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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48화 (48/117)

48화.

그의 방문을 알리는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가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섞였다.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하지?

말투는?

그를 황자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겠지?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했던 실루엣이 보였다.

천사의 탄생처럼 그의 등장과 함께 후광이 비쳤다.

햇살에 비쳐 밝게 빛나는 백금발 머리, 태양을 담은 진한 금빛 눈동자.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단정한 제복.

그리고, 그 위를 장식한 호박석 브로치.

“노아.”

“형.”

브로치를 보자마자 그가 에이든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본래 알던 에이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허름한 옷이 아닌 제 키에 딱 맞는 검은 제복.

천으로 덧댄 신발이 아닌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부츠.

황궁을 상징하는 금빛 배지들.

동화 속에서나 보던 왕자님 같았다.

“아….”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다.

“엘레나, 전하께 예를.”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자 데카루스가 조용히 언질을 주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엘레나는 뒤늦게 치맛자락을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엘레나 진정해.

이 사람은 지금 에이든이 아니야.

그저 8황자 노아일 뿐.

“화, 황자님을… 뵙습니다.”

침착하게 행동하리라 다짐했건만.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들게.”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엔 말간 우유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에이든이 보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영애.”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엘레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혼란스러웠다.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저 얼굴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영애께서 워낙 긴장을 많이 하셔서. 그럼 이만 들어가지.”

데카루스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맞잡곤 응접실로 향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맞물려 요동쳤다.

끼익-

응접실 내부는 그를 위한 고급스러운 다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3단 트레이에는 스콘, 마카롱, 타르트 등 가지각색의 디저트들이 즐비했고 그 옆에는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는 티 박스가 놓여있었다.

“너무 신경 쓴 거 아니야?”

에이든은 테이블을 천천히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앉는 모습 또한 왠지 모르게 기품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신경 쓰긴.”

데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땀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그 덕인지 긴장감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침에 소식을 듣고 놀랐어.”

“이유랄 건 따로 없어. 그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온 거니까.”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일까.

흘깃 바라보는 시선엔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났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어, 노아.”

“형, 형이 좀 봐줘. 형도 너무 보고 싶었단 말야.”

에이든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새삼 다른 그의 표정이 낯설었다.

“넌 여전히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해.”

데카루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시녀가 따라주는 차를 받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색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태어나서 에이든과 데카루스가 대화하는 장면을 보다니.

이건 거의 아침 드라마급 막장이다.

“내가 그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끼어들 틈이라곤 없었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에이든과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냥 이대로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듯한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전 영애와 친해지고 싶은데, 영애께서는 평소 어떤 것을 즐기십니까.”

그의 말에 순간 찻잔을 놓칠 뻔했다.

에이든 이놈이 아주 작정을 하고 왔나 보다.

불편해 하는 걸 알면서도 말을 걸다니.

그래, 지금 한번 해 보자는 거지.

엘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산책하는 것을 즐깁니다, 전하.”

“아, 그렇다면 오랜만에 정원을 둘러보고 싶군요. 영애와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오랜만’이라고 한 건가?

저번에 정원에서 그런 미친 소릴 해놓고선?

“송구하옵니다만 제가 낯을 많이 가립니다, 전하. 특히 ‘처음’ 보는 사람과는 말이죠.”

순간 에이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면 착각이었을까.

엘레나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가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으론 온갖 쌍욕을 다해댔다.

그걸 눈치챘는지 에이든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 그러시다면야….”

“저, 대공 전하.”

문 앞에 가지런히 서 있던 집사는 화들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소파 앞에 선 그가 귓가에 손을 대고 짧은 밀어를 속삭이자 데카루스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잠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 둘이 잘 얘기하고 있어.”

“뭐? 데카…!”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도록 해. 금방 올 테니까.”

쾅-

그가 떠나자마자 에이든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나.”

“앉아.”

그런 모습을 하고 애칭을 부르는 건 마냥 어색했다.

차라리 이름을 부르는 게 덜 어색할 정도였다.

“너 미쳤어?”

“레나….”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너 진짜 정신 나갔어?”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하….”

퍽 기대가 되었다.

또 무슨 실망을 안겨주려고 이러는지.

“할 말? 무슨 할 말? 내가 어제도 분명 기회를 줬…!”

“말할게. 전부.”

그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단호한 눈빛이 오늘은 정말 진실을 알려줄 것 같았다.

“하… 그래. 여기까지 온 데엔 이유가 있겠지.”

엘레나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곤 어디 들어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너처럼 처음부터 버려진 아이였어.”

* * *

출신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른 채 버려졌다.

