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이른 아침인데도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은 바로 에이든을 만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데카루스는 이미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 이름을 부르며 깨웠지만 못 들은 척, 자는 척을 했다.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다 떠올랐다.
이삭이 알려준 대로 탈출을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데카루스에게 졸라 봐도 절대, 절대 안 된다고 할 텐데.
“어떡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또 몰래 탈출하다가 걸리면 그날로 정말 방 밖으로 못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일단 이대로 그가 나갈 때까지만 기다리자.
“엘레나.”
그가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절대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든을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어난 거 다 알아.”
“…….”
대답이 없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구둣발 소리가 나무 바닥과 맞물려 기분 나쁘게 울렸다.
“엘레나.”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진 걸 보니 바로 앞에 있나 보다. 긴장한 탓에 이불 속에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오늘은 또 무엇 때문에 심술이 난 걸까.”
그는 이불 위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자는 척을 해 봤자 소용없었다.
“엘레나.”
“나 좀 아파….”
역시 이럴 땐 아픈 척을 하는 것이 최고다.
“그런 거짓말도 안 좋아.”
그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거짓말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작전이다.
“오늘 별로 아침을 먹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연어를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연어라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 중 하나이다. 연어는 아르데오 쪽에서는 보기 드문 생선이라 귀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에이든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
“아니,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슬픔이 묻어 나왔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연어를 못 먹는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니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쉰 뒤 침대 맡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인에게 일러둘 테니 뭐라도 챙겨 먹어.”
“응.”
그는 어쩐 일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순순히 방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엘레나는 이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뒤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지…?”
시곗바늘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릴 시간이다.
“좋아, 가 보자.”
엘레나는 곧장 옷장 앞에 서 가장 허름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귀족 영애처럼 입고 나가기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얇은 하얀 블라우스 위에 밤색 원피스를 껴입은 그녀는 검은 로브를 챙겼다.
“이따가 에이든을 만나야 하니까….”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하기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끼익-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좌우를 살폈다.
이삭이 말한 대로 아침 시간이니 시종들도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다.
시종 전용 식당은 별관에 있었기에 역시나 본관은 조용했다.
엘레나는 이틈을 타 조용히 1층 계단으로 향했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 간신히 1층에 내려선 순간 시녀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근데 미노세타 공작님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뭐 대공님보다는 아니겠지만.”
“맞아, 맞아. 대공님 볼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두근대는지. 아, 엘레나 아가씨는 좋겠다.”
순간 시녀들의 깔깔대는 웃음과 함께 짙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망했다.”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툭 튀어나온 벽 뒤에 숨은 엘레나는 간신히 그녀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후… 살았다.”
그녀는 다시 주변을 살피며 밖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받는 햇빛에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빨리, 빨리.”
엘레나는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정원을 향해 달렸다. 나무와 꽃이 많기에 숨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열심히 달린 탓에 숨이 마구 차올랐지만 지금 당장 뛰지 않으면 에이든을 만나지 못한다.
엘레나는 시종들이 지나갈 때마다 큰 나무 뒤에 숨으며 조심스레 정문 쪽으로 향했다.
마치 첩보 작전처럼 숨 막히는 순간들이었다.
“거의 다 왔어…!”
이삭의 말대로 정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또 저 멀리서 음식물을 수거한 카트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아가씨?"
어디선가 들리는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집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오늘 날씨가 좋네?”
덜덜 떨리는 어색한 목소리와 함께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오랜만에 산책이신가 보군요.”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허름한 옷을 입은 그녀를 이상하게 느꼈을 것이다.
“한데 아가씨….”
“응, 근데 나 물 좀 가져다줄래? 목이 너무 마르네?”
하지만 그녀 역시 대처에 능한 사람이었다.
엘레나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방긋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당황스러운 듯 껄껄 웃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시종도 아닌 집사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니.
그녀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부탁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물을 가지러 갔다.
그러자 엘레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정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문 앞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아르데오 공국을 상징하는 사자 무늬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의 출입을 막으라는 대공 전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욕이 생각났다.
