를 눌러가며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친구를 오늘 당장 계몽시켜야 한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일단 난 그를 좋아하긴커녕, 싫어해.”

“…….”

“그리고 그건 내 의지로 한 결혼이 아니야. 난 명백한 피해자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에이든은 눈썹 사이를 한껏 좁히며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힐끔거리며 시녀의 눈치를 보던 엘레나는 목소리를 낮추곤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넌 속은 거야. 네 형, 그러니까 데카루스는 정상이 아니라고.”

그러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완전 또라이야.”

“뭐?”

에이든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멀쩡했던 제 친척 형이 또라이라니.

“그 인간이 뭐라는 줄 알아? 대뜸 날 보자마자 결혼하자고 했다니까? 그날 날 처음 봤는데?”

그의 얼굴엔 대번 그늘이 졌다.

그래, 역시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데카루스를 좋아한다고 오해받는 건 끔찍이 싫었다.

“근데 그런 무대포에, 이기주의자에, 나사 하나 빠진 인간을 내가 좋아해?”

“…….”

“말도 안 돼.”

“…그래?”

에이든은 쿠션에 팔을 괴곤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잠시 상념에 잠긴 듯한 그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냥 네가 형을 많이 따르는 것 같길래.”

“내가… 그를 따른다고?”

그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진 건 착각일까.

에이든은 그녀의 머리칼을 마구 흩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어? 벌써?”

엘레나는 올망졸망한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그가 가면 다시 이 넓은 저택에서 혼자가 된다.

너무나도 아쉬워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에이든은 머리에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내일 또 올까?”

“진짜? 그래도 돼?”

“응, 당연히 되지. 널 만나러 오는데.”

“좋아!”

엘레나는 번쩍 일어나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진짜 좋아. 근 한 달 만에 오늘이 제일 행복해.”

“나도 그래.”

“내일 꼭 와야 해. 안 오면….”

끼익-

문이 열릴 때마다 느껴지는 이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것일까.

그의 품에서 몸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익숙하고도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데카루스였다.

“껴안기까지 할 정도면.”

그에 놀란 엘레나는 마치 용수철처럼 튕기듯 몸을 떨어뜨렸다.

“아, 아니. 카루스, 이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치 바람피우는 현장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는 재밌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냥 작별 인사를 한 건데. 왜? 문제 될 거 있어?”

아르데오의 인사법은 포옹하며 두 뺨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만난 외국인들은 이 독특한 인사법에 조금 당황하기도 한다.

“아, 그래?”

언짢은 듯 팔짱을 낀 그의 모습이 퍽 웃겼다.

에이든은 곧장 뒤를 돌더니 예쁘게 입매를 올려 미소 지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영애.”

목소리를 낮추며 인사하는 에이든은 다시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기품 있고 정중한 모습이 정말 왕자님이라도 되는 듯 보였다.

“형, 가볼게.”

“그래, 엘레나. 잠시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응….”

그를 마중하러 나가는 것일까.

엘레나는 멀뚱멀뚱 서서 방문을 열고 나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끼익-

“휴….”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순간에 들어와 가지고!

“하여간 타이밍은 더럽게도 잘 잡아.”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빛깔 좋은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형형색색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가 군침을 돋웠다. 최고의 디저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단연 마카롱이 아닐까.

그렇게 달콤한 풍미를 느끼며 입을 우물거릴 무렵 그가 다시 돌아왔다.

끼익-

“엘레나.”

열린 문틈으로 드러난 희멀건 얼굴은 왠지 아까보다 평온해 보였다. 웬일인가 싶어 눈을 세모나게 뜨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숙련된 모델 같았다.

“이리 와.”

그는 앉자마자 팔을 뻗어 여린 몸을 끌어당겼다.

너른 어깨에 폭삭 안긴 엘레나는 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아깐….”

“그, 그냥 인사한 거니까 뭐라고 하지 마.”

엘레나는 입을 댓 발 내밀곤 툴툴거렸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는지 데카루스는 장난스레 머리에 얼굴을 부비며 허리를 세게 조였다.

“숨 막혀.”