처음 발견한 곳이 집창촌이라고 하니 창녀의 아이였겠지.

그때를 기억하라고 하면 그저 춥고 배고팠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빵 한 덩이를 건네곤 했지만, 그걸론 충분치 않았다.

늘 구걸하며 사람들에게 빌빌 기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맑은 손길을 건넸다.

“넌 누구니? 꼭 황제 폐하를 닮았구나.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말간 미소,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듯한 품, 다정한 목소리.

그가 처음으로 받아보는 호사였다.

그렇게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집도 지위도 생겼으니 천하를 호령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야, 어디서 더러운 게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 짖어 봐.”

황자들은 떼로 몰려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발에 차이고 돌덩이에 맞았다.

가끔은 개를 데리고 와 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천사 같은 어머니.

순수하신 어머니.

“노아, 꼴이 왜 그러니. 또 괴롭힘을 당한 게야?”

어머니는 항상 버선발로 나와 그를 맞이해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과 목소리에 그 어떤 아픔도 모두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어 보이면 됐다.

그저 어머니께서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황궁에서 꾸역꾸역 버텨온 순간 다시 불행이 찾아왔다.

* * *

“황명이었어. 내가 보육원에 간 건.”

“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황명이길래 황자를 보육원에 맡긴단 말인가.

엘레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며 그를 노려봤다.

“황후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어. 그래서 우선 황자들부터 없앨 계획이었지.”

“…….”

“제일 만만한 나부터 실행에 들어가더군.”

그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가 황제가 되려고 황자들을 축출한 거라고?

“황후가 왜 그런 짓을….”

“세간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황후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에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한 소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궁으로 돌아간 이유는 단 하나야.”

그는 손을 들어 곱슬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우윳빛 손가락에선 낯선 향기가 났다.

“레나, 널 찾고 싶었어.”

“…….”

“아무리 찾아봐도 네가 보이지 않더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산 브로치처럼 예쁜 눈동자가 그의 눈 속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황궁으로 간 거야?”

“그래. 다시 황자가 된다면 널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오직 널 위한 일이었어.”

에이든은 따듯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머리카락에 스치는 손길이 파도처럼 부드러웠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

“…….”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왜 여태까지 숨긴 거야, 대체?”

엘레나는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려 13년을 모르고 살았다.

그저 밀러 후작의 영식으로만 알고 살았던 그가 황자라니.

대체 왜 지금까지 숨긴 것일까.

“그때 넌 너무 어렸잖아. 7살짜리 애한테 이런 걸 말해 봤자 뭐 해. 그리고….”

“…….”

“그때 네가 환경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잖아. 부모나 배경, 물질적인 부분.”

전생에서의 기억이 함께 맞물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

두 번이나 보육원에 그녀를 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

부유한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자격지심.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겐 큰 아픔이었다.

전부 다 잊고 싶어 보육원을 탈출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바보 같아….”

부끄러웠다.

상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되레 버럭 화낸 꼴이라니.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레나.”

에이든은 말간 볼을 쓸어내리며 눈을 지그시 마주했다.

온기를 가득 머금은 따듯한 목소리가 괜찮다며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레나. 이렇게 널 찾았잖아. 난 그거 하나면 돼.”

처음부터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엘레나’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난 널 의심이나 하고….”

“솔직히 어젠 상처 많이 받았다.”

에이든은 예쁜 입매를 올리며 피식, 하고 웃었다.

순간 미안한 감정과 함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웃을 때 아니거든. 나 진짜 너한테 미안하다고.”

엘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자 머리 위엔 커다란 손이 툭 얹어졌다.

“됐어. 그 대신 네가 이거 줬잖아.”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는 어제 선물한 브로치가 걸려있었다.

고작 저런 작은 선물에 좋아하다니.

갑자기 더 미안해지는 것 같았다.

“넌 내가 밉지도 않아?”

“미웠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아가씨.”

“뭐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겉모습은 달랐지만 함께 있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아,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겠네.”

에이든은 몸이 찌뿌둥한 듯 기지개를 켜며 팔을 뻗었다.

“어제 못 잤어?”

“당연한 거 아니야? 한숨도 못 잤다. 그래서 눈 밑이 이렇게 까매.”

에이든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쭉 내밀며 눈가를 가리켰다.

정말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있었다.

“미안…. 나 때문에.”

죄책감이 든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레나, 네가 뭐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야 하는 건 나야. 그리고 이렇게 널 찾았잖아. 난 그거면 돼. 응?”

“그래도….”

에이든은 시무룩한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나 나중에 소원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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