X됐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은 척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있는 뇌세포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잊었나?”
순간 그녀의 얼굴엔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확 바뀐 표정에 병사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예…?”
“이 대공저 안주인이 누군지 잊었냐고 물었어.”
“아, 아닙니다. 아가씨. 저희가 결례를…!”
“됐어.”
그녀는 팔을 걷어 올려 앞을 막아선 창을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허리를 꼿꼿이 펴며 우렁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엘레나는 위풍당당히 정문을 빠져나갔다.
물론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아, 미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그녀는 정문에서 멀어질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편 채 당당히 걸어 나갔다.
허름한 복장에 흐트러진 머리를 한 귀족 부인이라니.
지금 이 상황이 퍽 웃겼다.
엘레나는 새하얀 건물이 밀집된 블랑슈 가를 지나 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에이든과 만나는 시간은 저녁.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의 병사들에게 잡힐 수도 있다.
“수는 날 받아주겠지.”
엘레나는 곧장 수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활기찬 거리를 걷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Restaurant Clair」
딸랑-
“수!”
엘레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러곤 문을 쾅 닫으며 문에 달린 창문으로 밖을 두리번거렸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야, 레나잖아? 요새 자주 오네?”
손님인 줄만 알았던 수는 그녀의 등장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나 여기서 몇 시간만 좀 때우다 갈게. 갈 데가 없거든.”
엘레나는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자 수는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줄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응, 고마워….”
“제프론! 여기 테이블 좀 닦아!”
그녀의 말에 주방에서는 근육질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내가 등장했다.
그를 보자마자 엘레나의 마음은 철렁했다.
“어? 엘레나?”
수의 동생인 제프론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가 앉은 테이블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 안녕, 제프론.”
엘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 인사를 했다.
“뭐야, 나 안 반가워? 난 누나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근데 누나 쫄병은 어디 갔어?”
“없어, 없으니까 빨리 가.”
제프론은 수와 닮아 성격이 쾌활하고 모난 구석 없이 착하다.
하지만 단점은,
“아니, 이렇게 오랜만인데 어떻게 그냥 가. 누나, 오늘 나랑 데이트 안 할래? 내가 근사한 레스토랑 알아놨는데.”
말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여태껏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
“제프론, 누나가 매번 말했지. 공부나 하라고. 요 쬐끄만 게!”
엘레나는 깊게 들이쉰 숨을 푹 내쉬며 빨리 가라며 허공에 손을 털었다.
“누나는 왜 항상 날 어린애로만 생각해. 나 이렇게 많이 컸….”
“제프론! 연애질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들어와!”
주방에서부터 들리는 수의 우렁찬 목소리에 그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나무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딱 기다려.”
그의 눈빛은 먹이를 탐하는 사자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뒤로 돌아선 그의 어깨는 이제 여느 사내들처럼 쭉 벌어져 듬직했다.
그저 어린애 같았던 제프론이 벌써 저렇게나 컸다니.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휴….”
그렇게 테이블에 앉아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 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우리 레나가 좋아하는 랍스터 플레이트! 방금 올라온 거라 싱싱해. 먹어 봐.”
수는 제프론이 넣어둔 의자를 꺼내 앉아 턱을 괴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서 맛있다고 말해 달라는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와, 이거 내가 엄청 좋아하는 거잖아…!”
큰 플레이트 안에는 치즈를 뿌려 구운 랍스터와 버터로 볶은 감자, 옥수수 그리고 갖가지 채소를 곁들인 샐러드가 있었다.
엘레나는 바로 포크를 들어 이미 잘려 나온 랍스터 살을 찍어 입에 넣었다.
“너무 맛있어…!”
엘레나는 곧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수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곤 맛있게 먹는 그녀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수, 진짜 이건 최고야….”
울먹거리는 그녀의 볼은 해바라기 씨를 잔뜩 넣은 햄스터처럼 볼록했다.
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엘레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행복한 듯 눈을 감고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녀는 순간 입 운동을 멈췄다.
“왜? 무슨 일 있어?”
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돈이….”
“뭐?”
“돈이 없어….”