“다른 남자 안은 죄야.”

“몇 초 안 안았어.”

“응, 알았으니까 이제 우리 얘기만 해.”

그는 질투라도 하는 듯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이럴 때 보면 꼭 어린애라도 되는 것 같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뭐 했어?”

“포레 가 정찰 겸 탐방. 어젯밤에 그쪽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뭐?”

포레 가라면 어젯밤에 에이든과 갔던 오두막이 있는 곳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언제?”

소름이 돋았다.

어제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건데.

“밤으로 추정하고 있어. 무려 여덟 명이 한 사람한테. 실력이 좋은 자야.”

“아….”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든도 무사하니 말이다.

게다가 에이든은 싸움도 못 하는데 까딱하면 거기서 죽었을 수도 있었단 말 아닌가.

“그래서, 이제 말해야지.”

“…뭘?”

“비 오는 날 당신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아….”

그의 말에 온몸이 굳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크다.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비를 맞고 싶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냥 뭐.”

“친구를 만나고 왔어.”

“누굴?”

“수.”

“수?”

수를 만나고 왔다는 건 사실이니까, 뭐.

거짓말은 아니다.

“응, 수. 내 소중한 친구 중 한 명이야.”

“가서 뭐 했는데.”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허리를 꽉 감았다.

물먹은 듯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귓전에 감겼다.

“그냥 맛있는 밥 먹고 왔어. 일도 도와주고.”

“집에서 먹는 밥이 맛없었어?”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또 이삭이야?”

큰일 났다.

이번 일을 이삭이 도와줬다고 하면 이삭은 또 죽어나는 게 아닐까.

“아….”

“이삭이겠지.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이, 이삭은…!”

엘레나는 어깨에 닿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이삭은 잘못 없어.”

“그럼 누구 잘못인데. 또 당신 잘못?”

“응….”

그는 답답하다는 듯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었다.

또 묶이는 건 아닌지.

아니면 어디에 갇히는 건 아닌지.

순간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나 또 가둘 거야?”

“아니.”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살짝 놀랐다.

개과천선한 건지.

엘레나는 몸을 살짝 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당신 마음속으로 생각해 봐.”

그의 말에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엘레나는 눈을 찔끔 뜨고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생각 안 나면?”

그는 피식 웃더니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생각나게 해줄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은 것은.

엘레나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아직 생각이 안 나나 보네.”

말을 할 때마다 닿는 입술 끝이 간지러웠다.

꼭 보송보송한 솜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살짝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녀를 삼켜버렸다.

“읍…!”

“입 벌려.”

거침없이 파고든 살덩이가 그녀의 혀와 뒤엉키며 춤추었다.

엘레나는 하얀 셔츠를 꽉 쥐며 달뜬 호흡을 내뱉었다.

“카루스…!”

“응, 괜찮아.”

그는 타액으로 엉망이 된 입술 주위를 찬찬히 핥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이 입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당신만 몰라.”

“무슨….”

“당신이 이미 내게 물들어 버린 거.”

은사처럼 빛나는 타액이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났다. 엘레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 닿은 코끝은 인사라도 하듯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두꺼운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진득하게 밀어냈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그의 말대로 맞닿은 왼쪽 가슴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엘레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가지런히 뻗은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럼 계속 할까.”

“뭐, 뭘?”

데카루스는 다시 한번 말없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새가 먹이를 쪼듯 산뜻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틀며 얼굴 전체에 반복적으로 키스했다.

이걸 가만히 받고만 있자니 되레 민망했다. 일순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잠시 그를 막아 세웠다.

“자, 잠깐….”

그는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리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뭐라도 빨리 말해 보라는 얼굴이었다.

“이런 건 부끄러워….”

그는 이마에 주름을 지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마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붉게 물든 귓바퀴는 금세 그의 손에 점령당했다. 엘레나는 찐빵 같은 두 볼을 쥐어가며 시선을 피했다.

“언제쯤 알아줄까.”

“…뭘?”

“당신 마음을.”

“난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매를 올렸다.

꼭 이미 진실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한 미소였다.

“곧 알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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