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45화 (45/117)

45화.

따듯했던 분위기 속엔 순간 한기가 돌았다.

난로가 꺼진 한겨울 방 안처럼 싸한 기운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무슨 소리야.”

에이든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거짓말따윈 모른다는 얼굴로 말이다.

“너….”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보낸 세월이 얼마인데 거짓말 하나 눈치채지 못할까.

밥 먹을 때, 잠잘 때, 기쁠 때, 슬플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있다.

한데 왜 이제 와서 이따위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 너 내가 정말 속을 줄 알았던 거야?”

어이가 없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속이려고 했던 것일까.

“뭔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널 왜 속여.”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태연하게 웃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남우주연상 정도는 탔을 것이다.

“야. 너 제대로 말해.”

평소에도 그랬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던 애가 갑자기 거짓말을 하니 너무 이상했다.

“뭘 말야.”

“그 황자 얘기.”

“레나, 말 했잖….”

“넌 내 말을 귓등으로 듣냐?”

돌림노래도 아니고 빙빙 도는 얘기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데카루스를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왜, 알고 보니까 내가 황자님? 뭐 이런 거야?”

웹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뻔한 이야기들.

빙의도 하는데 황자는 왜 못 되겠나 싶었다.

“대답해. 나 이미 충격 먹을 대로 먹었거든?”

“엘레나, 그게….”

“그냥, 뭐. 그래서 어떻게 알게 된 건데?”

“하,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엘레나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환생 혹은 빙의자라면 모를까. 다른 이야기론 기별조차 가지 않을 것 같다.

“뭐 우연히 경매상에서 눈에 띈 거야? 아님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고….”

답답했다.

세상에서 답답한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데.

얘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 내가 답답한 거 싫어하는 거 몰라?”

“알아. 아는데.”

“너 바로 안 말하면 나 갈 거야.”

“레나…!”

“갈게.”

엘레나는 곧장 뒤를 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순간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뭐.”

“실망하지 않겠다고.”

“하….”

머리가 아팠다.

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알았으니까 얘기해.”

엘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가 계속 뜸을 들이면 정말 나가버릴 셈이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난 그저….”

“…….”

“하… 엘레나.”

인내심 테스트라도 하자는 걸까.

보아하니 오늘 새벽이 돼도 똑같은 얘기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은 아니다.

“왜, 너 설마 처음부터 날 속인 거니? 일곱 살 때부터? 그래서 지금 이렇게 뜸 들이는 거야?”

홧김에 확 질러버렸다. 당연히 아닐 거라는 걸 알기에. 하지만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 꼭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들킨 듯이.

“…….”

“너 설마….”

얕게 뛰던 심장이 요동친다.

이미 진실을 알면서 아니라고 부정한다.

아니라고 믿고 싶기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기에.

“아니지?”

“…….”

“말해, 에이든 밀러. 아니지?”

“레나….”

그는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입술을 뜯었다.

피가 번졌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연신 뜯는다.

“네 입으로 말해. 당장….”

머리가 고장 난 시계처럼 혼란스럽다.

오른쪽으로 가야 할 시곗바늘이 왼쪽으로 도는 느낌이다.

“…….”

그는 기어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꿰매기라도 한 사람처럼 입술조차 벌리지 않았다.

“너….”

도저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너… 너 설마.”

“…….”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니?”

“…….”

“밀러 후작의 영식이었단 말도…?”

“…….”

“타국에서 쫓겨 도망쳐 왔다는 말도, 전부?”

제발 그가 어떤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라고,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말해.”

“응….”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너, 지금이야말로 거짓말이라고 해.”

“…….”

“당장….”

“…….”

“당장!!!”

엘레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고성을 질렀다.

고요한 마을엔 그녀의 외침에 크게 번졌다.

“하… 하하하…….”

“레나….”

“어디부터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야? 내 친구인 건 진짜니?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한 것도 다 거짓이야?”

“…….”

그녀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게 다 거짓이길 바랐다.

마음속에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배신감? 분노? 상처?

이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흰 도화지에 빨간색과 검은색 크레파스로 주욱 그어놓은 기분이었다.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응?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에이든. 아니…. 노아.”

“…….”

“내가 불쌍해서 그랬어? 부모 없고 돈 없는 불쌍한 애랑 놀면서 간접체험이라도 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랬니?”

“…….”

온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입이 말라서 도저히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 내가 널 만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

“난 너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

“너 진짜 최악이야….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데카루스보다 최악인 인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 기준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재수 없게도.

“나 다신 찾아오지 마.”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채 차갑게 돌아섰다.

정말 꼴도 보기 싫을 만큼 그가 미웠다.

“잠깐만.”

