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러자 수는 입 꼬리를 쭉 올려 활짝 웃어 보였다.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귀신처럼 무서웠다.
“그럼 몸으로 때우면 되겠네!”
“수!”
그렇게 엘레나의 험난한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빨간 랍스타가 그려져 있는 앞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하… 이번 생에서 알바 같은 건 안 할 줄 알았는데.”
전생에서 보육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악착같이 한 게 알반데 이곳까지 와서 또 일을 할 줄이야.
엘레나는 허리에 양팔을 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프론은 다시금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랑 같이 일하니까 너무 좋아. 매일 돈 안 가져오면 안 돼?”
그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려 노이로제가 올 것만 같았다. 엘레나는 숨을 가다듬곤 차분히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제프론.”
“누나는…!”
딸랑-
“네- 어서오세요, 손님.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레나는 아양 떠는 제프론을 제쳐두고 바로 손님을 맞으러 갔다.
그러자 그는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나도 다 컸는데….”
알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르데오의 분위기가 활기차서 그런가 딱히 진상손님이랄 것도 없었다.
다만 랍스터와 문어를 나르는 탓에 팔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레나! 청어구이 나왔어!”
“아, 갈게!”
손님이 너무 많아 바쁜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날씨가 더워진 탓에 식당 안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이 정도야 견딜 수 있었다.
“하아. 힘들어….”
그렇게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여 손님들을 바라보던 중.
“응?”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 엘레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기분 탓인가….”
오랜 바깥 생활로 인해 예민해진 청각이 그녀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주위엔 온통 손님뿐이었고 수상한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눈알을 굴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분명 누군가 감시하는 듯한 이 기분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누나?”
실수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누가 지나칠 수 있을까.
제프론은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라임 주스를 들고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아니, 아니. 없어.”
라임 주스를 받아 든 엘레나는 빨대를 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 되겠다. 누나, 좀 쉬어. 손님은 내가 받을게.”
“아니야, 나 괜찮….”
“누나.”
제프론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완고한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휴… 알았어. 고마워. 나 좀 쉴게.”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이 난 엘레나는 이마에 차가운 컵을 댔다.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에 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멍하니 식당 안을 바라보던 엘레나는 한숨을 돌리며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봐….”
예전처럼 쫓길 일은 없었다.
황궁의 기사도 없고 나쁜 짓을 한 것 또한 아니니까.
“그러니까 진정해, 엘레나.”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분명하다.
아직 완연한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더위를 먹었다는 건 웃기지만 말이다.
엘레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힘을 쓴 탓일까.
눈을 감자마자 쌓여있던 피로가 서서히 몰려왔다.
“자면 안 되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며 점점 깊은 심연에 빠져들었다. 노곤했던 몸이 의자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기분이 들 무렵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응?”
아가씨라는 말에 정신이 벌떡 든 엘레나는 정신없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왜 불렀….”
“뭐야, 아가씨라고 부르니 정말 귀족 영애라도 되는 줄 안 모양인가?”
그녀의 앞엔 한눈에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눈이 쭉 째진 그는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지분대며 조소를 지었다.
“나랑 나갈래? 오늘 하룻밤만 같이 보내면 내가 널 귀족 영애로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얼굴도 반반한 게 꽤나 쓸모 있을 것 같거든.”
기분 나쁜 손이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던 남자는 순간 엘레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거 놓으….”
탁-
“이 손 놓으시죠, 데번 자작.”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제프론….”
제프론은 자작의 손을 꽉 쥐더니 이내 뿌리쳤다.
“하! 별 거지 같은… 하다 하다 평민 따위가 내 앞길을 막아? 이 건물이 누구 것인지는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런 상황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감히 평민이 귀족에게 손을 대다니.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수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왜인지 랍스터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은 수가 처량해 보였다.
“아, 아닙니다. 자작님. 저희 동생이 실언을…!”
난생처음으로 수가 누군가에게 굽실대는 것을 보았다.
항상 당당하고 활기찬 그녀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울렁거렸다. 힘이 없는 약자들의 설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가겠습니다, 자작님. 그만 화를 거두어 주시지요.”
