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47화 (47/117)

47화.

“으음….”

피부에 맞닿은 온기가 따듯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따듯한 게 느낌이 좋았다.

“따듯해….”

얼굴을 비벼 보니 울퉁불퉁하고 딱딱했다.

아무래도 요샌 딱딱한 곰 인형도 나오나 보다.

게다가 보온 기능까지 있다니.

안성맞춤이다.

“아침부터 이러기야.”

곰 인형이 말도 하나.

녹음 기능이라도 있는 곰 인형일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엘레나는 하품을 쩍하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뭐야….”

눈앞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널찍한 가슴이었다.

“곰 인형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뱀파이어같이 생긴 남자가 턱을 괴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뭐야, 당신 왜 벗고 있… 아니.”

그를 보자 어제 있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꿈인가…?”

아니, 꿈이어야 했다.

어제 그런 미친 짓을 한 건 절대로 꿈이어야 했다.

엘레나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반죽하듯 꼬집었다.

“뭐 하는 거야.”

“꿈이면 깨야지.”

“보통 그건 자기 얼굴에 하지 않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손에 만져지는 촉감이 생생한 걸 보니 현실이다.

“아니, 꿈이 아니잖아.”

“당연히 꿈이 아니지.”

그는 손을 들어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순간 얼굴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어제의 몸짓과 소리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엘레나, 드디어 미쳤구나.

“난 당신이 그렇게 적극적….”

“안 돼!”

양손으로 재잘거리는 입을 꽉 막아버렸다.

민망해서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왜, 부끄러워?”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저지하며 일어섰다.

얇은 이불 위로 비치는 잘 다져진 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엘레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사람 민망하게 하는 데는 선수다.

“정말?”

피부에 닿은 손가락이 곡선을 그리며 입술로 향했다.

여린 살을 파고든 손가락엔 끈적한 타액이 묻어나왔다.

“하지 마.”

엘레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그를 피했다.

그러자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긴 팔이 제멋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왜일까. 어제와 다른 건.”

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같이 맞장구쳐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젠 그냥 실수야.”

“또 그 실수.”

데카루스는 아쉬운 듯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에게 진심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마음이 동한 것일 뿐.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그는 어쩐 일로 쉽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둥지처럼 따듯했던 품에서 벗어나니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내 동생이 집에 올 거야.”

“…뭐?”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동생이라면 노아, 그러니까 에이든을 말하는 건가.

데카루스는 놀란 그녀를 슬쩍 보곤 피식, 하며 웃었다.

“나도 갑작스레 들었어. 아까 집사가 왔거든.”

거울 앞에서 단추를 잠그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순간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가 직접 대공저까지 찾아올 줄이야.

어제 그 일이 가히 충격적이긴 한 모양이지.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도 같이 있을 거니까.”

“아니, 꼭 만나야 해? 나 좀… 불편한데.”

“황족이 직접 대공저를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어. 당신도 꼭 참석해야 해.”

“아….”

에이든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데카루스와 함께, 대공저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해….”

“별말 할 필요 없어.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이따가 제인이 안내해 줄 거야.”

“응….”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데카루스는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그럼 이따 봐. 옷은 최대한 차려입고. 황자를 뵙는 거니까.”

“알았어.”

“사랑해.”

그는 이마에 짧게 키스한 뒤 방을 나섰다.

엘레나는 괜스레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에이든….”

* * *

대공저, 집무실

무겁게 내리깔린 공기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차가웠다.

방 안에는 고개를 푹 숙인 시종과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데카루스가 있다.

“그래, 그래서 어제 보낸 이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지.”

“저, 전하… 그것이….”

시종은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탁-

탁-

탁-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상과 맞부딪칠 때마다 시종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날 귀머거리라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그를 바라보는 데카루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남자는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대답했다.

“주, 주, 죽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굽실거리던 그는 손가락을 달달 떨었다.

“죽었다… 죽었다라….”

데카루스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빨래판처럼 깊게 주름진 이마는 그의 분노를 방증해주었다.

“전멸했습니다. 이건 일반인의 솜씨가 아닙니다, 전하. 분명 귀족… 아니 황궁에서 교육받은 최정예 스파이의 짓입니다. 정확히 급소만 노려 죽였습니다.”

데카루스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재밌군.”

우리 쪽도 최정예들로만 구성해 보낸 스파이다.

한데 그걸 전멸시킬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래서 엘레나가 누굴 만나고 돌아왔는지는 모른다는 건가.”

“예, 전하. 송구하옵니다. 도저히 알 방도가…!”

“그래. 나가 봐.”

“한데….”

그는 말 못 할 비밀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뜸을 들였다.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퍼졌다.