탁-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마지막 할 말이라도 있는 듯이.

“놔.”

“엘레나.”

“놔!!!”

엘레나는 거칠게 손을 쳐냈다.

그러자 바닥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브로치였다.

아까 시장에서 그를 위해 산 금빛 브로치.

하지만 이제 필요가 없어진 브로치.

“버려. 이제 쓸모없으니까.”

“엘레…!”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그가 따라오는 탓에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에이든!!!”

“엘레나, 제발…!”

그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이제 중요치 않았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면 우린 진짜 여기서 끝이야.”

“레나….”

엘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그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하….”

* * *

어두컴컴한 골목길엔 가로등 지기가 가로등에 불을 올려놓고 있다.

검은 로브를 쓴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듯한 그는 불빛 하나 없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디 소속이지.”

“…….”

“하긴 말해줄 리 없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빛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장검을 들고 준비 태세를 취했다.

“데카루스지?”

에이든은 목을 좌우로 두 번 꺾더니 차가운 비소를 흘렸다.

“형은 쓸데없는 짓도 잘해.”

순식간에 바뀐 그의 눈빛에 스파이로 보이는 자들은 잠시 움찔했다.

“뭐, 이곳에 있는 자는 아무도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걸 명심해.”

그는 소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들어 바로 앞에 있던 자의 목에 꽂았다.

깊게 박힌 칼을 뽑아내자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무리로 보이는 사내들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에이든의 몸짓은 고도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날렵했다.

“넌? 도망갈래? 아님 여기서 얘들처럼 죽을래?”

“사, 살려주십시오. 전하. 저는 아무 잘못도…!”

푹-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 따위에겐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는 피 칠갑을 한 첩자들이 벌레처럼 꿈틀댔다.

그러자 그는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는 사내를 꾹 밟으며 입을 열었다.

“괜히 손만 더럽혔잖아.”

그는 로브를 벗어 피가 묻은 얼굴을 쓸어 올렸다.

그러곤 그에게 내리는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더럽게.”

* * *

재수가 없었다.

오두막에서 나오자마자 비가 내렸다.

소나기이길 바랐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가로등 빛에 몸을 맡기며 저택으로 향했다.

방수 하나 되지 않는 로브는 쓸모없었다.

온몸으로 비를 다 맞은 채 걸었다.

“추워….”

몸이 뜨거웠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에이든 생각뿐이었다.

이 와중에 그가 비에 맞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아….”

저택 앞에 다다르자 기사들이 그녀를 막고 섰다.

비에 젖은 모습에 놀란 기사들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썩 운이 좋았다.

못 들어갈 줄 알았는데.

댕-

댕-

댕-

종이 아홉 번 울렸다. 벌써 저녁 9시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가 뭐라고 할까.”

저택 안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작게 울릴 뿐이었다.

방 앞에 선 엘레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끼익-

문틈 사이로 그가 보였다.

화가 난 모양이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엘레나….”

그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 꼴로 들어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미안.”

딱히 미안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라도 해야 면목이 있을 것 같아서.

“당신 대체…!”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터벅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의 형상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그가 어깨를 잡았다.

그 덕에 흔들리는 것이 조금 멎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붉은 눈이 예쁘게 빛났다.

“그러게. 나 뭘 하다 온 걸까.”

차라리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꼴은 면했을 텐데.

그냥 당신의 새장에 갇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을걸.

“나 대체 뭘 하다 온 걸까, 카루스.”

“엘레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쥐어진 어깨에 온기가 감돈다.

도저히 그를 제대로 보고 있을 힘이 나지 않는다.

“카루스.”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 너무 힘들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울먹이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나 좀….”

“…….”

“나 좀 안아줄래…?”

평온했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잘못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눈에 선명했다.

“나 좀 안아줘, 카루스.”

“…….”

“나 지금 당신이 너무 필요해.”

어느새 흐른 눈물이 빗물을 지워냈다.

툭툭.

앙증맞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

일 초, 이 초, 삼 초.

그의 품에 안겼다.

빳빳한 셔츠가 조금씩 젖어 든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맴돈다.

“나 여기가 너무 아파.”

“…….”

“심장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아.”

볼품없이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려온다.

입술을 꽉 물어 울음소리를 막아봤지만 소용없었다.

“…….”

그는 말없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다 젖어버린 원피스엔 그의 온기가 가장 가까이 맞닿았다.

“이리 와. 일단 씻고 말해.”

“싫어….”

욕실로 이끄는 손길을 잡아채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진다.

“가지 마….”

“…….”

“나 혼자 있기 싫어….”

그의 옷깃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더 이상은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당신마저 가버리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엘레나, 말 들어. 당신 지금 상태가….”

“키스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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