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해가 지기 전, 그러니까 푸른 하늘에 붉은 물감이 흩뿌려지기 전.
에이든을 만나러 광장에 나왔지만 그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초조함에 깊게 쓴 망토를 살짝 걷어 그가 자주 가던 식당 쪽을 살펴보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에이든….”
엘레나는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며 애꿎은 시계탑만 바라보았다.
분명 해 지기 전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잘못 들은 걸까.
“레나.”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주위 사람들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에이든…!”
“쉿.”
뒤를 돌자마자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얹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입을 막은 그의 손에선 역시나 다른 향기가 났다.
어쩐지 익숙했지만 그 출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
“너…!”
푹 뒤집어쓴 로브 탓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어딜 가는 거야…!”
에이든은 마주 잡은 손을 이끌며 광장을 나섰다. 그 역시 긴장한 듯 주변을 경계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들의 집으로.”
집.
그것은 우리들의 아지트를 말하는 것이다.
포레 가의 한 숲에 버려진 오두막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집으로 삼았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숨이 차고 헐떡였지만 쉴 새가 없었다.
데카루스가 오기 전, 저녁 9시까지는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없어질 때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끼익-
다 삭아버린 나무문은 곧 부서질 것처럼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오래되어 그런지 몸으로 두 번은 밀쳐야 간신히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집은 역시나 거미줄이 잔뜩 처져 있었다.
또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은 곧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엘레나.”
문을 닫자마자 에이든은 양팔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한참을 뛰어서일까. 그의 숨은 거칠었다. 맞닿은 몸에선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에이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그저 마주한 온기만을 느끼며.
물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왜 그때 그렇게 떠났냐고 수백 번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온전히 그를 느끼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나도….”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다.
마치 그녀를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손끝 하나하나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 네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에이든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물먹은 것처럼 촉촉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땐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근데 왜 그랬어….”
“…….”
“내가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레나.”
그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진심이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후… 알았어. 일단 앉아.”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옆에 있는 직사각형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러곤 의자를 꺼내 그녀를 먼저 자리에 앉혔다. 어깨를 짓누르는 손에선 그의 마음속 무거운 짐이 느껴졌다.
“근데 머리색은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엔 금발이더니.”
에이든은 원래부터 금발 머리다.
하지만 예전부터 타고난 머리색이 싫다며 매번 검은색으로 염색하곤 했다.
한데 오늘은 또 검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가발이야.”
“뭐?”
예전부터 머리 상한다고 가발을 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와서 가발을 쓴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너 예전에 내가 가발 쓰라고 할 땐 안 쓰더니. 뭐야.”
“어쩔 수 없었어. 너무 서두르지 마, 레나. 천천히 하자.”
엘레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었다.
그러곤 경찰이 범죄자를 심문이라도 하듯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하…. 그래. 변명이든 뭐든 해 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와 이렇게 마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절친한 사이인데도 살짝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배에서 잡힌 당일 날 기억나?”
“응,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그때의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어두컴컴한 배 안에 갇힌 기분이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손과 발이 묶인 채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음 타깃이 자신일까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전전긍긍했다.
또 바로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간 사람들의 따듯한 피의 감촉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그 떨림, 공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나도 경매장에 넘어갔어. 그리고 한 후작이 나를 사들이더라. 그것도 노리개로.”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천천히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 * *
불법 노예상에게 잡힌 날.
그때 그 역시 경매상에 넘어갔다.
정신을 잃고 한참 뒤에 눈을 떴지만 손목과 발목은 여전히 묶여있었다. 피부에 닿은 차가운 철창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철창을 두드리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128번, 나와.”
128번. 그건 에이든을 칭하는 숫자였다.
짐승도 제 이름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저 128번이었다. 에이든은 저항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반항은 독약일 뿐이었다.
찰싹-
피부에 닿은 거친 촉감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그를 마구 때렸다.
여린 살에선 피가 나는 것같이 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눈을 가린 천에는 약간의 빛이 들어왔다.
또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름다운 소년의 눈빛이 궁금하십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무서웠다.
사람들의 수군대는 목소리와 옆에 있는 사회자의 큰 목소리가 머리를 아프게 짓눌렀다.
“자- 많은 신사 숙녀 분들이 손을 들어주셨군요. 공개하겠습니다. 128번의 눈을!”
자잘한 속눈썹에 빛이 비쳤다.
오랜만에 본 빛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의 앞엔 수많은 관중들이 있었다.
다들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해 부채를 펼쳐 든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손짓 하나로 그의 가치가 매겨졌다.
1000루나, 10000 루나, 그리고 10만 루나.
몸집이 있고 수염을 잔뜩 기른 그는 늙은 귀족처럼 보였다.
그의 말소리에 사람들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것 같다.
10만 루나면 1년은 먹고살 정도의 가치니까.
수군대는 소리와 박수를 치는 소리가 미묘하게 겹쳤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잘못 걸린 게 분명할 테지.
그는 그렇게 늙은 귀족에게 팔려 갔다.
그의 이름은 셜롯 콘라드.
이름만큼이나 그의 취향은 봐 줄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어린 남자를 밝히는 더러운 취향이라니.
그는 집으로 가는 마차에서부터 늙은 후작에게 더럽혀졌다.
마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마차를 몰았다.
“그만…그만하세요…! 악!”
“이렇게 좋은 것을 놔두고 어떻게 그만할까, 응? 네 이름을 정해 주어야겠다. 넌 앞으로 내 것이니.”
셜롯은 그를 거칠게 다루었다.
그의 입술과 손길이 닿는 곳곳이 채찍을 맞은 듯 아렸다.
쭈글쭈글한 피부가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흐흑… 흐흐흑….”
그렇게 그는 완벽하게 후작의 개가 되었다.
밤 시중을 들라 하면 밤 시중을 들었고 바닥에서 밥을 먹으라 하면 바닥에서 밥을 먹었다.
그때만큼 끔찍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부인이 있었다.
늘 상냥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베풀어 준 그녀였다.
하지만 그와의 잠자리를 들켜버렸다.
문틈으로 비친 아리따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이후로 부인은 그를 찾지 않았다.
다행히 미워하거나 때리진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잘해주진 않았다.
* * *
에이든은 그때가 생각이 난다는 듯 손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레나는 차가운 두 손을 세게 잡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귀족 중에서도 악취미를 가진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당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응.”
그의 두 눈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확고했다.
아무도 그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정말 믿어도 돼…?”
“그래.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에이든은 입매를 예쁘게 말아 올리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엘레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것이 많이 남아있었다.
“근데 어떻게 나오게 된 거야…?”
“안 믿기겠지만 황비께서 날 구해주셨어.”
“황비가…? 황비가 어째서 널?”
엘레나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그의 부인께서 황비와 친분이 있었나 봐. 그날 황비께서 후작의 집에 방문했는데 나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시며 우셨어. 자기가 잃어버린 아들과 똑같이 생겼다고.”
“그래서 널 데려간 거야…? 황궁으로…?”
“맞아.”
“에이든….”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난로처럼 따듯한 온기가 손끝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고생 많았구나… 에이든….”
울먹이던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드라운 피부 결은 그가 잘 지내고 있었다는 신호겠지.
“고생은 무슨. 레나, 네가 더 고생했겠지.”
“응….”
에이든은 보조개가 팬 얼굴로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근데….”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에이든은 시선을 맞추었다.
태양을 담은 듯한 그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왜 아까부터 자꾸 거짓말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