데카루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그…그것이….”

“…….”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마지막 호흡을 떼던 첩자 중 한 명이… 8황자님을 언급했다고….”

탁-

탁-

탁-

또다시 시작된 손가락과 책상의 마찰음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는 한겨울 차가운 서리가 낀 것처럼 시렸다.

“설마….”

* * *

“제인, 나 어떡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저히 에이든, 아니 황자 노아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대공님이 계시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인은 태평해 보였다.

제인은 그저 뭘 입힐까 인형 놀이를 할 참에 신이 나 보였다.

“제이이인….”

“아가씨도 참 걱정이 많으세요. 황자님은 호탕하시고 애교도 많으시다고요.”

“뭐? 애교가 많아?”

평생 살면서 에이든이 애교부리는 건 한 번도 못 봤다.

그런데 애교가 많다고?

“네, 아가씨. 어찌나 쾌활하신지. 붙임성도 좋고요. 분명 금방 친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철판 깔고 모르는 사람인 척 대하기만 하면 된다.

데카루스가 계속 옆에 있어 주기로 했으니까.

“힘내자, 힘내.”

“아가씨, 머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오랜만에 땋아 드릴까요?”

“맘대로 해. 제인.”

그녀의 말에 제인은 신이 난 듯 눈을 반짝였다.

“휴….”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가 말을 걸면 어떤 표정으로 대답해야 할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다.

또 갑자기 그와 단둘이 놓여있는 상상을 한다면.

“끔찍해….”

“네? 뭐가요? 혹시 머리가 마음에 안 드시….”

“아니, 아니야. 계속해, 제인.”

에이든, 이놈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길 온다는 건지.

어제 그렇게 가버리고 그를 볼 면목조차 없는데.

사실 신경이 많이 쓰였다.

괜히 생각보다 더 화를 낸 건 아닌지.

그의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선 말이다.

“휴….”

아니, 아니다.

애초부터 기회를 줬는데 말을 안 한 건 에이든인걸.

게다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속일 수가 있어.

친구인데.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오랜 친구였는데도 불구하고.

진짜 서민 체험이라도 하고 싶은 거였나.

“자, 다 되었어요. 아가씨. 이제 옷 갈아입을까요?”

“그래….”

제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설렁줄을 당겨 시녀들을 불렀다.

똑똑-

“들어와.”

“말씀하신 옷들로만 골라서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시녀들은 20여 벌이 넘는 단정한 옷들을 가져왔다.

색깔별, 모양별로 종류는 다양했다.

“이게 다 뭐야?”

“아가씨를 위한 것들이에요. 아직 놀라긴 이르답니다. 장신구도 착용할 거예요.”

“뭐?”

제인은 입꼬릴 시익 올리며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평소에 안 입던 옷들을 입어 봐요.”

“응….”

뒤이어 반짝거리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담은 액세서리함이 도착했다.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 최고급 보석들이 박힌 장신구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그 황자를 만나려고 이런다는 거지…?”

“네, 그렇죠. 황족이 직접 행차하시는 건 드문 일이니까요!”

그놈의 황족이 뭔지.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거울 앞에 섰다.

순식간에 20여 벌의 옷들이 지나갔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옷들을 본 터라 뭐가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이걸로 하죠! 어때요?”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데, 뭐.

아무렴, 제인의 눈을 믿기로 했다.

“좋아.”

새하얀 쉬폰 원피스에 보석이 달린 검은 리본 브로치.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살짝 박힌 금색 귀걸이까지.

깔끔하면서 단정하니 황족을 만나기에 적절해 보였다.

“역시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요. 너무 예뻐요, 아가씨.”

“그래?”

나풀거리는 원피스는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렸다.

특히 팔 부분은 시스루로 디자인되어 더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었다.

“네, 너무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어서 내려가요. 곧 오시겠어요.”

“알았어.”

꼭 도살장에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널찍한 계단을 내려가며 층이 낮아질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차라리 여기서 할리우드 액션을 보여줄까 생각도 했다.

“하… 나 너무 긴장돼. 제인….”

“아가씨, 괜찮아요. 아, 저기 대공님이 계시네요!”

“응…….”

현관 로비에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데카루스가 서 있었다.

거의 좀비처럼 비틀대며 걷자 그는 허리를 숙이며 한 마디 했다.

“당신,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아니, 차라리 아프고 싶다.”

그는 긴장한 그녀가 귀여운 듯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긴장하지 마. 계속 당신 옆에 있을 테니까.”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것만 같았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 그냥 차라리 오는 중에 마차 바퀴가 빠져서 못 왔으면 좋겠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