모든 일의 화근이 자신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레나!!!”
“괜찮아.”
“누나!”
제프론의 표정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슬퍼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사내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오지 마. 나오는 순간 다신 너희 얼굴 안 봐.”
“그거 좋은 생각이군.”
자작은 바싹 마른 단풍잎 같은 손으로 입을 막곤 깔깔거리며 그녀를 끌고 나갔다.
“당돌한 게 마음에 들어. 과연 침대에서도 그럴까?”
그는 엘레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얼굴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탁-
“악!!!”
검은 로브를 쓴 사내가 나타나 빠르게 그를 덮쳤다. 급소를 찔려 널브러진 자작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누, 누구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작의 멱살을 쥐었다.
허공에 끌어 올려진 그의 모습은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애처로웠다.
“…….”
“누…누구냐니까…!”
자작은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남은 듯 미친 듯이 발악을 했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그에게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사, 살려줘…! 아, 아니.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
검은 로브로 가려진 얼굴에선 그 어떤 표정도 찾을 수 없었다.
자작을 꽉 잡아 올린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쾅-
“아악!”
그는 자작을 테이블 위로 세게 던지더니 이내 곧바로 뒤로 돌아섰다.
펄럭이는 망토의 등허리에는 금빛으로 칠해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혹시 존함이라도….”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레나는 무척이나 아쉬워 보였다.
상황이 종료되자 그들을 구경하던 손님들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
엘레나는 긴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아 숨을 들이켰다.
“누나, 괜찮아?”
“레나!”
수와 제프론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살짝 엿본 그들의 표정은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해, 정말….”
“괜찮아, 괜찮아. 잘 풀렸잖아.”
엘레나는 그들의 등을 토닥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속 언저리에는 자신을 구해준 그에게 어떠한 보답도 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자리 잡았다.
* * *
“그럼 나 이만 갈게! 에이든 보러 가야 되거든.”
엘레나는 앞치마를 수에게 건네며 문 앞에 섰다.
시계탑은 6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고 새빨갛게 물든 하늘엔 커다란 달이 흐릿하게 보였다.
“둘이 드디어 만난 거야?”
“응, 드디어.”
엘레나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수를 응시했다.
“잘 가. 그리고 다음엔 에이든이랑 같이 오고.”
수는 팔을 벌려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온기에 긴장되는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제프론 역시 널찍하게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다음엔 안 봐줘.”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엘레나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꼬맹이는 공부나 하세요.”
“뭐?”
“갈게!”
그녀의 뒤론 꼬맹이가 아니라며 성을 내는 제프론과 그를 막는 수의 모습이 예쁘게 그려졌다.
엘레나는 곧장 광장 분수대 앞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았기에 여유롭게 걸었다.
거리에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들부터 예쁜 등을 켜놓고 호객 행위를 하는 상점들로 즐비했다.
“예전엔 저런 머리핀이나 옷 보면 눈 돌아갔었는데….”
지금은 뭐 너무나도 풍족하기에 치장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게 제일 문제다.
“예쁜 브로치 보고 가세요. 여자, 남자 모두에게 어울리는 브로치입니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다양한 보석들이 박힌 브로치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에이든의 눈 색을 닮은 호박석 브로치가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
“이거 얼마예요?”
“500루나!”
“너무 비싼데….”
아까 수가 불쌍하다고 준 돈은 300루나 정도였다. 돈 좀 가지고 나올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아가씨, 남자친구 주려고?”
“아, 아니. 그냥 친구예요.”
그는 시무룩해 있는 엘레나를 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 하긴! 그럼 300루나에 줄게!”
“정말요?”
풀이 죽어있던 엘레나는 눈은 금세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 역시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브로치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엘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곤 뒤를 돌았다. 그러곤 손을 하늘 높이 뻗어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에이든이 좋아하겠지?”
그가 선물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굉장히 궁금했다.
부끄러워하려나?
아님 고맙다면서 엄청 기뻐하려나?
상상에 부푼 엘레나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